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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24. 2023

용이가 월선이에게

소설 <토지>속 등장인물에게 편지쓰기


용이가 월선이에게




  흰 꽃상여는 조촐했다. 임자 혼자 누워 있을 꽃상여 안은 어떤 향기가 날까, 얼마만큼의 공간일까, 어떤 온도일까, 자네는 어떤 표정일까. 내 손으로 염을 하여 임자와 마지막을 고했지만 나는 벌써 임자의 마지막 표정이 도통 떠오르지 않소. 푸른 눈이 감긴 임자의 얼굴은 도통 기억이 잘 나지 않소. 어쩜 모든 기억은 그 푸르스름한 임자의 눈동자에서 시작됐는지 모르겠소. 그 눈을 보면 백발이 성성한 지금이 꿈결 같고 그 푸른 눈이 더 맑았던 우리의 어린 시절이 더 현실인양 느껴지오.


  푸른 눈을 가진 나의 월선, 어릴 적 용이 오래비라 부르며 풀숲에서 나를 향해 웃던 그대 모습이 기억나오. 본래 뼈대가 가늘었던 여자, 웃음도 희미해서 늘 나를 아스라한 기분이 들게 했지. 어릴 때도 겁이 많고 눈물이 많아서 누가 큰소리만 질러도 울어버리던 당신. 어디서부터 나의 애틋함이 시작되었는지, 어느 지점부터 우리의 운명이 맞닿고 또 어긋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소. 그저 그것이 말 그대로 운명이었던지 소리도 없이 당연한 듯 시작되었지.


  시작은 정염의 불길이고, 나중은 회한이며, 이제는 일상이고 운명인 월선. 한때는 수도 없는 ‘만약’을  생각했지. 내가 강청댁과 혼인하지 않고 그대를 잡아 도망이라도 쳤다면, 임이네가 아닌 그대가 홍이를 낳았더라면, 내가 임이네를 진작에 떨쳐냈더라면. 하지만 그대도 나도 알고 있지 않소. 나는 어머니를 저버릴 수 있는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법으로 맺어진 여자를 내치지 못하는 사내라는 것을, 앙머구리같은 여자라도 내 아들의 어미를 버릴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임자도 법으로 만난 사람이 제일이고, 그 다음은 자식 낳아준 사람이 제일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염치 바르고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의 꽃상여를 따라가며 생각해 보니 우리의 서럽고 아름다웠던 인생의 모습들이 스쳐 가오. 삼거리 주막으로 돌아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하고 내 어깨너머 만 리나 먼 곳을 바라보던 임자의 시선이 기억나오. 나는 졸렬한 사내가 늘 그러하듯 어찌 할 바 모르고 임자에게 성난 것 같은 얼굴만 보여줬지. 임자가 타관 남자를 따라 마을을 떠나던 그 날 이후 사실은 어느 시 어느 때도 임자 생각을 안 한 날이 없건만 못난 사내는 그 마음을 표현도 못했소. 임자는 내게 늘 내 목구멍에 걸린 가시였소. 길상이와 봉순이를 데리고 오광대 구경을 간 날 나는 수도 없이 ‘와 니는 원망이 없노.’하며 자네의 얼굴에 얼굴을 비벼댔지. 우리의 처절했던 젊은 날. 그날 이후로도 임자는 수많은 날을 삼거리주막에서 옹그려 누워서 나를 기다렸겠지. 아아, 나는 그 오랜 기다림을 뭐라 위로해야 할까.


  산판 일을 하면서 홍이가 편지를 주고, 또 직접 오기 전에 나는 이미 임자에게 드리운 죽음을 공기처럼 느꼈지. 홍이의 원망어린 말에도 그대에게 바로 가지 않은 마음은 자네만이 온전히 이해하겠지. 나는 알고 있었소. 내가 가기 전에는 임자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정된 그대의 죽음을 기다리며 산판 일을 마저 끝내는 그 여분의 시간 동안 받을 나의 고통이 내가 감내해야 할 사랑의 또다른 모습임을.


  임자가 죽고 길상이는 휘청대고, 우는 모습을 한 번 안 보이던 서희 애기씨도 문상을 와서 눈물을 흘렸지. 몸으로는 핏줄 하나 남기지 못 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 아이를 기른 게 임자였지. 마음씨 하나 가지고 그 기박한 팔자를 곱게 넘긴 자네였지.  


  주먹만한 얼굴을 한 임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나는 임자도 나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했소. 그래요, 우리는 여한 없는 사랑을 했어.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박복하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사랑을 했어. 운명 같은, 아니 운명 따위 이제 무섭지도 않은 사랑을 해버렸어. 나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내지만 사랑을 했어. 우리는 많이 살았어, 살 수 있는데까지 살았어. 그리고 나는 알고 있소. 누가 죽음을 끝이라 해. 당신이 죽음이라는 강을 건넌 뒤에도 우리 사랑은 끝나지 않았음을 그대도 나도 알고 있어.


  이런저런 생각에 상여에서 조금 뒤처졌네. 상여 가까이에 있는 자네 아들 홍이가 퍽도 서럽게 우는군. 홍이가 어릴적 나를 닮아 나는 젊은 시절의 내가 임자의 상여를 따라가는 것처럼 느껴지네. 하늘은 그대의 눈빛처럼 푸르고, 아마도 푸른 그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한 생애 임자 덕에 넘치는 사랑하고 가오. 우리의 정은 같이 있지 않아도 흐르고 있음을 왜 내 모르겠소. 내 남은 생을 조촐하게 살아갈 터이니 그대 푸른 하늘처럼 웃고 기다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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