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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우 Feb 28. 2024

엄마 간병기 2

2003년 11월 22일 토요일


이 날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외우기 쉬운 날짜기도 하지만.

당시 나는 막 수능 시험을 끝내고 형식적으로 학교에 등하교하던 때였다. 수능 시험을 끝낸 여느 고3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하길 엄마가 바랐다는 점이다. 나도 그 점에 대해, 집에 돈이 별로 없다는 점에 대해 알고 있어 집 근처 주유소에서 시급 5천 원을 받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아르바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기억이 난다. 아침 9시까지 등교하기 전 잠시 TV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연예인이 이런 말을 했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나는 이 말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고 기억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의 일이다.

당시 엄마는 조그만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까지 졸업한 엄마는 별다른 기술도 없어서 월급 60, 70만 원 하던 그저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다음 집에 와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나는 아마도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을 테고 여동생은 엄마에게 바지를 사달라고 했다가 돈이 없다는 엄마 말에 토라져 이불속에 파묻혀 있었던 거 같다.

아마도 오후 3시 50분쯤

엄마가 외투를 챙겨 입고 현관문을 나선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엄마를 붙잡고 어디 가냐고 묻자 엄마는 오후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면 5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며 일하러 간다고 말한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 "5만 원 벌러 나갔다가 5백만 원 버릴 수도 있어"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정상적인 모습. 처음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 '정상'적인 엄마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온갖 빚더미를 남기고 도망가버린 아버지. 엄마 이름으로 카드까지 만들어 수천만 원 빚을 남기고 어디로 가버린지도 모르게 도망가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의 빚쟁이들 전화에 시달리던 엄마. 애들은 키워야 되지 않냐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자기는 써본 적도 없는 돈을 빌렸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사정사정하던 엄마.

아침 5시에 일어나 애들 밥을 챙겨주고 출근해 저녁 9시에 퇴근하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본다며 TV 앞에 누웠다가 이내 피곤에 지쳐 코 골며 잠들었던 엄마. 그렇게 열심히 일해봐야 고작 70만 원밖에 벌지 못 했던 엄마.

앞 윗니 몇 개가 흔들려 뺀 다음 치료를 해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흔들리는 이를 달고 다니던 엄마.

혈압이 높아서 고혈압 약을 먹어야 되는데 약 값이 비싸다고 생각해 안 먹고 있던 엄마.

나는 당시 그런 엄마를 보며 분명 건강이 정상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거 같다.

그 현관문에서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 주 생활비가 없어."

그때 내가 엄마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 나도 돈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었다.

만약 그때 엄마를 붙잡았으면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지 않았을까? 아니 아마도 엄마는 언젠가 쓰러졌을 것이다.

엄마의 마지막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던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먹먹한 심정으로 엄마를 보내고 나는 무엇을 했을까.


그리고 오후 4시 10분

액정 화면이 고장 난 폴더폰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낯선 남자가 엄마의 이름을 말하고 지금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차로 병원에 가고 있다는 말을 했다.

엄마의 이름은 처음 들으면 남자 이름 같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남자로 곧잘 오해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 잘 못 온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낯선 남자는 엄마가 길을 걷는데 비틀거리다 쓰러져 깨웠고 엄마가 내 전화번호를 불러줬다고 대답했다.

이런 통화를 할 때가 오후 4시 10분.

내 방 책상에 놓여 있는 부엉이 모양 탁상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4시 10분쯤을 가리킨다. 나는 그날 이후로 4시 1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볼 때면 마치 그날 그 시간 내 방에 서서 엄마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을 때의 느낌을 받고는 한다. 그 뒤로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았지만 매일 반복되는 그 시간 속에서 묘한 느낌은 반복된다.

엄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닐까? 엄마 이름이 남자 같으니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확인은 해 봐야 된다. 나는 동생을 불러 전화 내용을 설명하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돈이 없었다. 다행히 동생한테 5천 원이 있었다. 택시비로는 부족하지만 버스를 탈 수 있을 거 같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엄마가 길바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나와 내 동생.

