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성공신화의 허구성

기독교와 이슬람 양 문명권에서 생존한 유일한 집단

by 김욱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배타성을 지닌 종교였다. 이단과 다른 종파에 대한 관용은 제한적이었고, 교리 차이를 이유로 전쟁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 같은 환경에서도 유대인 공동체가 유럽 사회 속에 자리 잡은 건 놀라운 일이다.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을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 전통을 바탕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수와 초기 신자들 모두 유대인이었고, 기독교는 히브리 성경을 ‘구약성경’으로 삼아 자신들의 신학적 정당성을 세웠다. 유대교를 뿌리째 부정하면 기독교 교리 자체가 흔들리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순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인물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유대인을 박멸하기보다, “예수를 거부한 죄로 나라를 잃고 흩어진 채 살아가는 집단”으로 보존하는 것이 오히려 기독교 진리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증인 이론’으로 불리는 이 관점은 유대인을 ‘종속적 생존자’로 남겨두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했고, 유대인은 기독교 세계 속에서 완전한 추방 대신 제한적 생존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7세기 이슬람의 발흥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지도를 또 크게 바꾸었다. 많은 유대인이 이슬람 제국의 통치 아래 편입되었는데, 이슬람 역시 유대교 전통을 계승한 종교였다. 이슬람 법은 유대인을 ‘성서의 백성’으로 규정하며 ‘딤미’라는 신분을 부여했다. 유대인은 지즈야(인두세)를 납부하고 이슬람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생명과 재산, 종교 생활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물론 이 지위는 명백히 차별적이었지만, 토지 소유와 길드 참여가 금지된 기독교 세계보다 경제 활동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세계사에서 드물게 허락된 두 적대 문명에 동시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소수 집단이 되었다. 이 독특한 위치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경제적 네트워크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중세 초,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는 종교적·군사적으로 격렬히 대립했고, 두 진영 간 직접 교역은 위험천만했다. 바로 이 틈에서 양쪽에 공동체를 둔 유대인 상인들이 활약했다. 그들의 존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9세기 기록에 등장하는 ‘라다니트 상인’이다. 이들은 서유럽과 이슬람권, 심지어 중앙아시아와 중국까지 연결하며 향신료, 비단, 모피, 금속 등을 거래했다.


이 네트워크의 핵심은 혈연이나 우연이 아니라, 유대법(할라카)과 신앙을 매개로 한 신뢰 체계였다. 각지의 유대 공동체는 상업 분쟁을 자체 법정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이는 국경을 넘어선 계약 신뢰를 뒷받침했다. 카이로 게니자에서 발견된 수많은 문서들은 유대 상인들이 편지로 시장 정보와 정치 상황을 실시간 공유하며 위험을 관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수프타자’ 같은 환어음 제도는 현금 운송 없이 장거리 결제를 가능케 했다. 오늘날 국제 금융의 기초가 되는 신용과 법의 작동 원리를 이미 당시에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유대 상인 네트워크는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십자군 전쟁으로 지중해가 군사화되면서 교역 환경이 불안정해졌고, 베네치아·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직접 교역로를 개척했다. 유대 상인들의 ‘중개자’로서의 위치는 서서히 축소되었다. 이 변화 속에서 유대 공동체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아야 했다.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은 토지 소유와 길드 가입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교회법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자 취득을 금지했다. 이런 양쪽에 걸친 이중의 제약이 유대인에게 금융업의 문을 열었다. 유대인 대부업자는 신용이 부족한 사회에서 중요한 금융 공급자가 되었다. 왕과 귀족조차 이들에게 의존했다. 물론 이 역할은 종종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돌아왔고, 폭력과 추방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대인 금융가는 상업 도시와 왕실 재정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성장했다.


근대 초기에는 ‘궁정 유대인’이라 불린 인물들이 절대왕정의 재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 사무엘 오펜하이머 같은 인물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며 국제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이 전통은 18~19세기에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이어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주요 도시마다 지점을 두고 국제 금융 네트워크를 확립했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과 이후의 국채 시장에서 막대한 자본을 움직였고, 철도 등 산업혁명기의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에 자금을 공급하며 근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했다.


유대인은 태생적으로 경제 감각이 뛰어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박해와 배제를 겪으면서도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명권에 걸쳐 생존해야 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양쪽에 의미 있는 공동체를 둔 사실상 ‘유일한 이중 문명권 생존 집단’이었다. 그 특수한 위치가 자연스럽게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으로 이어졌고 상호 신뢰를 뒷받침하는 종교적 결속과 법적 장치,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분산 구조가 결합해 다른 집단이 갖기 어려운 강점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회가 모든 유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궁정 유대인이나 로스차일드 가문의 눈부신 성공은 극소수 유대인 엘리트들의 이야기일 뿐, 동시대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게토와 슈테틀(동유럽의 유대인 마을)에서 가난과 차별, 끊임없는 박해의 위협 속에 살았다. 그들의 역사는 소수의 경이로운 성취와 다수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라는 극명한 양면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유대인의 역사는 ‘선택받은 민족’의 신화가 아니라, 경계 위에서 생존한 민족의 역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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