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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30. 2023

끝내는 꽃을 피워내는 저 클로버처럼

나혜림의 <클로버>를 읽고

‘만약에를 백 번 해도 네가 있어야지.’


  여기 네가 있어야지. 정인아, 네가 있어야지. 이 땅 위에 가는 허리로 서서 결국에는 한 송이 꽃 피워 올리는 클로버처럼. 정인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네가 행운의 네 잎 클로버면 좋겠지. 또 행복의 세 잎 클로버면 어떠니. 중요한 건 이 땅 위에 뿌리 내리고, 바람에 흔들리면 작게 웃는 네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빛날 정에, 사람 인자를 쓰는 주인공 정인은 이름부터 빛나는 사람이다. 이 아이는 비행기를 타본적이 없다. 땅에 붙박여 다른 애들보다 중력을 한 세 배쯤 더 받고 있는 아이다. 비행기를 타보지 않고 중력을 더 받고 있다는 말은 정인이의 슬픈 처지를 나타내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땅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정인이만의 단단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헬렐은 소설의 첫 장부터 땅에서 조금 떠 있고, 중력을 받지 않는 존재라고 표현된다. 정인과는 처음부터 다른 존재다. 이들에게는 공통점도 있다. 정인이 처음에 헬렐레로 들었던 헬렐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빛나다’라는 뜻이다. 정인과 헬렐은 둘 다 빛나는 존재들이다. 그 빛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빛일까, 살리는 빛일까. 타오르는 빛일까, 미약한 빛일까.


  중력은 할머니를 표현할 때도 나온다. 할머니는 보통 중력을 받아 허리가 굽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정인의 상태와 같다. 그런데 정인이 현실을 자책하고, 자신에 대해 부정하거나, 자학하는 말을 할머니에게 할 때 할머니는 허리를 곧추세워 중력을 거부한다. 이 상태는 헬렐의 상태와 같으며 할머니의 불안과 슬픔의 상태일 수도 있겠다. 정인이 그런 말을 거둬들이면 할머니의 허리는 다시 중력을 받아 가라앉는다. 


  헬렐은 왜 하필 정인을 택한 걸까. 정인은 그저 불쌍하고 웃자란 가난한 소년일 뿐인데. 무엇이 헬렐의 식탐을 동하게 한 걸까. 정인은 급하게 철들어 욕심이 숙성된 아이라고 표현된다. 그 욕심들이 숙성되어, 영혼에 풍미가 있고, 외로움이 고명이 된 아이라고 나온다. 정인은 멧새로 보이지만 사실은 오르톨랑 감이란 이야기.


  욕심이 숙성된 아이이기 때문에가 헬렐이 정인을 택한 이유의 전부일까. 정인은 오르톨랑이면서 사실은 좌완 투수가 아닐까. 강속구를 던질 좌완 투수. 지옥에 가서라도 데리고 와야 하는 좌완 투수. 그 안에 근성이 있어 더 특별한 그 좌완 투수. 사실은 그 모든 욕심와 외로움을 이겨내고 좌완 투수가 될 존재가 정인이기 때문에 헬렐은 정인을 택한 것이 아닐까. 지금은 그냥 외로운 소년이지만 강속구를 던질 재능과 미래과 내재되어 있는 소년이라 구미가 당긴 건 아닐까. 어쩜 이것은 정인이 좌완 투수가 되어 인생의 마운드에 서게 되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바라는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마음의 연장으로 재아와 정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다. 재아와 정인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전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내 멋대로 생각하고 싶다. 재아와 정인이 정말 공통점이 없을까. 아니다. 그들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손과 돈을 버는 손이지만 손에 굳은 살이 있다는 점이 같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재아는 흙을 좋아하는데 정인이야 말로 땅에 뿌리박혀 있는 인간 아닌가. 재아는 달개비와 꽃무릇, 클로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시련을 많이 겪은 땅에 그들은 힘겹지만 끝내는 뿌리 내릴 것들을 함께 심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 힘겹게 버티던 운동화는 찢어진다. 갑피가 밑창에서 떨어지며, 버티고 버티던 정인의 자존심은 깨진다.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고 화가 나고, 이제 그만 헬렐의 말대로 하고 싶다.


  정인은 지금까지 폐지를 줍고,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힘겨워 하긴 했지만 꿋꿋히 해냈다. 그러나 이제는 값을 더 쳐주지 않는 박코치한테서 서러움을 느끼고,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를 폐기하지 않는 햄버거힐 사장님을 보며 혼란스러워 한다. 마침내는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는 햄버거힐 사장에게 분노한다. 그는 이제 찢어진 갑피의 운동화를 신고 햄버거힐의 유리창에 돌을 던진다. 


  정인의 만약에가 펼쳐진다. 그 상상 속에서 나이키 신발들이 가득하다는 것에 마음이 시렸다. 그리고 그 문제의 비행기가 나오는 것 역시 마음 아프다. 정인의 만약에는 재아를 만나고, 할머니와 햇반도 아니고, 라면도 아니고, 말라붙은 밥도 아닌 식사를 하게 된다. 


  헬렐이 처음에 정인을 유혹할 때 정인이 말했다. 난 그냥 라면 먹을래요. 이미 반이나 먹었는데 남기면 설거지 하기 힘들어요. 이때는 웃었는데, 사실은 이 말이 정인이 헬렐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답할지에 대한 스포일러임을 알게 되었다. 


  정인은 아무 망설임이 없다. 정인은 상상 속에서 할머니와 식사하지 않을 것이다. 쇠약하지만 만질 수 있는 할머니 옆에서 라면을 먹을 것이고 햇반을 먹을 것이다. 재아와 클로버를 보면서 웃을 것이다. 어쩜 태주에게 또 당할 것이다.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찬밥 같은 자존심을 지킬 것이고, 또 지키지도 못 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정인은 현실에 남는다. 평생 제 손톱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적 없는 헬렐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정인에게는 굳은 살이 있는 진짜 손이 있으니까. 아아,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 정인이라니. 헬렐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군침이 돌게 하는 먹잇감이라니. 


  단단하게 뿌리 내려 하늘을 봐. 끝내는 꽃을 피워 내는 저 클로버처럼. 세상의 모든 꽃은 힘겹게 피었음을, 제각각 아름다움을 클로버의 향기가 속삭여준다. 정인의 뒷모습이 마냥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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