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우 Feb 28. 2024

엄마 간병기 3

"중환자실 있을 때가 편하다."

이 말은 2003년 11월 어느 날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이모부가 내게 했던 말이다.

이모부는 아마도 엄마가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면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아시니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 2번 더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가 차라리 편하지.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하루 면회 두 번. 오전오후

나는 담임선생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다.

교무실을 떠날 때 주섬주섬 3만 원을 꺼내 쥐어주던 담임선생님.


엄마는 어느 날은 의식이 없는 듯 잠만 잤고 어느 날은 눈을 뜨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모두 밀린 엄마의 낯선 모습. 그 옆에서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쭈그려 울던 나.

어느 날 큰어머니가 병문안을 와 엄마와 대화를 나눈다.

엄마는 "애들 밥 해주러 일어나야죠"라고 말한다. 나는 아주 잠시 안도한다.

엄마는 병원 밖에 모든 걸 내려놓고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그리고 엄마가 짊어지던 모든 것은 이제 내 몫이 되었다.

19살의 나. 이제 수능 시험을 막 끝내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싶었던 나. 어느 시트콤처럼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꿈꾸고 있던 나.

우선 보험의 문제.

엄마는 미련하게 집 나간 아버지의 보험비는 계속 납부하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의 보험비는 세 달 전부터 납부를 하지 않았다. 이모의 친구인 설계사가 어떻게든 도움을 준다고 했으나 만약 두 달 전부터 보험금을 납부하지 않았으면 진단금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게 세 달 전부터 납부하지 않아 진단금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분명 엄마의 잘못인데 나는 보험 회사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병원비의 문제.

우리 가족. 그러니까 엄마와 나와 내 동생. 그때 가진 돈을 다 합치면 얼마가 있었을까? 가진 재산을 다 털어봐야 5만 원도 안 되지 않았을까? 그때 살던 집도 재개발 예정인 아파트로 무보증금에 월세 10만 원짜리였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아주 다행히 외삼촌과 이모부, 외가 친척들이 부담을 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 당연히 간병은 내 몫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진로 문제.

나는 솔직히 수능 시험을 괜찮게 봤다. 당시 기준으로 서울 중위권 대학이나 수도권 상위 대학은 갈 수 있을 정도였다. 고3 수험생활 동안 수험서 몇 권과 교과서만으로 나름대로 이뤄낸 쾌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당장에 원서비조차 없었다. 내 기억에 한 학교당 8만 원 정도였는데 세 학교를 지망하면 24만 원이다. 그래 그 원서비, 원서비조차 나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친척들 중 누구 하나 내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없었다. 솔직히 다들 각자 살기 바빴다. 사실 자기 자식이어도 대학 진학 문제는 어려운 문제인데 '남'의 자식 대학 진학 문제를 누가 신경을 썼을까? 아주 잠깐 친척들을 원망해 본다. 그러다 사실 원망해야 될 사람은 무책임한 아버지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저런 고민들 속에서 중환자실 면회를 며칠인가 오가던 사이 갑자기 엄마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나한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마비환자의 간병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내 기억들, 그때의 감정들도 많이 무뎌졌다.

따뜻했던 기억도 물론 있지만 차가웠던 기억이 훨씬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선 엄마는 당시 콧줄로 식사를 했고 기저귀를 착용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명칭을 알게 된 '섬망' 증상도 있었다.


엄마의 말들은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밥을 달라고 국밥이 먹고 싶다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그런 것들.

엄마가 콧줄로 식사할 때 나는 거의 굶었다. 간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 지도 당연히 몰랐다. 아마 보호자 식사를 따로 신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비도 간신히 해결해야 되는 입장에서 친척 누구한테 보호자 식사를 신청해 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난 그 상황에서도 최소한으로 구질구질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들, 보호자들이 남은 밥과 반찬들을 같이 먹자고 했었다. 고등학생이, 꼬질꼬질한 고등학생이 편마비 엄마를 간병하면서 밥도 못 먹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나는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알려주는 방법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남은 밥은 일회용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얼렸다가 먹을 때 햇반 그릇에 올려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그리고 남은 반찬들은 반찬통에 담아다 식사 때 먹는다.

그때 엄마는 콧줄 식사를 짧은 기간 했었다. 그래서 식사만큼은 이른 때부터 같이 할 수 있었다.


그다음 문제는 대소변의 문제.

엄마는 기저귀에 용변을 보는 걸 거부했다. 불편했겠지. 왼편이 전부 마비 됐으니 화장실은 당연히 갈 수 없었고 대소변 통을 엄마 엉덩이 밑에 넣은 다음 대소변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병원 침실마다 커튼이 달려 있어 무언가 가려야 할 때는 바로 가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복도에 세워져 있는 'ㄱ'자 모양의 바퀴 달린 커튼을 끌고 와서 가려야 했다. 그것도 엄마는 가운데 침실에 있으니 2개를 가져와야 한다.

그런데 냄새는? 주변 환자, 보호자, 문병객들은 그 상황이 불쾌했겠지만 대놓고 내색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악의가 없었겠지만 그 순진무구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똥냄새"라는 단어는 나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게 만들었고 가려진 커튼 안에서 이 상황이 그저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대소변을 받을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죽어가는 듯한 느낌, 아니 내 안에 무언가 죽여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희망차게 엄마를 간병했는가? 그때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는가?

아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으로. 엄마가 정상적일 때로.

하루가 지나면 이틀 전으로, 열흘이 지나면 열하루 전으로. 그때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그때로 돌아가면 마음이 편할 텐데.

분노의 감정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열심히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꼴이 되었을까? 아 세상은 열심히 착하게 살 필요가 전혀 없구나.


나는 적은 돈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도 잘 봤는데 왜 공부도 안 하고 수능도 못 본 내 동창들은 편하게 대학을 가는가? 아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구나. 개 같은 세상.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수없이 반복되었고 엄마의 모습에 매 순간 무기력했다.

몸 왼쪽 전부가 마비된 엄마. 그래서 웃을 때도 오른쪽 입꼬리는 올라가는데 왼쪽 입꼬리는 그대로인 기묘하게 웃는 엄마. 언제 마비가 풀리고 움직이게 될지, 그래서 더 이상 침실에서 대소변을 안 받아도 될지, 그 똥, 그 냄새가 언제쯤 사라질지 아무것도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엄마는 환자였고 나는 환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엄마는 회복 중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이전 02화 엄마 간병기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