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쉬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한 단어로 박제하는 순간, 그 사람은 설명이 끝나버리고, 내 감정은 더 뜨거워지고, 내 현실은 더 좁아진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전 회사에서 이사와 함께 일했던 시간은, 그 단어가 내 입안에서 자꾸만 굴러다니게 만들었다.
나는 그를 정확히 진단할 수 없다. 나는 의사가 아니고, 그 사람의 유년이나 가정사를 알지도 못한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다.
그와 일하는 방식이, 이상할 정도로 “나”라는 사람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 그리고 그 흔들림은 단순한 싫음이 아니라, 내 자존감과 현실 감각의 균형을 무너뜨릴 만큼 집요했다는 것.
사람들은 보통 나르시즘을 “자기 사랑”쯤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종류의 나르시즘은 사랑이라기보다 통제에 가까웠다.
이사는 늘 “자기”를 중심에 두었다.
그것은 ‘내가 중요해’라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어야 세계가 안정된다’는 강박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어떤 일이든 이렇게 흘렀다.
일이 잘 풀리면: “내가 방향 잡아줬잖아.”
일이 꼬이면: “네가 왜 그렇게 했어?”
일이 애매하면: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신기하게도 그 문장들은 늘 “이사의 안정을 위한 문장”이었다.
그의 세계관 안에서는, 늘 그가 옳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하나의 생물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이 됐다.
그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늘 이사의 얼굴이어야 했고, 나는 그 옆에서 조명 역할을 했다. 조명이 빛나면 빛날수록, 얼굴은 더 선명해지니까.
원래 광고기획은 문제-해결이다.
무엇을 왜 할지 정하고,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그걸 성과로 연결한다.
그런데 그 사람과 일하면, 일이 언제부터인가 정서 관리로 변했다.
“오늘은 기분이 어떤가?”
“어떤 말을 하면 기분이 상할까?”
“어디까지 말하면 폭발할까?”
“이 문장을 어떻게 돌려 말해야 자존심이 안 상할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전략보다 문장을 먼저 설계했다.
캠페인 메시지보다 더 복잡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옳습니다. 당신이 중요합니다. 당신의 체면이 지켜질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매 순간 심어줘야 일이 흘러갔다.
그렇지 않으면 회의는 돌연 멈췄다. 방향이 바뀌거나, 말이 바뀌거나, 책임이 바뀌었다.
나는 점점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를 안심시키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게 제일 위험했다.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기분이 내 성과를 결정하기 시작했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그는 항상 막말을 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말이 그럴듯했다.
그럴듯한 말은 현실을 바꾼다.
특히 상대가 지쳐 있을 때.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요즘 너 상태가 좀 이상한 거 알아?”
“회사라는 게 다 그런 거야.”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이 말들은 칼이 아니라 솜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솜은 입을 막는다.
소리를 못 내게 한다. 그래서 더 오래 질식시킨다.
나는 어떤 순간에는 그 말을 믿었다.
그가 틀리다는 증거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증거는 많았다.
그런데 지친 사람에게는 증거보다 분위기가 더 세다.
나는 그 분위기 안에서 점점 내가 작아지는 걸 느꼈다.
‘내가 예민한가?’
‘내가 부족한가?’
‘내가 사회성이 없는가?’
기획자에게 제일 치명적인 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제일 말하기 싫은 부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를 욕하면서도 가끔 나를 의심했다.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 사람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일까?
나도 인정 욕구가 있다.
나도 내 기획이 맞다고 믿고 싶다.
나도 “내가 옳다”는 감각으로 살아남아온 순간이 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더 잘하는데 왜 저 사람이 평가하지?”
“내가 이 판을 살리는데 왜 나는 인정받지 못하지?”
“왜 그들은 내 가치를 모르지?”
이 생각이 반복되면, 나도 모르게 사람이 날카로워진다.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상대를 이기고 싶어진다.
그럴 때의 나는 ‘기획자’가 아니라 ‘증명하려는 인간’이 된다.
증명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없다.
증명은 늘 다음 증거를 요구한다.
증명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인정 욕구를 악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인정 욕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만드는 순간이다.
5. 나르시즘의 반대말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 인식’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르시즘의 반대말로 겸손을 떠올린다.
하지만 겸손은 때때로 또 다른 가면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반대말은 오히려 이것이다.
자기 인식.
나는 나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그 욕구가 사람을 해치기 전에 방향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다”라는 욕구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욕구가 “인정받기 위해 누군가를 깎아내려야 한다”로 변질될 때다.
내가 불안할 때,
내가 작아질 때,
내가 평가받을 때,
내가 통제하고 싶어질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떠나면서 깨달았다.
내가 그 사람에게 휘둘린 이유는, 내가 약해서만이 아니라
그 구조가 사람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그를 미워할 수도 있고,
그를 진단할 수도 있고,
그를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건
그 경험이 나를 망가뜨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데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
나는 기획자다.
기획자는 문제를 발견하고, 구조를 만들고, 선택지를 만들고, 실행을 설계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람도 “문제-해결”로 바라보려 한다.
누구를 고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나르시즘이라는 단어를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쓴다.
그 단어는 너무 쉽고, 너무 강력하고, 너무 파괴적이니까.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먹는다.
나는 이제 두 번째를 그만하고 싶다.
오늘도,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