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pr 20. 2023

최은영의 <밝은 밤>-등불을 들어 어둔 밤을 쳐다 보며

<희령은 어떤 곳일까>

  이 소설은 4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긴 세월만큼 배경의 변화도 굵직하게 이루어진다. 크게 개성, 대구, 희령이 나오는데, 지연과 할머니가 만나는 희령이라는 지명만이 현재 쓰고 있지 않은 지명이다. 희령은 어떤 곳일까. 한자로 희와 령 몇 개를 찾아보면.

희: 喜(기쁠 희), 姬(여자 희), 熙(빛날 희)

령: 靈(영혼 령), 寜(편안할 령)

  그래서 한자를 통해 생각한 희령의 의미는 이렇다.

-영혼이 기쁨을 느끼는 곳

-여자들의 영혼

-영혼이 빛나는 곳

-편안함과 기쁨을 느끼는 곳

-여자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곳

  희령은 지연이 할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절에 은하수를 맨눈으로 처음 본 곳이다. 아이의 몸에 내려왔던 은하수는 그녀를 꿈꾸게 하고, 그녀는 이제 마음의 보호대가 부러진 우울한 천문학자가 되어 다시 희령에 온다.      

<시간은 어디로 흘러 가는가>

  할머니에게 자신의 증조할머니부터 엄마에 이르는 이야기를 듣는 지연에게 이제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지 않고, 현재에서 과거로 간다. 현재에서 과거로 간 지연에게 그녀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는 손에 만져질 듯한 삼천이, 영옥이, 미선이가 된다. 그리고 과거로의 여행에서 지연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현재의 고통과 슬픔의 실체에 접근하고 직면한다. 

   

<그들은 누구인가-등장인물 이야기>

증조할머니

할머니는 증조부가 증조모에게 왜 미쳤었는지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증조모의 눈 속에는 아이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백정 딸 주제에 뭐가 당당하고 즐거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는 맞기도 했다. 고개 숙이고 걸어. 감히 양민과 눈을 마주치려 해?     


그러나 증조모는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숙이려다가도 저절로 머리를 들게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봤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았다. 만사를 궁금해했다.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했다. 증조모가 증조부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증조부가 가장 최악이었던 순간마다, 그래도 너희 아버지는 나를 구했어. 그래도 너희 아버지는 나를 구했어.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호기심이 많고,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없는 사람. 어마이를 버리고 도망간 간나. 그러나 외롭고 외로워 돌멩이라도 사랑하고 싶었던 아이. 증조할머니는 지연과 닮았다. 그들의 외모가 닮았다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성향과 생각도 비슷할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증조할머니와 지연은 명석하다는 점, 그러나 사실은 끝끝내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은 아이였다는 점에서 같다.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관계를 보면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딸에 대해서도 어미의 본능적 사랑이 아니라, 근심에서 자란, 아이를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며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증조할머니와 새비아주머니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일단 증조할머니가 백정의 자식이라는 점, 그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포기를 몸에 밴 삶을 살게 작용한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는 자아가 채 완성되기 전인 십 대에 남편과 만났기 때문에 그들에게 남편은 배우자를 넘어서 자아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큰 인물이다. 그 인물에게 존중받지 못한 증조할머니의 인생은 새비 아주머니의 인생과 색깔이 다르다.

  증조할머니는 딸의 결혼의 불길함을 알아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다. 그리고 새비아주머니가 희자에게 한 것처럼 딸을 공부시키지 않는다. 

  증조할아버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증조할머니가 관계에 있어서 좀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증조할머니라는 인물은 이 소설 속에서 나에게 가장 생생하게 다가온다. 크고 마른 그녀가 옥수수를 먹으며 철길을 바라보고 있다. 쓸쓸하고, 외롭지만 그녀의 눈빛은 반짝임을 알고 있다. 

    

증조할아버지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기래요 당신 없이 나 살기 어려웠을 깁니다. 내 그래 당신 고마움 모르는 사람 아니요. 내 당신 그늘 아래서 여태 별 탈 없이 살았으니, 기래서 내를 빚쟁이 대하듯 했시까. 내레 당신한테 기렇게 빚을 졌다구     


내가 당신한테 도망치자 했시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지 했시까.     


  재수 없는 인간. 그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한 유일한 좋은 일은 아내를 구한 일. 그러나 그 하나의 일로 평생 모두를 피로하게 한 사람. 그래, 그가 증조할머니를 때리길 했나, 영옥을 때리길 했나, 바람을 피웠나, 도박을 했나. 아니 그런 거 안 한  걸로도 어지간한 남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지독한 세상.

  그가 누군가를 사랑한 것은 증조할머니를 사랑한 그 짧은 며칠이 아닐까(부모님은 그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에게 그가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사랑을 십대 시절 며칠 동안 다 썼다. 그것은 여자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 포함한 사랑이다.

