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2)
2003년 12월 초
엄마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활이 시작되었다.
그때 엄마의 의식 상태는 어땠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뇌출혈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었다. 엄마는 그때 자신의 처치, 자식들의 처치를 알고 있었을까. 지금도 이따금 그때 엄마가 병실 침대에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거리던 옆모습이 떠오른다. 슬플까. 우울할까. 아니면 아무 감정도 없을까. 아주 가끔씩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싶다는 듯 가슴을 들썩거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마치 우는 사람의 모습을 했었다. 그러나 그뿐 엄마의 눈물을 본 적은 없었다.
엄마는 신체 왼쪽 편이 마비 상태였지만 오른쪽은 정상에 가까웠다. 어느 새벽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편 낙상방지 난간을 붙잡고 돌아누워 보호자 침대에 있던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람쥐"라고 말한다. 실없이 웃었던 나. 다시 엄마는 침대에 반듯이 누워 오른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린다. 마치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듯. 그 모습. 천장을 바라보던 엄마의 눈동자. 내가 엄마한테 무한한 연민을 느끼는 그런 모습들.
엄마의 재활치료는 병원 근처 의료기상사에서 휠체어를 빌리는데서 시작됐다. 지금은 대학병원 각층마다 비치된 휠체어들이 넘쳐나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됐지만 당시에는 한정된 용도로만 쓸 수 있었고 재활치료실에 가려면 휠체어를 대여해야 했다. 얼마였지. 한 달에 10만 원쯤이었나.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다음 엄마를 휠체어에 옮기는 일.
엄마는 당시 80kg이 넘는 비만 체형이었다. 요령도 없는 내가 혼자 옮길 수 없어서 휠체어에 옮겨 태우려면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었다. 그 다소 귀찮아하던 표정을 짓던 간호사들. 도움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여자 간호사들이 시트째 엄마를 휠체어에 옮겨 보려 한다. 역부족. 같은 병실에 있던 남자 보호자 한 분이 거들어 간신히 엄마를 휠체어에 옮겨 태웠다. 그리고 그 사이 병원복 상의 단추가 풀려 삐져나온 엄마의 젖가슴. 나는 황급히 엄마의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재활치료실의 기억은 차갑다. 하필이면 지하에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치 바람 빠진 공처럼 머리 한 편이 움푹 들어간 환자가 있었고,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 간병인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던 환자도 있었다. 또 멍한 표정으로 항상 전기를 받고 있었던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환자도 있었다. 엄마는 경사침대와 전기 치료, 마사지를 받았다. 그때 엄마는 낯선 아픈 사람들 틈에서 역시 낯선 사람처럼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항상 전기 치료를 받던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환자가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재활치료실로 멀쑥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이 그 여자 환자 곁에서 이런저런 말을 걸고 있었다. 그때 그 여자 환자의 얼굴이 환해짐을 어렴풋이 봤었던 거 같다. 재활치료실에 있던 간병인들의 얘기를 주워듣자면 그 여자 환자와 남자는 결혼할 사이였는데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었고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는 것이다. 그 둘은 그 뒤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내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남자는 끝까지 여자를 책임졌을까?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여자의 남은 인생을 책임지기로 했을까? 아니면 몇 번 더 병원에 찾아왔다가 이내 발길을 끊었을까? 여자 쪽에서 오히려 만류하지는 않았을까? 어차피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남자를 비난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이런 식의 나와 상관없는 생각들을 했었다. 그 뒤의 일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엄마는 나를 선택했을까? 또 나는 엄마를 선택했을까? 우리 둘 다 서로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의 선택은 무엇이었고 나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엄마는 20대 중반에 어디서 등신 같은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와 결혼한 건 엄마의 선택이고 나를 낳은 것도 엄마의 선택이다. 그 선택의 책임은 엄마에게 있다. 원망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나는 뭘 선택했을까. 나는 등신 같은 아버지도 아픈 엄마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 책임도 피해도 고스란히 받아야 하다니.
반대로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엄마도 나도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어도 과연 서로를 선택했을까?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 속의 질문은 결론이 없지 때문에 매혹적이다.
어쨌든 나는 간병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고 엄마도 그 상황에 순응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점점 지쳐갔고 내 무의식에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 분노, 우울, 피해의식, 열등감, 그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쌓이고 있었지만.
그러던 중 이제 병원을 옮겨야 할 때가 됐다. 젊은 의사가 나를 복도로 불러 세워 놓고 퇴원할 것을 얘기한다.
그때 나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엄마가 퇴원해야 된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 신경외과적인 치료는 끝났으니 재활치료에 전념해야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당시에 나는 다 낫지도 않은 환자에게 퇴원을 요구하는 병원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병원 복도에서 퇴원, 전원을 요구하던 안경 쓴 젊은 의사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듣고 있던 나의 모습, 그런 단편적인 장면이 차갑게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제 나는 엄마가 옮겨가야 할 병원을 알아봐야 된다. 어디로?
그때 내 친구들은 어느 대학에 지원할지 고민하고 있었겠지. 아니면 남아도는 시간에 어디로 놀러 갈지 고민하고 있었겠지.
나는 동네 여기저기 엄마가 옮겨가야 할 병원을 알아보았다. 그러다 당시 엄마 옆 침상에 입원했던 환자 분이 병원 한 곳을 추천해 주었다. 한방, 양방 다 하는 괜찮은 곳이라면서. 그때 나는 엄마를 어디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지 몰랐다. 그때 재활병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누가 그런 말을 해줬다면, 아니 내가 더 똑똑하고 더 바지런해서 그때 엄마 상태에서 어느 병원으로 가야 되는지 사람들에게 묻고 따져봤었다면, 그랬다면 엄마의 재활이 더 잘 되지 않았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 옆 침상에 입원했던 환자가 추천해 줬던 병원은 사실 거의 요양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병원으로 옮겼던 내 결정이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