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시간에 비해 즐길 수 있는 시간의 비율이 가장 인색한 게임 중에 '도미노'가 있습니다. 세우는 건 하루 종일이지만 넘어뜨리는 건 한순간이거든요. 그래서, 도미노를 세워 나갈 때는 중간중간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중간에 도미노 하나가 넘어지더라도 나머지 모든 도미노가 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낭비 같아 보이는 빈 공간이 전체 도미노의 안정성을 확보해 주는 겁니다.
미래를 그리는 영화에서는 항상 마천루가 등장합니다. 유토피아를 그렸건 디스토피아를 그렸건 까마득히 높은 건물이 등장하지 않는 미래 영화를 본 기억이 아직 제게는 없습니다.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혹성탈출(찰톤 헤스턴이 주연으로 나왔던 1969년 작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원제목은 Planet of The Apes입니다.)'의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저에게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쓰러져 반쯤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저는 도시의 높은 건물을 볼 때마다 도미노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최고라는 높이의 건물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사실이 자랑이 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여전히 제게는 높은 건물은 '동경'과 '자랑'의 대상이라기보다, '위험'해 보이고 피하고 싶은 대상에 가깝습니다. 높아질수록 무섭더라구요, 저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어색하지 않을만큼 대한민국은 아파트가 많습니다. 절대적으로도 많거니와 상대적으로도 많습니다. 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이렇게나 압도적으로 많은 아파트가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는 예는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산악이 많은 환경 때문에 거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과합니다. 효율성을 위해 높게만 올라가는 아파트 때문에 혹시 우리가 포기하는 것들은 없을까요? 보이지 않는 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도시공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습니다만, 오늘 소개할 리처드 세넷의 <짓기와 거주하기>는 그 질문에 대해 현명한 대답과 조언을 제공해 줍니다.
<짓기와 거주하기>는 리처드 세넷의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의 마지막 완결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세넷은 <장인>과 <투게더>를 발간했습니다. <장인>에서는 기술이 대접받지 못하고 있음을 설파하고, 장인이 가진 머리와 손의 관계를 연구했고, <투게더>에서는 사회적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왔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프로젝트 완결판인 <짓기와 거주하기>는 분리와 차별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 도시에서 함께 살기 위한 제언과 안내를 싣고 있습니다.
구체적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을 만드는 인간, 이것이 바로 세넷이 명명한 '호모 파베르'이고, 3권의 책을 통해 인간이 개인적 노력 - 사회적 관계 -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설명해 온 것입니다.
저는 아파트가 생겨난 뒤로 제대로 된 지역 공동체의 삶을 누려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까마득히 높이 올라간 주상복합 건물을 보면, 오지랖 넓게도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어 갈까? 라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본 몇 안되는 그 곳에 사시는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공동체를 고민의 주제로조차 생각하진 않으시더군요. 그 분들의 고민거리 순위에 '공동체 형성'이라는 주제는 찾기 어려웠으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고정관념과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기를 바랍니다.)
도시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에서 주거의 문제가한 번이라도 '돈'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였던 적이 있었을까요?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용적률이 어떻고 재개발이 어떻고 하는 구호가 난무합니다. 강남과 강북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라는 것이, 결국 강북에도 '명품' 아파트를 만들겠다는 수준에 머무릅니다. 상상력이 빈약해도 너무 빈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노회찬 의원이 말씀하셨던 '루이비통' 매장을 강북에 가져다 놓으면 강북이 강남이 되느냐던 수년 전 TV 토론회의 질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맥락이 주는 현실적 제약과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모여 갖게 되는 반상회와 아파트 주민 대표회의로 대변되는 공동체의 관심은 아파트 가격 상승과 좋은 학군, 안전한 환경입니다. 그것이 '좋은' 아파트의 조건이거든요. 세넷이 이 책을 여는데 사용했던 '뒤틀린, 열린, 소박한'이라는 단어를 '좋은'과 연결시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세넷은 사회적 퇴보의 대표적인 결과 중 하나로 '빗장 공동체(Gated Community, 출입구가 있고 차량과 보행자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주택단지로, 주로 중상층 이상이 거주합니다)'를 꼽습니다. 세넷은 공동체라고 명명했지만, 저는 단지 같은 위도와 경도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체라 명명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사는 것과 지어진 것 사이의 균열, 세넷의 표현을 빌자면 '빌ville과 시테cite의 이혼'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윤리를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러합니다. 큰 것을 뜻하는 '빌'은 전체 도시를 의미하고, 특정한 장소, 작은 지역사회를 가리키는 '시테'는 지금은 오히려 동네 한 곳에서 영위되는 삶의 성격, 이웃과 낯선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품게 되는 감정, 장소에 대한 애착 등의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세넷의 주장에 따르자면 '19세기의 도시 제작자들은 사는 것the lived과 지어진 것the built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20세기에는 시테와 빌이 서로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도시 만들기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 도시는 내적으로 빗장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리적 공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삽니다. 그 곳에서 삶을 지어가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건설해가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거주의 모습을 한 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이방인, 형제, 이웃 중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주변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은 기피인가 비교인가 섞기인가? 어떻게 하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에게 열린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