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문이 당신을 삼키면, 우리는 꼭 다시 태어난 듯 살았습니다.
파도치는 섬과 그 속의 바다. 그것들은 저를 좋아했을지도 모릅니다. 푸른 바다와 가까워지면 들리던 웃음 찬 목소리가 좋았을지도, 아니면 죽어간 파도와 닿은 제 손의 온도가 따스했을지도, 모래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이 좋았을지도, 그중 무엇이 더 좋았는지 물을 수는 없겠지만 간혹 몰려올 행복이 이 방에 있습니다. 수많은 나비와 꾸역꾸역 모아 온 흰 가구들을 모두 남긴대도, 행복은 꿋꿋이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며 속삭이겠죠. 그날은 그만 잊고 날아가라고. 저 멀리 날아 자유로워 달라고. 그러면 수많은 행복이 밖에서 저를 기다릴 거라며 밝게 웃을 겁니다.
구급차에 실린 당신이 오늘따라 더욱 차가워 보입니다. 저 멀리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반가워 흐느낀 손 위로 넘겨받은 태블릿엔 당신의 과거가 또렷이 적히고, 매번 적어냈던 병명은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어색함과 함께 도로를 달리는 사이렌 소리가 수없이 귀를 때리고 당신의 숨이 가빠집니다. 그래도 이 소리엔 생명을 향한 의지가 담겼고, 우리는 그 소리에 뒤엉킨 것이니 이번에도 괜찮을 겁니다. 언제나 당신은 살아냈고 끝없던 여러 날의 과거로 다시금 괜찮아졌던 오늘이 지금껏 이어져 왔습니다. 어쩌면 이 공간에 삼켜져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 우리를 지켜줄지도 모르고, 내일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흰 문에 덥석 삼켜지고 나면 당신은 꼭 다시 태어난 듯 살아서, 그래서 잠시 시간이든 신이든 모든 무형의 것에게 빌었습니다. 오늘도 이겨낼 수 있다 말해달라고, 세상이 무척 버겁다고.
그 소원이 우스웠는지 당신은 아침이 될 때까지 웃지 못했습니다. 늘어진 몸과 그 옆을 지나는 간호사의 얼굴에서 당신을 발견하던 수많은 제가 보였습니다. 이번이 몇 번째였는지는 기억에서 잊었습니다. 아, 부러 지웠습니다. 그 병명을 기억하기엔 이젠 버겁기도 하고 혹시라도 당신이 날 따라 그 병을 잊어주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물론 그런 적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이번엔 이 순간도 외면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눈을 뜬 당신이 볼 낯빛이 조금이라도 밝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외면한 순간에게서 제가 사랑하는 것을 순식간에 다시 돌려받을지도 모르죠. 그래요. 이 빌어먹을 순간에게서 당신을 받아내야겠습니다. 그러면, 그러고 나면 수줍은 인기척이 들릴 겁니다. 뒤이어 돌아볼 병상엔 조금 흐릿한 눈과 씁쓸한 표정이 절 반길 테고, 몇 번째인지 모를 어설픈 탄생을 축하하며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저희 오늘 페인트칠을 좀 할까요? 방문을 하얗게 칠하는 거 어때요?”
몇 번의 사건 이후로 흰 것들이 집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흰 서랍장, 흰 장롱, 흰 침대, 흰 수건과 같은 하얗고 하얀 것들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체리색 방문이 거슬렸습니다. 하필이면 방과 출입문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매번 손톱 밑 거스러미처럼 뜯어내고 싶었습니다.
“음... 그러면 집주인과 상의해야 할 텐데요. 우리 계약 조건 기억하죠? 인테리어 금지.”
“음... 혼자 80년대 같기도 해서...”
"체리색 인테리어는 2000년대 유행하던 거라, 의외로 최근 인테리어에 가까워요. 그리고 좀 특색 있지 않아요? 나는 그런데."
던져본 제안은 집주인과의 약속으로 바스러지고 그 잔해는 고쳐진 얕은 지식으로 더욱 지저분해집니다. 그저 옛날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였다며 볼을 부풀리자, 당신이 허둥지둥 다른 말을 내뱉습니다. 차라리 저 문에 큰 도화지를 붙이고 그림 같은 것도 그려보면 어떠냐는 정말 엉뚱한 이야기. 그러더니 제 눈치를 보며 아파트 바자회에서 얻어온 24색 크레파스를 꺼내놓습니다. 그건 또 언제 기억한 걸까요? 엉성한 모습에 상처받은 마음도 잊고 한껏 웃습니다. 또 바보같이 그 웃음을 동의라고 생각한 건지 함께 웃는 당신은 참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그리하기로 했습니다. 이왕 유치해진 김에 그림 위에 나비를 붙여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표본 만들기에 빠진 당신이 30분이나 걸리는 들판을 잠자리채로 휘저으며 잡아 온 그 나비들 말입니다.
“그럼 도화지 위에 그 나비들 좀 붙일까요?”
“그러면 문을 못 열 텐데요? 숨만 닿아도 부스러질 텐데... 그걸 또 언제 다 치우고...”
"그럼 치우면 되죠? 싹 빗자루로 깔끔하게 쓸어줄 테니까 안심해요."
"아니, 제가 열심히 표본으로 만든 건데..."
꽉 쥔 주먹을 본 당신이 이제야 아까의 복수라는 걸 알았나 봅니다.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곤 6마리의 나비가 박힌 액자를 가져오기에 그 아래의 상자를 가리켰습니다.
"그건 당연히 안되죠! 당신 첫 성공작 말고, 저거! 망한 것들이요!"
상자 속 수없이 실패한 표본을 가리키자, 자신의 첫 성공작을 가슴에 품곤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우선 도화지를 사 오겠다며 밖을 나섰습니다. 요즘은 예전만큼 문구점이 많이 없어 조금 걸어 나가야 했고, 뭐 날도 조금 더웠지만 몽실한 구름이 채운 새파란 하늘 아래를 걷는 걸음이 가벼웠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신이 났던 모양새가 우스워 보일까 짐짓 점잖은 걸음으로 되돌아온 집이 선명히 빛납니다. 아마 절 반기는 당신 덕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도화지엔 푸른 바다가 차올랐습니다. 푸르름 위에 검은 배를 암흑으로 수놓고 사이사이를 흰 파도로 채운 해변의 모래사장 뒤엔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납니다. 도화지 위의 색들로 엉망이 된 옷과 그 엉망으로부터 완성된 그림이 우리의 웃음과 닮았습니다. 상자 속에서 골라낸 열댓 마리의 배추흰나비가 별을 대신하고, 마지막 나비를 붙이며 이 날개에 희망이 담겨 언젠가 날아오길 당신 몰래 조용히 소원합니다.
어지럽힌 방바닥 위에 검은 밤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한 다음 날, 나비들은 문이 여닫힐 때마다 바스러졌습니다. 결국 완벽히 조각난 나비들을 아쉽게 쓸어냅니다. 며칠간은 구석구석에서 바스러진 날개들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다음 날과 다음날이 수없이 지나도 당신이 눈앞에 완벽히 살아 숨 쉽니다. 그래서 하루 사이 바스러진 즐거움은 슬프지 않았습니다. 정말 나비들이 희망을 가지러 사라진 걸지도 모르고, 당신이 그날의 행복에 삼켜져 살아있는 것만 같아 마냥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