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는 온데간데가 없이, 흙바닥엔 연약한 솜털처럼 솟아오른 연둣빛 잎들이, 마치 무언가를 막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바람은, 오래전 잊힌 이름을 부르듯 귓가를 스치며 지나가더군요. 그 감촉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익숙함이 묻어있습니다.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지금 제 마음이 어떤 계절을 거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의 끝자락, 마지막 서릿발이 남긴 냉기를 밟고 있는 건지, 아니면 봄날이 들떠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 속에 기대고 있는 건지.
어쩌면 장마철 새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방 안에선 침묵이 젖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짐은 싸여 있지 않은 그런 시간이 이어집니다.
어딘가, 낭만은 박제된 말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껍데기만이 남아 그 허울 같은 낭만만을 향유하는 시대만이 남아있습니다. 시는 허영으로, 편지는 번거로움으로, 기다림은 무능함이 되어버렸습니다.
추구하던 삶이란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아아 그래서 사람들은 낭만을 박제해 가나 봅니다. 곁에 두고, 바라보고,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나 봅니다. 애틋한 존엄입니다.
그 허울조차 지킬 수 없게 되면 인간은 그냥 기능만 남는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망상처럼 보이는 감정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