토요일 오후는 차가 심하게 막혀 있었고 우리가 기다리는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때는 버스 도착 예정을 알려주는 시스템 같은 것도 없었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나와 동생은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에게 병원 이름을 말하고 돈이 없으니 5천 원어치만 가달라고 말했다.

택시에 타서 액정이 고장 난 휴대폰으로 외우고 있던 이모의 전화번호로 전화해 엄마의 소식을 전한다. 엄마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다가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는 말. 그리고 친가 쪽에도 전화해 같은 말을 전한다.

그때 택시기사가 내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5천 원이 훨씬 넘는 금액이 나왔지만 병원 주차장까지 나와 내 동생을 실어다 준다. 나는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택시기사도, 엄마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신고해 준 낯선 사람도. 사실 우리 모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경찰 2명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준다. 엄마가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고 갔는데 구급차를 기다리기 어려워 경찰차로 병원에 이송했다는 말. 몇 살냐고 묻는 말. 학교가 어디냐는 말. 자기도 그 학교를 나왔다는 말. 어른들한테는 연락했냐는 말. 그런 말들.

고마워할 새도 없이 나는 돈 문제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경찰에게 돈을 줘야 되는 줄 알았는데 경찰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응급실 안에서 한 사람만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곳에 누워 있는 엄마. 자는 듯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엄마.

그렇게 엄마를 확인하기 전까지 우리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었는데 결국 우리 엄마였다. 혹시나 비슷한 다른 사람일까 하는 생각에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지만 우리 엄마다.

엄마를 흔들어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오른쪽 다리를 꼬집었는데 움찔한다. 그리고 왼쪽 다리를 꼬집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조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오른쪽 뇌에 출혈이 왔고 신체 왼편이 전부 마비가 된 상태였다.

그 응급실 한편에는 엄마의 물건이 담긴 커다란 비닐봉지가 있었다. 엄마의 옷, 소지품들.

나는 엄마의 물건들이 담긴 비닐봉지에서 내용물들을 확인해 본다. 대변 냄새가 나는 옷들. 조그마한 손거울. 고무줄 몇 개. 십 원짜리 몇 개. 백 원짜리 몇 개. 천 원짜리 하나도 없던 엄마.


엄마는 대체 뭘 위해 살고 있던 걸까? 나와 내 동생을 위해서 살았을까? 진작에 나나 동생이나 아버지나 빚이나 그런 것들 다 던져 버리고 혼자만을 위해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아니 그랬으면 이렇게 쓰러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담당 의사가 엄마의 출혈량이 커서 시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고 머리 양쪽에 구멍을 뚫어 피를 빼내는 시술. 의사는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고 강조해 말한다. 당시 나는 미성년자라 이 시술에 동의할 수 없었고 이모와 함께 온 이모부가 대신 동의하는 서명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까운 곳에 이모와 이모부가 사는 것이 다행이고 엄마와 이모 사이가 괜찮은 것도 다행이다. 그런데 이모부는 무슨 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그 1년 전 이모가 뇌경색으로 먼저 쓰러졌을 때 엄마가 간병을 했었던 걸 고맙게 생각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가 시술을 하는 동안 내 연락을 받고 친구가 왔다. 가까운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친구를 만나 병원 밖에서 나는 정말 대성통곡을 했던 거 같다. 엄마가 너무 불쌍했고 이 상황을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날 후로도 한참 나는 참 많은 눈물을 흘렸던 거 같다.

다음 날 새벽 4시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엄마는 시술을 무사히 끝내고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고 머리 양쪽에 호스를 꽂고 있던 엄마. 머리카락이 없는 엄마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엄마. 엄마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나는 엄마의 물건들을 챙겨 동생과 이모부의 차에 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이모가 이런 말을 한다. 엄마가 가려고 했던 설거지 아르바이트는 자기가 소개해줬다고.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이모. 엄마는 설거지 아르바이트 가지 않았어도 언젠간 쓰러졌을 거예요.

아마도 나는 이모에게 이렇게 대답했던 거 같다.

그래 엄마 인생은 언젠간 어떤 식으로든 쓰러질 인생이었다.

엄마도 그걸 알았을까? 그걸 알고 바랐을까?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쓰러져 죽겠구나라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버틴 걸까?

나는 어쩌면 엄마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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