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집단 우대정책 논쟁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 JUSTICE] 9회

by 차미레
“모든 정의는 차별을 내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차별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차별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즉 정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Q1.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차별’을 포함한다고 했을까?

A. 그는 “모든 정의는 차별을 내포한다”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는 것이 정의가 아니다.

각자에게 그 목적에 맞는 몫을 주는 것이 정의다.

예를 들어, 플루트를 나눠줄 때 가장 잘 부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옳다.

정의란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탁월함과 목적의 조화에 관한 문제다.

즉, ‘누구에게 주는가’보다 ‘무엇을 위한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Q2.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한가?

A. 능력주의 사회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을 정의로 본다.

하지만 능력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가정환경, 교육 기회, 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능력주의는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상 운을 실력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제도일 수도 있다.

샌델은 말한다.

“능력주의는 정의처럼 보이지만, 결국 운에 대한 교만을 낳는다.”



Q3.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능력주의에 반하는가?

A. 표면적으로는 ‘능력보다 조건을 본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질문은 달라진다.

“대학 입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만약 대학의 목적이 단지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공동체의 다양성과 사회적 통합이라면,

다양성을 고려한 선발은 오히려 목적에 맞는 정의로운 구별이 된다.



Q4. 우대정책은 역차별일까, 아니면 목적에 맞는 정의일까?

A. 우대정책은 단순히 ‘보상’이 아니라 ‘교정’의 의미를 가진다.

기회가 불균형하게 주어진 사회에서

공동체의 다양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면, 그것은 역차별이 아니라 교정된 정의다.

정의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다르게 대하는 것을 통해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Q5. 그렇다면 정의의 기준은 결국 ‘목적’인가?

A. 맞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물과 제도, 인간의 역할이 지닌 목적에 부합하는 대우를 하는 것”이다.

샌델도 이 전통을 잇는다.

“우리가 나누는 것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그 자원이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적이다.”

능력주의가 정의로워지려면,

그 능력이 공동체의 선(善)을 향해 쓰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Q6. 결국, 정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A. 정의는 단순한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삶의 방향에 대한 논의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정의는 계산의 언어로만 남는다.

우대정책 논쟁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더 점수를 받았는가?”보다

“이 제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정의의 본질을 드러낸다.



[생각해보기]

▪ 나는 능력주의를 정의롭다고 믿는가, 아니면 불완전한 제도라고 보는가?

▪ 내가 속한 공동체의 ‘목적’은 무엇인가?

▪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차별은 ‘불의한 차별’인가, 아니면 ‘목적이 잊힌 구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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