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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Feb 27. 2023

삼둥이의 한글 정복기 Ⅲ

삼둥이 : 2016년생, 첫째(남아), 둘째(남아), 막내(여아)     


<첫째-오오, 그 시작은 미미, 미비, 미치겠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첫째는 처음 시작할 때, 셋 중 유일하게 의욕을 보인 아이였다. 그리고 기본 성격이 성실하고, 모범생 스타일의 아이라 기대가 컸다. 공부하자 그러면 유일하게 하겠다는 아이여서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세상에나 너무 못 하는 거였다. 의욕 있게 기역, 니은, 디귿을 가르치면, 다음 날 언제나 맑은 얼굴로 어제 배운 것들을 초면인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이 공부 초반에는 어렵지 않게 지나가는 부분을 얘는 항상 초면인 얼굴로 보는 것이다.      


  삼둥이는 서로가 기준이고, 잣대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사실 첫째가 삼둥이가 아니라 외동이었으면, 나는 첫째가 매번 배울 때마다 잘 몰라 하는 걸 답답해하지 않았을 성도 싶다. 늘 비교할 대상이 곁에 있다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첫째는 가르친 걸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전혀 숙지하지 못 했다. 이 애가 성실하지 않아서 허투루 배우고 있는 거였으면 맘이 편했을 거 같았다. 둘째나 셋째처럼 좀 설렁설렁, 맘 편하게 배우고 있는 거였으면 좋았을 거 같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진지하다, 성실하다. 그런데 못 한다. 나의 뜨거운 눈물.      


  그런 양상은 한 달 내내 지속됐다. 전날 가르친 걸 백프로 까먹어서 다시 가르치고, 또 모르고, 근데 얘는 진지하고. 오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갑자기 둘째, 막내를 치고 올라오는 거였다. 정차된 차 안에서 창밖을 보면서 간판을 읽기 시작하고, 집 안에 있는 글씨들을 뜨문뜨문 읽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처음 한 달은 가장 미미한 성취였지만, 그 이후 현재까지 가장 뚜렷한 성취를 보이고 있다.     


  일단 엄마가 파악한 삼둥이는 셋 다 눈에 띄게 머리가 좋은 아이들도 그렇다고 머리가 나쁘다 싶은 아이도 없다. 이런 상태의 아이들이라면, 그러니까 수재, 천재 수준이 아닌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결국은 공부에 관심이 있고, 열심히 하는 애가 성취를 보인다. 이 평범한 깨달음을 첫째를 보고 알았다.      


  첫째는 항상 둘째, 막내에 비해 강렬한 한 방이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자지러지게 어른들을 놀라게도, 쓰러지게 웃어 넘기게 하는 아이도 아니다. 하지만 난 늘 첫째의 저런 바름과 성실함이 기특하고 아름다운 품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른들이 오래 봐주고, 자세히 봐줘야 하는 향기로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그는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지….>

  아아, 둘째, 부르다가 내가 죽을 우리 둘째여. 그 아이는 그저 자유인이다. 아무도 억압하지 않았음에도 자유를 부르짖는 그. 어린이집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둘째는 교육적인 게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 엄마인 나도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애초에 한글 교육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상대라고 예상은 했었다.     


  빗나간 예상이길 바랬지 나는. 하지만 왜 슬픔 예감은 틀린적이 없나.      


  처음 며칠 간은 엉겁결에 공부를 했지만, 그 이후는 정말 형이랑 동생이 하니까 할 수 없이 하는 중이다. 한글을 배워가는 속도도 정말 느리고, 본인도 억지 춘향으로 앉아 있어서 힘들 것이다. 글자를 쓰는 속도가 너무나 느려, 정말 미안하게도 엄마인 나도 둘째를 가르치면서 힘겹다, 가르치기 싫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느린 속도라 시간이 지나면서 형과 동생과 진도의 차이가 많이 났다. 첫째와 막내가 5과정을 배우면 4과정을 배우는 정도. 근데 공부하고 있는 교재가 4과정이지 실제 수준은 또 2, 3과정 정도로 더 낮았다.     


  그런데 한글 교육이 진행되고 한글 실력이 올라오면서 첫째와 막내가 주변의 글씨들의 세계에서 입을 떼는데, 둘째는 전혀 입을 떼지 않았다. 정차된 차에서 첫째가 표지판을 읊어대거나, 막내가 책을 펴고 읽을 때 둘째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형이랑 동생에 비해 수준은 낮지만 전혀 못 읽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느 날 내가 둘째가 좋아하는 공룡책을 읽어주며 공룡 이름을 읽어보라고 했다. 둘째는 천천히 ‘트으…리…케라…토스’라고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중 첫째가 왔다. 다음 장의 공룡 이름을 가르키며 둘째에게 읽어보라는 눈짓을 하자 둘째는 입을 꾹 다물고 읽지 않았다. 아아, 그렇구나. 둘째는 자기보다 글씨를 빠르게, 잘 읽는 다른 형제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거구나. 형 앞에서 잘 못 읽는 모습을 보이고, 자기가 천천히 읽는 동안 형이 휙 읽어버리는 게 싫은 거구나! 자신이 형이나 동생보다 한글을 잘 못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거구나!     