  그렇다. 그를 위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가 결혼을 선택한 것이 십 대 때였다는 것. 그 허영심이 낳은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 만약 그가 5년 정도 후에 증조할머니를 만났다면 그는 증조할머니에게 매혹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를 위한 변명을 말하는 문단에서 또 그를 비난하자면, 그러나 그가 다른 삶을 택했다고 해도 그는 행복했을까. 양민의 처녀와 결혼했다고 아내를 존중했을까. 

  그가 정말 싫은 것은 그 같은 사람이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 집안에서 그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의 유년을 망치고, 하루하루 상처 주며, 마땅한 행복을 누리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가족을 원망한다. 지금 2023년에도 그런 남편이, 그런 가족 구성원이 없을까? 그는 슬프게도 구시대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현시대에도 존재하는 남자이다. 그는 영옥의 남편으로, 미선의 남편으로, 지연의 남편으로 변주되며 이어진다.

   세상에, 그리고 그가 자신의 외동딸에게 한 짓이라니.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자기 딸이랑 맺어준 사람이다. 거기에 사위가 떠난 걸 딸 탓으로 돌리는 그 몰염치함이란.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그가 없이 여자들만 살던 대구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녀들에게 가족이란,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가족이란 증조할아버지가 없이 살았던 시절이다.   

   

새비 아저씨

정말인가. 새비 아주머니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다. 정말 나 때문에 집이 기운 건가. 나라는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이런 일이 생긴 건가. 시모의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자신에게도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던 것이다. 어느 날 시모는 자기 아들이 뒤에 있는지도 모르고 새비 아주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또 했다. 새비 아저씨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큰소리를 냈다. 한 번만 더 자기 아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어머니 얼굴을 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두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증조부는 할머니가 크게 웃거나 공을 차면 화를 냈지만 새비 아저씨는 그걸 좋게 봐주었다.   

   

새비 아저씨가 원체 그런 사람이었나봐. 도무지, 어떤 경우에라도 남 위에 올라 가서 주인 노릇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야.   

  

  새비 아저씨 내 스타일! 범사에 감사해하고, 매일 주어지는 삶에 감사해하는 사람.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아내를 사랑할 줄 알고,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 해 같은 사람. 사람을 사랑하지 못 하는 증조할아버지가 유일하게 좋아한 인물. 하나님을 저버리지만 사실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 

  새비 아저씨에 대해 생각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가 만약 21세기인 지금 이 세상을 사는 남자여도 이렇게 소설처럼 많은 인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증조할아버지, 길남선 등이 즐비한 시대라서 사랑받는 것은 아닐까. 좋은 남자가 귀한 시대에 살아서 사랑받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처음 말한 것처럼 그는 내 스타일이다. 그는 이 시대에도 귀한 인물이다. 여전히 이 시대에는 지연의 아빠가, 지연의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가 좋은 남자라는 것도 떠나서 사람을 존중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 반짝이는 보석이다.     


할머니

영옥이는 낭중에 시인을 해야갔어.     


  할머니는 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그녀에게 시인을 해야겠다고 말한 새비 아저씨의 다정한 말은 지금의 그녀를 예감한 말이었을 수도. 그녀는 가족사를 읊조리는 시인처럼 모두 외동딸(지연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외동딸은 아니었지만.)로 이어지는 그녀들의 인생을 얘기한다. 그녀가 이어준 과거와 현재의 다리로 지연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 

  할머니의 이야기로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새비 아저씨, 새비 아주머니는 기억 저 너머에서 걸어온다. 할머니는 삶에서 지금의 삶을 살다가 언제든지 그 시절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녀에게 그들은 죽은 인물들이 아니라 여전히 생생히 기억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엄마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차갑고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우리가 엄마에 대해 인식한 순간 엄마는 이미 엄마인 상태였다. 엄마가 엄마이지 않은 시절, 결혼을 하기 전, 딸인 엄마, 누구의 친구로서의 엄마를 우리는 짐작하기 어렵다.

  지연의 엄마는 암 투병 중에도 남편의 끼니 걱정을 하고, 바람 핀 사위를 딸 보다도 더 걱정하는 엄마이다. 딸의 마음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녀는 슬프지만 장녀를 잃고, 그리고 이제 심적으로는 하나 남은 딸마저 잃은 상태다.

  그녀의 어린 시절의 아픔이 그녀의 이런 행동를 모두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연은 할머니를 통해 들은 엄마의 이야기로 그녀에 대한 이해에 바짝 다가선다.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엄마가 아닌 어린 미선을 바라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지연에게 엄마가 준 마음의 생채기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지연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내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일을 하고, 껍데기뿐일지라도 유지되고 있었던 결혼생활을 굴려나가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야 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지연이 할머니 집에 처음 갔을 때 할머니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대접받을 줄도 알아야지.”

  지연은 대접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지연은 부모에게 대접받아 본적 없고, 남편에게 대접받아 본적 없고, 자신이 자신을 대접한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은 절실히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 한 것, 남편에게 사랑받고 이해받지 못한 것에서 그녀의 잘못은 조금도 없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사랑한 사람이지만 어떤 이해와 사랑도 대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겨우 서른 두 살이다. 그녀가 희령에서의 삶을 통해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이제 그녀의 선택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희자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쩜 딸 하나를 낳아 고조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 줄 수도 있다.      


