‘하늘의 경고’에서 ‘여론의 심판’으로, 재이사상의 현대적 변주
한국은 국가적 재난이나 참사에서 서구와는 사뭇 다른 사회적 대응 방식을 보인다. 합리적 원인 규명과 제도적 보완을 넘어,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과 정치권에 거의 무한에 가까운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민주주의적 책임의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심층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재이사상(災異思想)’의 정서적 유산이 흐르고 있다. 재이사상이란 왕이 부덕하거나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에서 재난이나 괴이한 일로 경고하거나 응징한다는 사상으로, 이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재이가 일어나면 왕은 즉시 식사를 줄이고, 잔치를 멈추며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했다. 이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이 초월적 권위 앞에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회복하는 상징적 의례였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의 위기 대응 방식에서 놀라울 만큼 유사하게 재현된다. 대통령은 국가적 참사가 발생하면 공개 일정을 줄이거나 축제를 취소하고, 즉시 국민 앞에 사과하며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한다.
한국 정치에서 반복되는 ‘인적 쇄신’ 역시 이러한 재이적 전통의 현대적 표현이다. 재난의 직접적 원인이 시스템의 미비나 실무자의 과실에 있더라도, 최종 책임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지도자에게로 귀결된다. 결국 성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관련 부처 장관이나 참모진을 교체하는데, 이는 실질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지도자가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는 가시적인 ‘제스처’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 이때 등장하는 말이 바로 ‘정무적 책임’이다. 명확한 잘못이 없더라도 여론이 분노한다면, 정치인은 그 감정 앞에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심판의 주체가 하늘에서 국민으로 바뀌었을 뿐, 국가 위기 앞에 권력이 책임지는 재이사상의 정서적 구조는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정치의 심판자가 ‘하늘’이었다면, 현대 한국 정치의 심판자는 단연코 ‘국민 여론’, 즉 ‘민심’이다. ‘천심이 곧 민심’이라는 전통적 명제는 현대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왕이 하늘의 뜻을 거스를 때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집단 무의식은, 대통령이 민심을 거스를 때 곧바로 정권의 위기가 닥친다는 강력한 정치적 믿음으로 전환되었다.
이 독특한 정서 구조는 한국 민주주의의 활력을 낳았다. ‘국민이 곧 하늘’이라는 인식은 지도자로 하여금 항시 국민을 두려워하고 민심을 살피게 만든다. 이는 헌법 조문만으로는 담보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 견제 장치다. “국민이 보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은 공직사회의 부패와 오만을 억제하고, 정치인들이 높은 도덕적 기준을 의식하게 만든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유능한 ‘행정가’의 역할을 넘어, 공동체의 도덕적 상징이자 감정의 매개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기에, 정책 실패보다 “국민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때로는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입힌다. 이러한 도덕적 감정적 긴장 관계와 즉각적인 반응성은 한국 정치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한국 민주주의의 정서적 동력은 국민들이 선거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강력한 국민 여론의 힘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지도자가 ‘진정성’과 ‘태도’로 국민의 감정에 지나치게 반응하다 보면, 정책의 합리성을 압도하는 감성 정치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 결과,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 대신 희생양을 찾는 식의 인적 쇄신으로 문제가 임시 봉합될 수도 있다. 민심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국정이 흔들리는 정치적 불안정성 또한 재이적 전통이 동반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제도 위에 조선의 재이적 정서가 놓인 정치다. 조선은 왕에게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쳤고, 현대의 한국 민주주의는 대통령에게 국민의 뜻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하늘이 재앙으로 왕을 꾸짖던 시대에서, 국민이 여론으로 대통령을 심판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왕은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낮췄고, 대통령은 국민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낮춘다. 그 모든 과정은 공동체의 도덕을 회복하는 ‘정치의 제사’다. 그 덕분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도덕적 각성의 힘을 유지한다. 재이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재이사상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뛰고 있는 살아있는 전통이자, 한국 정치의 역동성과 국민 참여의 에너지원이다. 그 덕분에 한국의 민주주의 열기는 여전히 살아 있고,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