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 정신에서 민주 언론까지: 한국 언론사의 독자적 전통”
서구 언론의 기원은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에서 찾을 수 있다. 필사에 의존하던 지식과 정보가 대량으로 복제되면서, 정보의 접근성과 확산 속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 결과 상업과 외교 소식을 전하던 ‘가제타(Gazzetta)’ 같은 초기 정보지가 등장했고, 이는 점차 정기 간행물인 신문(Newspaper)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초기 신문은 엄격한 검열 탓에 단순한 사실 전달에 그쳤으며, 높은 가격과 낮은 문해율로 인해 대중과도 거리가 있었다. 전환점은 1695년 영국이 검열제를 폐지하면서 찾아왔다. 억눌려 있던 출판 수요가 한꺼번에 분출되며 신문과 팜플렛 발행이 급증했고, 인쇄물의 확산은 커피하우스 같은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켰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신문을 읽고 사회·정치 문제를 토론하며 본격적인 공론장을 만들어 갔다.
언론은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철학적 토대도 함께 쌓아갔다. 17~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언론 자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존 밀턴은 진리가 자유로운 논쟁 속에서 스스로 승리할 것이라 주장하며 ‘사상의 자유 시장’ 개념의 원형을 제시했고, 존 로크는 표현의 자유를 인간의 ‘자연권’으로 규정했으며, 볼테르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의견까지 존중해야 한다는 관용 정신을 설파했다. 이러한 사상들은 결국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축소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로 이어지며, 언론 자유의 제도적 기틀을 다졌다.
신문은 점차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매체로 거듭났다. 19세기에 들어 윤전기의 발명과 전신의 보급 등 기술 혁신은 신문을 재정적으로 독립한 ‘대중 매체’로 성장시켰다. 더불어 시민 사회의 성장과 정치 참여 확대는 신문에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고 권력의 남용을 견제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했다. 그 결과 서구 언론은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이자, 권력을 감시하는 ‘사회의 감시견(Watchdog)’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언론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9세기 말 개항 이전까지 근대적 의미의 언론(Press)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14세기 조선 건국과 함께 유교 철학에 입각한 ‘언론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조선의 언론권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권력이었다. 조선의 ‘언론’은 외부의 독립된 매체가 아니라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 안에 정교하게 설계된 공식적인 제도였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의 엘리트 관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그들의 임무는 왕의 독단을 비판해 유교적 이상 국가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왕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간쟁'은 단순한 권리를 넘어 신성한 '의무'였다. 조광조와 송시열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왕의 분노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니 되옵니다”라 외쳤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 사회에 ‘절대 권력을 향한 비판이야말로 공동체를 위한 최고의 충성’이라는 강력한 언론 서사를 뿌리내리게 했다.
언론권의 전통은 근대에 와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보도지침에 맞서 제작 거부를 외친 기자들의 깊은 정신 속에는, 불의한 권력에 목숨 걸고 저항했던 조선 선비들의 '상소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바로 이 언론 서사를 계승했기에 한국 언론은 강력한 저항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사회 변혁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동력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조선의 언론권은 유교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유교 문명권인 중국에서는 언론권 전통이 뚜렷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 비슷한 기능이 존재하긴 했지만, 한국만큼 강력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언론권은 왜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일까?
일단 철학적 토대의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 곧 ‘천자’로서 초월적 권위를 지녔다. 신하의 비판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도덕적 수양을 돕는 ‘간언’에 불과했으며,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불경죄로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의 성리학은 왕을 절대적 존재가 아닌, 성리학적 이상인 '왕도'를 실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존재로 규정했다. 왕의 권력은 하늘이 무조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를 할 때만 정당화되는 '조건부 권력'이었다. 신하가 왕을 바로잡는 것은 '최고의 충성'이었다.
지정학적 요인도 작용했다. 조선의 왕은 명·청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 '번국(藩國)의 군주'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졌다. 이는 조선의 왕이 중국 황제와 같은 초월적 지위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신하들은 이 지점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왕이 독단적인 행보를 보일 때마다 "이는 천자를 기만하는 행위"라거나 "천하의 보편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라는 논리로 비판했다. 즉, 중국 황제라는 외부의 상위 권위가 조선의 왕권을 상대화하고 신하들의 비판에 정당성을 실어주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은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언론은 서구의 ‘표현의 자유’ 전통과도, 같은 유교 문명권인 중국과도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조선의 언론은 국가 시스템 속에서 권력을 직접 견제하고 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 이 정신은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한국 언론만의 뚜렷한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러한 정체성은 단순히 언론의 기능적 역할을 넘어 사회 전체가 언론을 바라보는 태도와 기대치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핵심적인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언론에는 공익성에 대한 강박이 있다. 한국은 언론을 사기업 이전에 '사회의 공적인 그릇(公器)'으로 보는 인식이 매우 강하다. 언론에게 '사회의 목탁이 되어야 한다' 등 강력한 공적 역할을 요구한다. 따라서 특정 정파나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도는 "언론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강한 윤리적 비판에 직면한다. 반면 서구는 언론 생태계를 다양한 사상과 의견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사상의 시장'으로 본다. 이 시장에서는 폭스뉴스나 MSNBC처럼 정치적으로 편향된 목소리도 하나의 '상품'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진실은 이들의 경쟁 속에서 시민의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둘째, 한국은 기자에게 ‘선비 의식’을 기대한다. 기자는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회의 잘못을 꾸짖고 공동체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공적 지식인’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기자가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까지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기대는 동시에 무거운 압박이 되기도 한다. 기자는 권력이나 자본에 휘둘려 사명을 저버렸다고 판단되는 순간, ‘기레기’라는 낙인과 함께 가장 먼저 신뢰를 잃는 직업이다.
셋째, 한국 언론은 권력을 밀착 견제한다. 조선의 사간원이 왕 가까이에서 직언했던 것처럼, 한국 언론은 권력과 가까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정부 부처와 기관마다 기자실이 상주하는 ‘출입처 시스템’이다. 기자들은 출입처를 기반으로 정치·행정 정보를 빠르게 확보하고, 권력자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감시한다. 이런 구조 덕분에 권력형 비리나 정책 실패가 신속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밀착 감시’는 ‘밀착 유착’으로 변질될 위험도 안고 있다. 기자가 오히려 권력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언론이 인쇄술의 발달과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쟁취하며 성장했다면, 반면 한국은 먼저 제도화된 언론권과 엘리트 관료들의 강력한 언론 서사를 형성한 뒤 근대적 언론을 수용했다. 조선이 물려준 이 강인한 정신적 유산이 있었기에, 한국 언론은 낯선 서구의 외피를 빌려와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암울했던 독재의 시대를 건너 사회 변혁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은 단순한 왕조가 아니라, 그 정체성 자체가 언론을 통해 구현되는 '언론의 나라'였다. 조선의 언론권은 과거에 사라진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언론을 만든 살아있는 시작점으로서 역사에 새겨져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