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스망, 새로운 배치, 레드부츠갤러리
홍현아 개인전. 아장스망, 새로운 배치
레드부츠갤러리.
기획 및 사회: 이용희.
시간나고 틈나면 가는 레드부츠갤러리. 집에서 걸어서 50분 정도의 거리에 있어 운동겸 갑니다. 운이 좋으면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있으면 작품설명을 들을 수 있기도 합니다. 방명록에 긴긴 소감을 쓰기도 하고....조용히 앉아 있다 오기도 합니다.
오늘, 작가와의 만남에 다녀왔습니다. 그림을 보며 가졌던 궁금증이 작가의 설명들로 해소가 되었어요.
연꽃잎차와 과일, 떡 등 간단한 다과가 오늘 손님들을 환대해주는 느낌을 주는 상차림이었어요. (이런 거에 감동함)
배치는 물질의 생기, 생기적 물질성, 물질의 행위성이 귀속되는 장소이다. 데란다(2019)는 “행위 능력을 가지는 것도 배치고, 행위하는 것도 배치이며, 행위가 실제로 벌어지는 곳도 배치다.”라고 하며 무엇이든 배치로 파악할 수 있고, 어디서든 배치가 나타날 수 있으며, 언제나 운동하는 것도 배치라고 보았다. 이 개체들(인간, 물체 등)은 그들 간 관계로부터 자율성을 가지며 구성 부분들의 특성이 전체를 구성하는 관계를 설명하지 않으며 조직, 행위, 표현 등 행위자와 새로운 실체를 생산한다. 배치성은 세계에 대한 재현 즉 모방이 아니다. 물질은 배치하고 배치됨으로 모방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이룬다. -흔히 사람들이 졸고라고 표현하는 내 논문에서.....
작가와의 만남.
모르는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까 뭘할까를 고민하셨다고.
여러가지 색깔의 종이를 돌리며 하나씩 고르라고 하셨다.그리고는 거기에 글을 쓸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종이배를 접으라 하신다. 비행기를 할까 배를 할까 하다가 배를 접기를 권유.(비행기를 접으면 다들 날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고.....) 나는 파란색 종이를 골랐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이 배가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
다양한 배. 배는 이동수단.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거라는 희망.각자의 배가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돈키호테의 아이들>이라는 작업을 했었다. 그 당시는 2013년, 한국은 박근혜 정권.
OECD 청소년 자살률 1위. 한국사회는 사용가치에 집착하고, 돈돈돈, 쓸모있는 것들에 매달린다.
그럼 쓸모없는 것을 그려보자고 생각해낸 것이 돈키호테. 돈키호테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만큼 희극적이고 재밌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사물을 바꿔보는 연습.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전시회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인
[심연에서], 다른 작품들의 제목은 모두 [새로운 배치]. '심연에서'는 게오르크 트락클이라는 시인의 시 제목으로 그의 시는 시각적이고 색이 연상되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이 제목만 가져왔다. 그림 안에는 집적된 오브제가 특정 공간에 모여있다.
항암 투병중이었다. 항암을 2주에 한번 했는데, 치료 후 첫 주는 꼼짝 못하고 그 다음 2주때에는 그냥 걸을만은 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동안 해오던 작업이 유화 작업인데, 유화물감냄새에 민감해져 해오던 작업을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항암 치료 후 2주차에는 그림작업을 할 만한데 유화 물감 냄새는 견디기 힘이 들어 다른 재료를 찾아보았다. 그래서 찾은 게 왁스. 왁스로 한 작품이다.
이질적이기 떄문에 전시에 이 작품을 걸까말까 고민했지만, 이 모든 다른 작품을 하게 해준 시발점(작가님은 영어로 트리거가 아닌 다른 말을 하셨는데.....) 같은 작품이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님은 후기구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 시대를 관통한 작가들은 거의다 그렇다고 했다. 그건 본질에 대한 의심을 한다. 아장스망, 재배치에 대한 순간. 창조자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니다. 단지 유에서 유를 만들어낼 뿐이고 그건 배치를 바꾸는 일, 즉 재배치하는 일이다. (내 개인적 생각. 요즘 창조, 창작, 콘텐츠개발등의 책을 읽어보면 한결같이 나오는 말이다. 있는 것들의 배치를 바꾸고 조합하는게 곧 창조라는 말들.)
난치병을 선고받고, 아파서 간 응급실에서 가자마자 수술을 해야했고 그후로도 몇번씩 수술을.... 그런 사람이니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작품이나 작업을 누구 다른 사람이 처리하는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잘 그렸다고 생각한 그림들은 따로 두고,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아, 못 버리겠더라. 그래서 그 그림들 위에 다시 유화를 그리게 되었다. 옛 그림의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완전히 다시 그리기도 하고. 그림의 재배치. 아장스망. 전에 그린 그림에 새 그림을 얹음. 주관적 판단에 의해. 5년전의 나와 지금의 대화라고 할 수도 있고 그림의 중첩효과.
그래서 물감이 두껍다. 행위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나이프로 긁기도 하고 손으로도 긁었다. 동작이 보이게끔 했다.정교한 붓의 흔적은 없다.
옛날 크로마뇽인이 최초의 그림그리는 행위를 떠올렸다. 원시적 행위. 이 동작을 할 때의 내 시간을 그림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서양화는 가산 플러스의 개념들이다. 더해서 그리는 그림. 여백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림은 재배치일 수 밖에 없다.
그림안에 쌓인 구조물. 쌓은 형태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균형감,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나는 많은 관계들이 만들었다.
욕망인가, 과한 욕망인가 사치인가. 무더기를 쌓는 것. 그렇다면 이 욕망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너지더라도 남을 위협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길 한복판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을 어떻게 배치할까.
내게 이 전시는 나의 투병일기 같은 전시이다.
그림을 펼쳐 걸고나니 매사에, 하루하루가 간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을 그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