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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23. 2023

엉망이어도, 그래, 그래도 계속 되기를

술라이커 저우아드의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를 읽고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삶을 일축하는 저 말. 일단 엉망이다. 그러나 엉망이라고 영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엉망인 채로 망가진 게 아니라 엉망인 채 완전하다. 그리고 엉망인 채 나아간다. 나 자신의 삶이 엉망임을 인정하고, 엉망이지만 완전한 것. 그리고 축제다. 축제를 준비하는 그 설렘과 시작, 그리고 짧은 기쁨과 오랜 쓸쓸함. 축제 후의 잔해를 쳐다보고 허망해지는 것. 아름다웠던 꽃가루들이 짓밟혀 쓰레기로 변한 걸 보는 것. 우리는 구석구석 떨어진 꽃가루를 오래오래 공들여 치워야 하리라. 


  책에 나온 저자의 삶에 공감한다고 할 수 없다. 저자와 같은 깊은 병을 앓아 보지 못 한 사람이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은 건강한 자의 건강하지 못 한 교만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에 쏘옥 빠졌다 나오고 쏘옥 빠졌다 나오는 경험을 많이 했다. 어릴 때 보다 책에 빠져들어 읽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점점 적어지는데, 이 책은 오랜만에 빠져드는 책이었다. 


  1. 건강한 삶->2. 환자로서의 삶->3. 회복된 삶. 이 책은 이 세 삶을 다루는데,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1과 3의 삶이 전혀 다르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2의 삶에서 모든 환자들은 완치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산다. 그리고 1->2->1이 될 거라 생각하며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1->2 이후 다시 1이 될 수는 없으며, 전혀 생각지 못했던 3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3의 삶은 1처럼 생에 대한 활기가 있는 삶도 아니며, 2처럼 하나의 목표가 있는 삶도 아니다. 이미 1의 삶처럼 생기가 있지 않다. 오랜 투병으로 정신과 육체는 소진되고 고갈 된다. 어떤 순간에는 투병을 했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었다라고 하는 작가의 고백은 작가가 맞이한 회복 이후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보여 준다. 자신의 회복을 위해 애써온 가족, 애인, 친구들. 그들에게 나는 사실 아팠을 때가 나았던 거 같아, 나는 사실 지금 너무 괴로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윌. 나는 왜 아직도 이럴까. 나는 왜 아직도 지고지순한 평생의 사랑, 영원한 사랑이 있기를 바랄까. 내가 그런 사랑을 하지도 못 하면서. 오늘 아침 초등학교 1학년 딸이 말했다. “엄마, 봉숭아 물이 첫 눈 올 때까지 안 없어지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 “응, 그렇다고 하더라. 근데 첫사랑이 꼭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까?”


  윌은 명백히 좋은 남자이다. 그가 보여준 간병인으로서의 모습은 고결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나는 고루한 사람으로서 윌과 저자가 끝내는 그래도 이어지길 바랬다. 하지만 저자가 회복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듯이, 그녀의 사랑 역시 공처럼 예상 못 했던 곳으로 튀어간 거겠지. 만약 그들이 투병 초기에 결혼을 했다면 그들의 지금은 달랐을까. 모두가 다 쓸데없는 축제 끝 꽃가루 같은 생각이겠지.


  그녀는 운전은 서투르다. 그리고 그 서투른 운전으로 미국 전역을 누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다시 시작된 3의 삶을, 손가락, 머리 한 올 하나하나 적응하듯이 그녀는 미국 전역을 누빈다. 이것은 새로운 생을 위한 여행이고, 전 남친을 잊기 위한 여행이고, 다양한 삶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다. 책의 첫머리에 윌과 술라이커가 나눈 편지에서 윌은 말한다. “이곳에 오니 미국 오지 여행에 나서고 싶어져. 너도 자동차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아?” 결국 윌의 환영과 추억과 악몽은 술라이커와 그 오랜 시간 끝에 함께 여행하게 되는 것이다. 


  서툰 운전은 회복 후의 삶을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과 같다. 그녀는 서투르게 걸으며 이전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간다. 그리고 이전이 사랑과 다른 모습으로 존에게 걸어간다. 그녀의 삶이 엉망이어도 축제이기를, 노래이기를, 계속 되기를.     


섹스가 끝나자 윌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아주 많을 거야.” 그가 말했다. “우리 사랑을 상자에 넣어 소중히 간직해야 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라도 이 관계를 지켜야 해.”     


  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에 집착한다. 그 말에 포함되는 것은 무엇이며 포함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진정으로 새롭게 시작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처음에는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아주 쉽게, 어쩌면 지나치게 쉽게 느껴진다. 그러다 점점 새로운 시작이란 실체가 없는 신화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현재와 과거를 바리케이드로 단절할 수 있다고, 이 괴로움을 부정해도 된다고, 과거의 깊은 사랑을 새로운 관계로 묻어버릴 수 있다고, 나는 애도와 치유와 재건의 힘겨운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 보기 드문 행운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결국 누구나 이것이 기만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대가를 치르게 된다.      


 영웅담은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 구조다. 생존자는 영웅과 마찬가지로 치명적 위기와 직면하여 불가능에 가까운 시련을 극복한다. 온갖 고난을 견디며 맞서 싸운 대가로 그는 더 선량하고 용감해지며, 승리를 거둔 뒤 더욱 지혜로워지고 삶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전에 살던 세계로 돌아온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영화와 책, 모금 운동과 병문안 카드를 통해 이런 서사를 계속 접했다. 이처럼 문화적으로 단단히 각인된 클리셰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서사를 내면화하지 않고, 거기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음을 깨닫는 건 더욱 어렵다.      

 

우울감이 바닥을 치면 다시 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치료를 받던 시기의 명료한 목표의식이 그립다. 죽음을 직시하며 세상을 단순하게 느끼고 정말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던 그때의 감각이 그립다. 병원 내의 생태계가 그립다. 그곳에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았는데. 그곳에서는 모두 함께 망가져 있었지만, 이곳 산 자들의 세계에 오니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진다. 무기력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암에 걸리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마침내 깨닫기 시작한다. ‘충분히 회복’된 다음에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면 나는 영원히 기다려야만 하리라. 씁쓸하지만 꼭 필요한 깨달음이다. 이 병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할 것이며, 나는 병과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치 멀리사와 나의 우정처럼, 사랑 없는 슬픔은 불가능하고 슬픔 없는 사랑도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나의 절박함 때문에 윌의 바람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이게 진실이다. 나는 줄곧 내가 너무 많이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 받고 싶어했고, 실제로 너무 많이 바라게 된 후로는 윌이 쉬고 싶어 해도 그러지 못하게 했다. 마지막 몇 달 동안 몇 번이고 나를 응급실로 데려갈 때마다 윌의 얼굴에는 기진맥진한 의무감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표정을 그가 날 부담스러워하며 언제든 떠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윌이 떠난 것은 병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내가 몇 년에 걸쳐 사소하고도 무수한 방식으로 그를 몰아붙이고 떠나도록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정말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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