새비 아주머니 가족들

  새비 아주머니, 새비 아저씨, 희자. 나는 그들이 대안적이고 희망적인 인물들로 보인다. 새비 아주머니는 백정의 딸인 증조할머니에 대해 처음으로 편견을 가지지 않은 인물이며, 딸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딸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딸을 위한 모성애를 넘어, 사실은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리고 증조할머니와의 우정에서 보인 인간적인 면모는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새비 아저씨 역시 밝고 역동적인 인물이다. 특히 그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에정은 그를 오래 기억하게 한다.

  희자가 자신의 조부모집에서 나오면서 그 집의 장독대를 부쉈을 때부터 나는 그녀가 맘에 들었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개성 시절의 얘기를 조잘거리던 시절을 넘어서 서울로 독일로 간다. 그것은 그녀의 몸 뿐만 아니라 정신이 나아간 것이고, 그녀의 마음이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집에 새비 아주머니와 증조할머니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 일생을 짓눌린채 살았던 두 여자의 영혼은 희자를 통해 그녀들의 바람대로 멀리멀리 이국까지 간 것이다.

      

<인물들의 관계>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와의 관계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너에게는 체로 거르듯이 거르고 걸러서 가장 고운 말들만 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러지를 못했다.      


  그들은 일평생 여러 번 서로를 구한다.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 개성에 왔을 때 굶주리고 마른 새비 아주머니를 증조할머니가 구한다. 증조모가 난산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 새비 아주머니가 증조할머니를 구한다. 새비 아주머니가 희자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걸렸을 때 증조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적은 편지를 써서 새비 아주머니를 구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났고 살아갔다.

 그들의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우정? 너무 가볍다. 사랑? 그것도 넘어섰을 것 같다. 그들은 처음 본 날부터 죽는 날까지 일평생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 사랑의 순도에 질투나 권태가 있던 적도 없다. 그들의 사랑의 색깔은 그렇다. 그들은 서로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들은 서로를 귀하게 여긴다. 그들에게 서로는 백정의 딸도, 남편 일찍 여의고 혼자 애 키우느라 고생하는 여자도 아니다. 그들에게 서로는 하나의 오롯한 인간이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너른 마음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다.      


지연과 할머니의 관계

  이 책에서 지연과 할머니는 육친 관계라기 보다는 이야기의 전달자와 청취자의 입장이다. 그 둘이 긴 시간 서로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일반적인 손녀와 할머니의 관계와 다름을 보여준다. 할머니의 신세지거나 노인 취급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도 이야기 전달자로서의 할머니의 위치를 공고하게 한다.      


<지연의 깨달음과 회복의 과정>

  지연은 상처를 안고 희령에 와서 먼 과거로부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새기고, 엄마를 일정 부분 이해하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가 남편의 외도로 촉발된 것 뿐이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만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신이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녀들의 공통점>

  증조할머니-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지는 4대. 지연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4명의 그녀의 공통점은 남편복이 없다는 것이다! 어쩜 그렇게 단 한 명도 새비 아저씨를 닮은 사람을 못 만났을까. 그리고 또한 그들 모두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편들 모두는 그들이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사랑받지 못하지만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는 인물들이다. 증조할머니의 경우 오히려 증조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사랑한 순간은 있었지만 증조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사랑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경우에도 애초에 포기한 결혼이다 싶을 정도로 시작부터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으며, 엄마의 경우에도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맞춤인 남편을 택한 것 뿐이다. 오히려 지연의 경우가 유일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남편을 사랑했다. 그래서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의 경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 또는 남편의 배신에 큰 실망을 하지 않는 반면 지연만은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나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고, 사과받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아무에게도 사과받지 못 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여성 인물과 남성 인물>

  그래서 이 소설의 남성 인물들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새비 아저씨를 제외한 모든 남성은 부정적이다. 증조할아버지, 길남선(할아버지라고 쓰고 싶지도 않다.), 아빠, 지연의 남편까지 부정적 인물이며 아주 짧은 부분 나오는 삼촌마저 냉소적이고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반면 여성인물들은 긍정적으로 그려지는데, 주인공들에게 도움을 주는 여성인물들은 지우, 명숙할머니 등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도 긍정적이고 개성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심지어 지연의 교통사고에서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지연을 도와준 인물도 여자 목수이다.      


<밝은 밤의 의미

  밤은 밝다. 그것은 하얗게 지새운 밤일 수도 있다. 슬픔, 걱정, 자학으로 하얗게 뒤척인 밤. 하지만 슬펐던 나의 과거가 사실은 밝았음을, 내가 애써 지운 언니가 사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음을 아는 밤이기도 하다. 또 그 밤이 사실은 나를 밝혀주는 밤이었음을 안다. 또한 지연의 반짝이는 깨달음의 밤일 수도 있다. 내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며 전등을 들고 과거의 밤을 비춰보는 밝은 밤일 수도 있다.                                   

작가의 이전글 모두의 긴긴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