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도 배워가는 중입니다.
20대의 나는 벚꽃이 흩날리는 대학 캠퍼스를 걸으며 다짐했다. 내 이름 석 자가 누구나 아는 이름이 될 거라고. 내 앞에 펼쳐질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며 당당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 시절, 나는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내 손에는 밥주걱이 들려 있고 한쪽 다리에는 찡얼거리는 둘째가 매달려 있다. 첫째와 막내는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싸우고 있다. 축 늘어진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를 입고 거울을 바라보니, 그곳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 셋의 엄마가 서 있다.
서른다섯,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내가 꿈꾸던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25살에 결혼을 선택했고,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새 아이 셋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매일 나를 붙잡고 있다. 이 길을 선택한 건 분명 나지만, 가끔은 그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슈퍼우먼일지 몰라도, 사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잘 모르는 서른다섯의 어른일 뿐이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가 내 머릿속을 맴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청춘이 영원할 줄 알았던 10대 때는 어른이 되면 멋진 삶을 살 줄 알았다. 안정적인 직업, 내 집, 멋진 차, 완벽한 옷차림. 그리고 20대가 되자 안정감 있는 삶을 상상하며 그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서른이 되고 보니, 내 청춘은 어느새 비워지고 있고, 통장도, 마음도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이루었을까?
그럼에도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매일 배우고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그 말처럼,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 아이들은 내 행동을 흡수하고, 그대로 따라 하며 성장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할 때는 별 생각이 없지만,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면 '아, 내가 저런 적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며 과거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아이들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사과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해, 10번 중 5번은 고개를 저어야 할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매일 아이들과 씨름하며 그들로부터 배우는 게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결국, 서른다섯의 나는 여전히 배우고 나아가며 성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한 가지는, 성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취나 결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작은 순간 속에서 배우고, 그 순간들이 모여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어느 날, 햇살이 좋은 오후에 둘째랑 길을 같이 걸어가는데 갑작스레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였다.
“엄마, 나는 커서 엄마처럼 되고 싶어.”
순간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이 아이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까? 평소 나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며, 매일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왜 엄마처럼 되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둘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엄마는 항상 나를 사랑해 주잖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지켜주려고 해.”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 깊이 울컥했다. 내가 수없이 많은 실수와 좌절을 겪으며 아이들을 키웠지만, 그들은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노력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장은 어쩌면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지도 몰라."
내 삶은 예전처럼 화려한 성공이나 이름을 떨치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 대신 내 안에는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힘이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상상했던 어른의 모습은 아니어도, 나는 이 안에서 나 나름대로 꾸준히 성장해 가며 자라고 있는 것이다.
요즘 들어, 아이들이 방에서 따로 자는 게 무섭다며 내 옆으로 하나둘 모여들 때가 있다.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데, 왜 무서운 거야?" 내가 물으면,
"그래도 무서워."
"맞아, 무서워."
"맞아 우리는 엄마랑 함께 있어야 해"
셋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내 옆에 조잘조잘 잘만 떠드는 걸 보면 무서운 것 같지 않은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 모여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엄마를 찾는구나를 생각하며 문득 깨닫게 된다. 나 역시도 여전히 두렵고 불안한 순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가족에게만큼은 든든한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나 또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서른다섯, 내 인생은 여전히 중간 지점에 있다. 나는 이 여정이 완벽하거나 대단한 성공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도 함께 자란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 길을 걸어간다는 것. 나의 서른다섯은 그렇게, 오늘도 배우고 성장하며, 내일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