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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12. 2023

모두의 긴긴밤

소설 루리의 <긴긴밤>을 읽고

앙가부가 노든에게

  노든, 너에게 기분 좋은 얘기를 하다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사실은 말이야, 노든. 내가 늘 무서운 꿈을 꾸었기 때문에 그걸 알게 된 거야. 그리고 또 너에게 그렇게 말한 건 너의 얘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야.

  이 곳 파라다이스에서 태어났고 자랐음에도 나는 늘 밖을 그리워하는, 밖에서 무서운 일을 당하는 꿈을 꿨어. 그 꿈은 서늘하고 슬펐어. 그러다 한없이 마음을 다친 노든, 네가 내 곁에 왔지.

 있지. 네가 초원을 내달리는 이야기를 하면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을 정도로 좋았어. 너 알고 있지? 나는 내가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거. 가로막힌 곳이 없이 달리는 기분이라. 그건 정말 어떨까? 늘 느릿느릿 걷는 데만 익숙한 내가 달리기라는 걸 할 수 있을까. 다리의 근육이 팽팽히 당기고, 숨이 차고, 폐 속으로 공기가 모자라 헉헉대는 느낌.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숨을 거두며 노든, 나는 생각해. 노든, 나는 결국 뛰지 못 하고 죽네. 내 다리는 한 번도 달려보지 못 하네. 너와 저 철망을 넘어 뛰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숨을 거두는 것이 나의 몫의 삶인가봐.

  그래도 노든, 기억해. 너와의 긴긴밤을. 수없이 들었던 너의 이야기를. 네가 초원에서 보았던 별들의 빛을 기억해. 혈육을 가져봤던 너의 뜨거운 마음을. 늘 후회로 가득했던 너의 마음을 기억해. 

  내가 너의 또다른 후회가 될까. 노든, 미안하지만 그 사실이 너무 기뻐. 내가 너의 후회가 되고 기억이 되고 아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미안하지만 기뻐. 나는 생애 누구에게도 그러지 못 했거든.

  나는 너와의 긴긴밤을 생각하며 마지막 눈을 감아. 눈을 감고 내가 가는 세상에서 나는 초원을 달려. 아, 다리가 아파 몸살이 나도록 나는 뛰고, 뛰고, 또 뛸 거야.

  노든, 있잖아. 네가 나의 저 파라다이스 철망 밖이고, 네가 나의 초원이야. 나에 대한 후회는 아주 조금만 하고, 다시 저 초원을 달려줄래?     


윔보가 치쿠에게

  검은 반점이 있는 불길한 알이 온기가 사라져갈 즈음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아주 당연히 그 알을 품었지. 불길한 알이라, 치쿠, 그것만큼 우리랑 어울리는 녀석이 어디 있겠어.

  우리는 불길한 녀석들이잖아. 너는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이는 불길한 녀석,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수컷 두 마리지. 아, 우리는 그래도 생애 내내 얼마나 웃었니. 우리는 천하태평 펭귄 두 마리였지. 그 불길한 녀석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치쿠, 그래도 그 녀석이 우리에게 굴러와 우리가 그 녀석을 품던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네가 우리의 알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 모습이 사실은 얼마나 좋았는지. 그리고 내가 걱정을 늘어놓았을 때 네가 안심시켜 주던 모습은 또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 알이 부화해 수영을 알려주고, 외롭지 않게 우리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것이 내 맘 속 얼마나 큰 소원이었는지.

  내 몸에 철봉이 떨어지고,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제 그 소원은 이룰 수 없게 됐네. 치쿠, 나는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 쉬어. 알이 든 양동이를 든 너의 발걸음이 위태로워 보여.

  치쿠, 나의 친구, 나의 연인. 너의 오른쪽에 서서 걸을 때가 나에게는 언제나 가장 큰 기쁨이었어. 이제 우리의 불길한 알을 가지고 저 너머 있다는 바다로 가줘. 네가 없었다면 나의 밤은 서늘했을 거야. 너의 온기로 나의 긴긴밤은 행복했어. 우리의 알에게 또다른 아빠인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기억해주길.       


