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민폐 끼친 조선 출신 명나라 사신

by 김욱


태조 2년 12월 8일, 명나라 사신 김인보가 조선에 도착했다. 실록에는 “중국의 사신 내사 김인보(金仁甫) 등 4인이 좌군 도독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의위를 갖추어 교외에서 맞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인 12월 9일 기사에는 의아한 대목이 등장한다. “김인보 등의 부모에게 쌀·콩 1백 석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사신이 부모를 동행해 왔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김인보는 조선 출신 환관이었고, 그의 부모는 여전히 조선에 살고 있었다. 즉, 어릴 적 명나라로 보내졌던 조선인 환관이 외교 사절로 귀국해, 머무는 동안 고향의 부모를 만나러 간 것이다.


실제로 태조 2년 12월 15일에는 “사신들이 각기 그 본향에 가서 근친하였다”는 기록이, 태조 3년 3월 16일에는 “사신들이 본향으로부터 돌아오니, 임금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 명나라에서 벼슬을 하다 사절로 파견되어 귀국하면, 일정 기간 고향을 방문하는 관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태조 3년 4월 4일 기록에는 명나라가 새로운 환관 송출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말 1만 필과 엄인(閹人) 및 김완귀(金完貴)의 가족을 거느리고 오라 한다”는 명나라 측의 요청이 있었다. 여기서 ‘엄인’은 환관을 뜻한다. 김완귀 역시 이전에 조선에서 명나라로 보내져 환관으로 있던 인물로 보이며, 그의 가족을 불러 함께 살도록 허락한 것이다. 같은 해 5월 20일에는 “엄인 5명을 황제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 귀국 환관들의 행실은 조선에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태조 3년 5월 20일, 조선 출신 사신 진한룡은 술에 취해 “이런 누추한 옷을 입고 황제를 뵙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며 옷을 찢는 등 행패를 부렸다. 사관은 이 사건을 두고, “황제가 사신을 보내되 모두 우리 나라 출신의 엄인을 쓰니… 광패하기가 이와 같아 주군에서 이를 괴롭게 여겼다”고 탄식했다.


그럼에도 환관들의 고향은 행정적으로 승격되는 특혜를 받았다. 태조 3년 4월 9일, 진한룡의 고향 임주가 부로 승격됐고, 2월 15일에는 김인보의 고향 밀양군이 부로 승격됐다. 이는 명나라 조정 내 조선 출신 환관들의 영향력을 방증한다.


명나라에 특히 조선 출신 환관이 많았던 이유가 있다. 중국인 환관은 현지의 가족이나 친척과 결탁하여 정치적 기반을 만들 위험이 있었지만, 외국 출신 환관은 그런 기반이 없어 황제에게 더 충성할 것이라 여겨졌다.


게다가 명 조정에서는 조선 출신 환관에 대해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일 처리가 뛰어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원치 않아도 지속적으로 환관을 송출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어린 소년들이 환관으로 만들어져 중국으로 보내지는 비극이 이어졌다.


조선의 입장에서 환관 송출은 분명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귀국한 환관들이 때로는 고향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고, 이를 접대하는 조정의 부담도 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 출신 환관들은 명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황제와 가까운 위치에서 조선의 사정을 전하고, 때로는 외교 문제 해결을 도왔다. 15세기 조선에서 이들은 명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이자,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필요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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