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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끝내 봄에게 사랑받았을까

시린 봄을 맞이해

by 선화

시린 봄이 찾아왔다.


겨울바람의 송곳이 아직은 무뎌지지 않은 듯, 살갗을 베어낸다. 그럼에도 벚꽃은 피어난다. 허망할 만큼 성실하게, 절기의 순서를 기억한 유일한 존재처럼, 무심히 자신을 연다.


벚꽃의 덧없음을 동경했다. 피고 싶은 순간, 생의 가장 정점에서 터지는 눈부심을, 지고 싶은 순간엔 미련 한 점 없이 부서지는 쓸쓸한 자유를. 나는 그 모든 것을 한 송이 꽃에서 배웠다.


햇살이 너무 투명한 날엔, 그림자조차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듯 희미해지고, 그 사이를 유영하는 꽃잎들은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헤매는 영혼처럼 아련하다.


사랑이란 얼마나 연약한 증거에 의존하는 환상인가. 사랑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환상, 기억 속에 잠시 피었다 지는 잔상이다. 이 감정은 정말 실재하는가. 부유하는 꽃잎과도 같은 가벼운 기억 속에서 피어난 허깨비에 불과하지 않나. 나는 멍청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그 연약한 흔적에 목숨을 걸 듯, 우리는 오늘도 사랑을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벚꽃을 사랑하는가. 흘러가는 사랑을 사랑하는가?


봄날의 잔인한 환영처럼 어김없이 피어나서는 덧없이 지고 마는 그 연약한 꽃을 말이다. 수줍은 듯 피어나다가, 다 알 수 없는 비밀을 지닌 채 무너져 내리는 꽃잎의 몸부림을, 나는 여전히 앓고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그 덧없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흔하고, 가볍고, 결국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 연약한 것에 매달리는 부끄러운 의식. 나는 그것에 목숨을 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감금당하고 싶은, 아름답고도 잔인한 욕망을 품고.


그 욕망은 밤사이 손끝에 묻어난 희미한 꽃향기 같은 자명한 운명이다. 우연인 척 다가와 필연처럼 남아버린, 떨쳐낼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벚꽃잎처럼 흩어져 얽매이는 것, 그것이 곧 사랑받는다는 서글픈 증거다. 살아있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기억에 간절히 피어나고 싶은 희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한다. 기억의 망명자를 자처한다.


꽃잎 하나가 바람결에 흩날릴 때마다, 심장 한 귀퉁이를 떼어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떨어지는 꽃은 죽은 사랑의 비명이다. 누구의 기억에도 얽매이지 못한 채 지는 꽃잎은 얼마나 쓸쓸한가. 그렇게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은 슬픔뿐이라는 듯, 우리 삶 역시 필연적으로 망가지고야 마는 기억의 잔해 위에 서 있다.


가끔은 연약한 바람에도 쉽게 휘날릴 벚꽃만큼 가벼운 사랑에 실망하고 만다. 그 사랑은 언제나 미숙하고, 철없으며, 끝끝내 비겁하다. 잡으려 손을 뻗으면 어김없이 사라지는 벚꽃의 꽃잎처럼, 내 손안에 들어왔다고 믿는 순간 이미 바람에 흩어지고 없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이토록 어리석고도 잔혹한 죄다.


그럼에도 그 꽃 같은 사랑을, 나는 놓지 못한다. 너무 흔해서 하찮아진 그것에, 부끄러울 만큼 집착하며, 간절히 매달린다. 채워지지 못한 욕망은 삶의 한 방식이 되고, 그 결핍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모자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 의탁해 겨우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벚꽃을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랑은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그 연약하고 비겁한 증거를 붙잡기 위해 나는 늘 미성숙하게 서성인다.


꽃비가 내려, 미분(微粉)이 가득 퍼진 봄날의 폐허를, 핏줄 터진 눈으로 내려다보며, 심장을 쥐어뜯고 바람 속에서 춤추는 광대처럼, 흩어진 꽃잎의 잔해를 삼키며 살아간다. 끝내 돌아갈 수 없는 벚나무 아래, 절망을 가장 달콤한 입맞춤이라 믿으면서.


올해의 꽃장마가 완전히 그치고 나면, 나는 과연 어떤 얼굴로 기억될까. 어떤 잔상으로 잊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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