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온 몸이 눈물주머니 같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눈물이 차올라 닦아내면 또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 그것은 지혈되지 않는 피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차오르는 것이다. 그 눈물은 후회스러운 과거에서 비롯된 지독한 현재 때문이다. 아아, 나의 그 시절에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기억했다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오는 지민의 엄마가 쓴 소설 <재와 먼지>에서 한 연인은 임사체험을 통해 세 번의 삶을 살 기회를 얻는다. 먼저 자신들이 살아온 삶, 그리고 미래에서 현재로 가는 삶, 마지막으로 그 모든 걸 알고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삶. 그들은 세 번째 삶에서 평범한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현재의 삶을 산다. 평범한 자신들의 미래를 아는 그들의 삶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평범한 하루하루로 수놓는 평범한 현재가 될 것이다.
이제 스무 살인 지민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살한 엄마, 그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삶, 엄마를 정신착란으로 몰아 병동에 감금한 아빠와 가족들. 그녀의 스무 살은 오로지 아픔과 상처로만 이루어진 19년이 만든 스무 살이다. 그리고 이제 1999년 세기말, 그녀는 자신에게 고백한 남자와 동반자살을 계획한다.
그런 그녀는 그 스무 살에서 몇 번의 만남을 경험한다. 엄마가 쓴 소설 <재와 먼지>와 만나고, 그걸 이야기해주는 외삼촌과 만나며, 또 예언가 줄리아와도 만난다. 또한 그 모든 만남을 제안하며, 자신의 떨리는 손을 잡아준 남자친구와도 만난다.
루페를 끼고 시계를 고치는 장인처럼 원고를 교정하고 있는 외삼촌은 이 소설에서 가장 예언가처럼 보인다. 그가 말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이 단편을 읽고 설거지를 하면서, 청소기를 돌리면서,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다시 집에 걸어가며, 외삼촌이 한 얘기에 대한 생각을 슬며시 하곤 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과거가 원인이 되어 현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원인이 되어 현재가 결정된다.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달라질 거라는 진호씨의 말도 외삼촌이 말과 결국은 같은 말인 거다.
그러니까 결국은 희망과 위로. 그 얘기를 하려는 거다 그 오래되고 바보 같은 희망을 말하려는 거다. 왜 그 단어는 그토록 촌스럽고, 끊임없는 주제이며, 이제 마흔이 넘은 내게는 애틋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미간을 찌푸리게 눈부시고 화려한 희망도 아니다. 그저 평온, 평범, 평이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래서 지민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난했던 과거를 슬퍼하며 준과 함께 죽을 거야? 아니면 ‘만약 지민씨와 준이 결혼하게 된다고 칩시다.’라고 하는 미래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 거야? 엄마처럼 살 거야? 엄마의 소설처럼 살 거야? 엄마는 20년 뒤의 대학생 너를 기억하지 못 했잖아. 너는 마흔의 너를 기억해봐.
지민의 엄마의 소설은 <재와 먼지>였다. 지민의 엄마는 자신의 소설 내용과는 다르게 재와 먼지가 되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재와 먼지 뒤로 피어오르는 한 줄기 희망을 지민은 길어 올렸을까.
그래서 스무 살 현재의 그들이 이십 년 후 미래에 마흔이 되고, 그 마흔이 이제 현재가 되어버린 지금 준은 아내에게 <재와 먼지>의 실물을 건넨다. 그 아내가 평범하고 요란스럽지 않게 당연히 지민이라는 사실이 나는 왜 이렇게 뭉클뭉클할까. 그들은 그렇게 이십 년 후 함께 맥주를 마신다. 편한 자세로 쇼파에 기대어 먹고 있을까. 참을 수 있는 만큼의 스트레스를 하루 동안 품고, 서로를 만나 고단한 하루를 이야기할까. 세상에 이런 해피엔딩이라니. 미남미녀의 주인공이 나와서 키스하는 그들을 중앙에 놓고 뱅뱅 도는 드라마의 엔딩보다, 맥주를 마시는 이 사십 대 두 명이 나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소설의 엔딩이다. 그리고 세기말에 과거에 꽉 차 스스로를 파괴할 생각으로 가득한 지민에게 말하고 싶은, 기억하게 하고 싶은 미래이다.
지민은 정말 죽으려고 한 걸까. 죽으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면, 그 죽음을 여름으로 유예했을까. 그리고 굳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죽으려 했을까. 그리고 엄마의 책을 찾아다니고, 줄리아를 찾아갔을까. 사실은 ‘죽고 싶어!’가 아니라, 그렇게 외치는 자신을 만류할 이유를 찾아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스무 살의 짧은 여행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서른 무렵에 눈물로 몇 주를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심한 우울감이 나를 맴돌던 시절이다. 나는 그 무렵 직업도 없고, 남자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마음이 나를 가득 채웠다. 인생을 노력 없이 산 것도 아닌데 조금도 발전 없는 삶이 늘 발목에 쇠사슬처럼 매달린 느낌이었다. 그때 나에게 미래를 기억하라고 속삭이고 싶다.
이 소설이 귀띔하지 않는가.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역시나 엄청나게 화려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 화려한 미래를 그렸던가. 버티고 보니 다행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록 평범한 직업을 가지게 됐고, 이토록 평범한 친구들이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남자를 만나 이토록 평범한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토록 평범한 현재를 만나기 위해 포기하지 않으려 참아야 했고, 눈물을 꿀꺽 삼켜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그리고 이제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생각해본다. 60대의 내가 야무지게 호수를 걸어다니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의 거칠고 황량한 육아의 하루를 보내보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면서, 빨래를 개면서 여러 콘텐츠를 보곤 하는데, 얼마나 달콤하고, 쓰고, 간이 센지 재미가 넘친다. 늘 복수를 하고, 그 복수의 방법은 얼마나 집요하고 거친지 재미가 끝도 없다. 이런 것이 넘치는 시대에 희망이라니! 그리고 희망으로 말하는 험난한 현재에 대한 위로라니! 그런데 그렇게 재미진 것들을 보고도 결국 제일 많이 기억나는 것이 이 소설이라니.
소설의 처음과 끝에 나오는 말인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을 여러 번 되뇌어 보고 기억해본다.
문을 연다. 일단 라일락 향기가 풍기는 현재를 들이마신다. 그리고 100퍼센트로 수렴될 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현재를 한 발짝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