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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27. 2023

관심의 머뭇거림

김혜진의 <경청>을 읽고

  무던히도 운동을 못 하는 내가 어느 날 피구에서 우리 팀의 마지막 살아남은 자가 된다. 한여름 태양은 내 몸을 익게 하고,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그득하다.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던지는 공이 이리로 휙, 저리로 휙 날아다닌다. 둔한 나는 그 공 틈에서 공을 받아내지도 피하지도 못 하는 자세로 서 있다. 드디어 날아오는 공은 내 옷을 스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수많은 아이들이 말한다. 


  “야, 너 죽었어!”


  그래, 그렇구나. 나는 죽었구나. 공이 옷을 스치기 전에 그들이 휘둘렀던 공은, 사실은 공이 아니라 말이었구나. 나는 죽었구나. 그들의 공에, 그들의 말에. 그리고 또 주억거리며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공을 휘두른적이 없던가.


  이 소설의 해수는 말을 다루는 사람이다. 지금 해수는 자기가 한 말의 늪에 빠져 있다. 짐작컨대 해수는 유능한 상담가였을 것이다. 화사하게 화장하고 방송국에 앉아있었을 그녀, 무언가를 설명하는 듯이 손을 내밀고 있는 신문기사의 사진 속 그녀. 그녀는 이제 그 수많은 말들 속에서 허방을 디디고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해수는 매일 끝맺지 못하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들을 쓴다. 이성목 기자에게, 태주에게, 주현에게, 이한성 대표님께, 주한나 씨에게, 최경진 변호사님께, 조민영씨에게. 


  해수가 편지를 쓴 이들은 누구일까. 자신이 사랑했던, 아니 자신을 사랑해줬던 태주와 주현,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과 관련된 주한나 씨, 자신을 나락에 빠뜨린데 일조한 이성목 기자, 자신을 실직하게 만든 이한성 대표님, 조민영 씨, 사건을 타개하는데 필요한 최경진 변호사. 그들은 모두 해수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이다. 해수는 이들에게 할 말이 많다. 어쩜 이들 중 누군가는 해수의 현재를 해결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쓴 편지는 언제나 마땅치 못 하고, 못 미더워, 잘게잘게 찢겨 폐기된다. 해수의 말이 가고 싶었던 곳은 정말 그 편지의 수신인들이었을까. 


  그러다 해수는 세이와 순무를 만난다. 그들은 해수가 편지를 보냈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일단 세이와 순무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었을 때 약자들이다. 따돌림을 당하는 10살 여자아이와 험한 묘생을 사는 어린 고양이다. 그러나 이 타오르는 여름을 함께 하는 건, 오래 시간을 두고 신뢰를 쌓은 다음 서서히 마음을 여는 건, 그리하여 해수에게 가을이 오게 하는 건 약자인 세이와 순무이다. 


  해수는 순무를 통해 말이 없이 맺는 관계를 알게 된다. 말에 대해 자신 있던 해수. 해수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계 수단이었으며,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독이 되어, 얼굴이 잔뜩 부은 고양이와 마주 앉은 지금에서야 해수는 느낀다. 말이란 무엇인가. 듣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한 번도 들어본적이 있는가. 침묵도 말이었구나. 순무는 말하고 있구나. 순무는 눈으로 말하고 있구나. 


  그리고 세이도 본다. 세이는 이름부터 say이다. 세이는 곧 말이다. 해수는 세이가 당하는 말의 폭력을 지켜보면서 섣부르게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이의 사건에서도 쉽게 세이의 편을 들지 않는다. 세이는 피구 경기에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다. 해수는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은 사건을 회피하려는 머뭇거림이 아니다. 해수는 세이를 위해 머뭇거린다. 그리고 세이가 사과해야 함을, 다른 문제들은 후에 방법을 찾고 해결하면 됨을, 세이는 결코 훼손되지 않음을 말한다. 말하면서 해수는 알게 된다. 이것은 세이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안다. 


  이제 해수는 그 모든 이들에게 편지쓰기를 멈춘다. 그리고 해수는 드디어 경청을 한다. 상담사의 자리에서 경청을 하는데 내담자로 온 사람 역시 해수이다. 그녀는 상담사이면서 내담자로 자신의 말을 듣는다. 해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모두들 섣부른 판단이었다. 해수가 배우에게 한 말은 섣불렀다. 한 번 깊게, 멈추어 생각해 보지 않고 뱉은 말이었다. 거기에서 해수는 분명 잘못했다. 그러나 해수를 판단한 사람들. 그 사람들 역시 해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해수를 섣불리 판단하고 또 재단하지 않았는가. 자신들이 비난하고 싶은 사람으로 해수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이것은 그러니까 또 나의 이야기다. 나는 상대에 대한 서투른 판단을 하루에도 얼마나 쉼 없이 하는가. 그리고 나에 대한 남들의 그 서툰 판단을 얼마나 멸시했는가. 

   이야기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해수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찬사로 바뀌는 반전 따위는 없다. 해수를 사랑했던 태주와 주현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해수가 복직되어 조민영 씨에게 시원하게 일갈하는 장면도 없다. 세이가 엄청난 피구 실력으로 자신을 따돌린 아이들 사이에서 활약하는 일도 없다.  세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잘 지내는 일도 없다. 세이는 전학을 가게 될 뿐이다. 심지어 어린 고양이 순무마저 아무 상처 없이 다 낫게 되지 않는다. 순무마저 몇 개의 이빨이 뽑히고서야 안온한 삶을 갖게 된다. 순무의 구조조차 극적이지 않다. 순무는 그저 조용히 세이와 해수의 곁으로 온다.


  소설 내내 주인공 해수를 부르는 ‘그녀는’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작가는 ‘해수는’이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그녀는’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해수를 응원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그녀의 행동을 따라가면서 그녀의 행동과 마음이 가는 곳을 멀거니 보고 있다. 이를 보는 우리는 해수가 했던 행동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고, 해수의 마음의 변화도 감정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런 객관과 감정 없음이 해수를 더 쓸쓸하고 외롭게 보이게 하고, 얼핏 아리게도 느껴지게 한다.


  그래야겠다. 누군가에 대해 머뭇거리겠다. 관심 있는 머뭇거림을 가지겠다. 그것이 비난일 경우는 물론이겠지만 연민이나 동정의 경우이더라도 말이다.


  뜨거울 데로 뜨거웠던 여름은 갔다. 가슴 속에 한 줄기 바람이 스치는 날이 이제 곧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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