  둘째는 유순한 첫째, 막내에 비해 좀 세고 과격한 편이다. 놀이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어야 직성에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런 천하의 둘째가 한글이 늦어 자존심을 상해 하다니.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그애에게 한글을 읽어보라고 시키지 않았다.     


  나중에 친구에게 사정을 말하며 둘째가 좀 안쓰럽다고 하자 친구가 말했다. 자존심 상해 하니까 얼마나 다행이냐고. 만약 형이나 동생이 책을 잘 읽고, 한글을 잘 하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 그건 더 문제 아니겠냐고.      


  둘째의 한글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 중이다. 이제 받침 있는 걸 겨우 읽는 정도다. 10개월을 넘게 가르쳤는데 여전히 초심자같은 느낌이다.      


  어린이집 받아쓰기에서 선생님은 틀린 답에 X 표시를 하시지 않고 ♡를 그려주신다. 그 애의 공책은 하트로 가득 차 있다. 사랑받는 우리 둘째.


<막내-감성있는 어린이의 한글 배우기>

  우리 막내를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그녀는 이 시대의 음유시인, 등록기준지는 토끼우주, 과거는 여타 여아들이 많이 간 길인 공주의 길, 그 시절을 이제 막 끝낸 그녀. 그냥 감성이 많이 있는 아이이다.     


  막내는 지금 보다 더 어릴 때부터 손을 쓰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낙서하고, 그림 그리고. 첫째도 로봇 조립을 하는 등 손 쓰는 걸 좋아하긴 했는데, 막내는 연필이나 색연필을 가지고 종이에 뭘 그리는 손 쓰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한글 배우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 보다 좀 빠르다고 하던데, 삼둥이의 경우 여아인 막내가 아주 쬐끔 빠른 편이었다. 근데 오래 보면 첫째, 둘째에 비해 딱히 머리를 쓰는 게 빠른 걸로 보이진 않았다. 아아, 가르칠수록 셋 중에 치고 나와 월등한 성취를 보이는 아이는 끝까지 없더라. 막내의 경우 손가락의 힘이 오빠들에 비해 좋은데 그것이 공부할 때 진도를 빼는 데 아주 유리했다. 손가락 힘이 좋아 글씨를 빨리빨리 써서 진도가 잘 나가는 것이었다. 특히 둘째의 경우 글씨 쓰는 속도가 세월아 네월아여서 도를 닦는 심정으로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데, 막내는 휘리릭 써서 그나마 진도가 나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막내의 감성, 그것이 에피소드들을 만들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예를 들면 교재에 그림 속에 큰 가방이 있고, 여러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ㄱ이 들어있는 단어를 피크닉 바구니 속에 넣어라라는 질문이라면 바구니, 강아지, 고양이 등의 단어들을 가방에 넣는 것이다. 근데 막내는 바구니는 가방에 넣지만 강아지, 고양이는 바구니에 넣지 못 한다. 아흑, 강아지, 고양이 숨 못 쉰다고 가방에 넣으면 안 된단다. 아, 이 오답 같지만 진리같은 대답이여.      


  그리고 그림과 연관된 단어를 이으세요라는 질문에, 어떤 아이가 체온계를 물고, 물수건을 머리에 얹고 있는 그림과 ‘병’이라는 단어를 잇는 것이 답이다. 그러나 막내는 그것도 잇지 못 한다. 아빠 이름에 ‘병’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데, 아빠는 아프면 안 되기 때문에 답을 맞추기 싫다는 것이다. 아아, 이 (아빠 한정) 효녀의 마음.      


  그녀는 현재 읽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나, 자기가 읽은 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수준이고, 받침 없는 것과 쉬운 받침이 있는 것을 받아 쓸 수준이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삼둥이의 한글 정복기는 정복하지 못 하고 실패했다는 말이다. 정복이 뭡니까? 한글 나라에 겨우 이사 가서 거기 통치자의 눈치나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상에나 한글을 정복한다니요. 나 지금 43세인데도 정복 못 했는디요. 애초에 한글이 정복의 대상인가요? 라고 눈을 똥그랗게 뜨며 셀프 위안해 본다.

  어쨌든 그들 삼둥이 무리는 이제 다음 달이면 학교로 간다. 자기들에게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우당탕탕 뛰어다닐 그들의 모습이 기대되면서 피곤하다. 오기를 기다리는, 하지만 맘 속에서는 오지 않길 기다리는 올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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