노든이 펭귄에게

  코끼리 고아원에서 헤어질 때 코끼리들은 말했어. “우리를 잊지 마.”, “때가 되면 또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들을 사랑했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니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내가 너에게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알았어. 내가 코끼리들과 다시 만난다는 의미를. 그들은 나에게 헤어지면서 말했거든.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느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그래.” 나는 이제 예전의 코끼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생명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던 거야. 그런 방식으로 코끼리들과 만나는 거였지.

  나의 알, 나의 아기, 나의 유일한 친구. 나는 세상에 혼자 남은 흰바위코뿔소야. 그 외로움은 어찌나 마음 속속이, 몸 켜켜이 젖어 들었는지 나는 숨을 내쉴 때마다 외롭고 또 외로웠어. 긴긴밤 나는 다시 눈 뜨지 않길, 와르르 세상이 무너지길 바랐단다.

  기억해줄래? 네가 기억해 준다면 모든 사라진 존재들은 기억 속에서 살 수 있단다. 너무 소중해서 말을 아꼈던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나의 아내를 기억해줘. 진흙구덩이에서 웃던 나의 딸을 기억해줘. 성난 내 마음을 다독여준 앙가부를 기억해줘. 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구했다는 윔보를 기억해줘.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라며 나를 놀리던 치쿠를 잊지마. 그리고 나를 생각해줘. 

  나의 긴긴밤은 어땠을까. 그 긴긴밤은 외로움의 밤, 상실의 밤, 그리고 내가 세상에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일지언정 세상에 하나 남은 존재는 아님을 알게 해준 우리의 밤, 함께 많은 말을 나눈 밤, 하늘 위에 별이 아름다웠던 밤, 대개는 많이 춥고 쓸쓸했던 밤, 그러나 결국 우리 함께 살아남은 긴긴밤.  

  너는 나에게 목숨을 빚진 게 아니라 사실은 네가 날 살렸다는 것을 나는 반짝이는 별을 보고서야 깨닫는다. 나는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 속에서도 너를 단번에 찾을 수 있으니 우리 다시 만날 거야. 그럴 거야.  

  너의 바다에서, 너의 꿈을 꾸며, 너의 삶을 살렴. 너의 긴긴밤을 살아내렴.      


펭귄이 노든에게

  노든, 나는 왜 이름이 없을까요? 그건 항상 궁금했던 일이에요. 노든은 왜 나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금 푸른 바다를 헤엄치며 알게 됐어요. 이 바다에 있는 생명들은 모두 이름이 없군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파라다이스 같이 인간들이 우리를 볼 수 있는 곳에서나 필요한 것이군요. 우리는 그저 한 번의 냄새, 걸음걸이,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 이름은 필요 없군요. 

  그리고 노든에게는 오로지 나밖에 없었으니,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 지을 이름은 필요 없었군요. 그리고, 또 그리고 나는 나를 있게 한 모두군요. 내 이름은 윔보이면서 치쿠이고 앙가부이며, 그리고 노든이군요. 내 이름은 그 모두들이군요. 내 안엔 그들이 있으니까요.

  나는 많은 아빠들, 그리고 그 아빠를 키워낸 누군가에게서 온 존재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이 바다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구요. 

  노든, 나는 아직도 기억해요. 알이 깨지던 그 순간에 별빛이 내 몸으로 다가오고, 그리고 나에게 와닿던 노든의 눈빛을요. 그리고 단번에 나는 오래오래 사랑받았던 존재라는 것도 알았구요. 

  노든, 나에게 긴긴밤은 지난한 성장의 밤이었어요. 몸이 크고, 마음이 크는 아프고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 긴긴밤에 함께 있어준 나의 노든. 노든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는 거 알아요. 이제 나는 바다를 헤엄치며 다시 또다른 긴긴밤으로 가요. 

  그리고 나는 그 어느 날 노든이 내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노든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긴긴밤 서로의 숨결로 위로 받던 그런 사이니까요. 나의 노든, 당신의 긴긴밤이 이제 편안한 밤이 되길. 이 세상의 유일한 흰바위코뿔소여, 그래서 특별하고 외로운 나의 아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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