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이 무서운 법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가시고 겨울이 왔다.
언제나 올까 기다렸던 연말은 언제나 부지런히 꼬박 제자리를 찾아온다.
붉은 옷의 구세군의 따스한 종소리.
길에서 풍겨 나는 달큰한 호떡 냄새.
차갑지만 상쾌한 찬공기에 아려오는 손끝과 코끝.
이렇게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어릴 적 나는 회사원이 꿈이었던 적은 없었다.
화가, 패션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 큐레이터.
제과사나 제빵사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어릴 적 꿈과는 상관없이 제과사가 되었고 회사원이 되었다.
제과 학교를 다닐 때는 가게가 하고 싶었고, 가게를 운영할 때는 직장에 들어가고 싶었다.
돌고 돌아 남의 밑에 들어가 드디어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는 사무직이 하고 싶었고 사무직이 되고 난 다음에는 대기업에 들어가 번듯한 사무직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결국 난다 긴다 하는 대기업에 들어와 사무직을 한 자리 꿰차고 나니 그 안에서도 또 다른 갈증이 생긴다.
이렇게 주르륵 적어놓고 보니 그럴싸한 삶이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아 원하는 방향으로 내 삶을 잘 운전해 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도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불안한 인간일 뿐이다.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집에 내가 가득 채워놓은 추억들은 5분도 채 안되어 버려질 거야."
그래, 맞다.
엄마가 가득가득 채워놓은 물건들이 때로는 갑갑했고 짐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으나 나는 그것들이 그녀의 추억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엄마가 어릴 적, 젊었을 적에 겪었을 갈증은 알 턱이 없었고
오늘날 나에게 주어진 편안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엄마가 말했듯 내 존재는 5분도 안 되어 세상에서 지워질 텐데 나는 뭐가 그렇게 전전긍긍 불안하고 초조하고 못마땅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하루를 아주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도 눈감는 날 아쉬움으로 가득 찰 것을.
이렇게나 계절은 빠르게 지나가고 그 겨울이 지나고 나면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매일매일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는데.
익숙함이 무서운 법이다.
익숙함 속에서 잊혀지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내게 주어진 것들의 감사함이 애틋하다.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고 오늘을 잘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지 말고 사랑한다 말해야지.
듣기 싫은 잔소리도, 지루한 사무실도, 차디찬 겨울바람도.
이마저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