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게 되면 좋든 싫든 타인과 섞이고 어울려야 한다. 그것도 적당히 섞이고, 적당히 어울려야 한다. 나는 엄마 외의 인간관계를 가져본 일 없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엄마이고 엄마는 나였지만 친구는 내가 아니었고 나도 친구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다.
우리 엄마가 너랑 친구 하지 말래.
왜?
너, 아빠 없잖아.
친구를 사귀는 데에 아빠가 필요한 줄은 몰랐다. 나는 그것 말고도 모르는 게 아주 많았기 때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그 애와 술래잡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철봉 아래서 동전을 주워 학교 앞 문방구 앞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오락도 했다. 친구가 아니어도 놀이는 함께할 수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때의 삶은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니 영 모를 노릇이다. 너, 아빠 없잖아. 너, 너 아빠 없잖아. 그 말을 하던 그 애의 표정, 눈썹의 각도, 여름날 쿰쿰하던 공기의 냄새, 내 왼쪽 목덜미를 타고 간지럽게 흐르던 땀 한 방울, 그 애 등 뒤로 흘러가던 시린 구름의 모양과 저 멀리 비치던 사람들의 뒤통수 색깔까지도 왜 여태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는.
나는 영특하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엄마가 폐지 틈에서 주워 온 한글판을 가지고 스스로 한글을 깨치고, 다른 아이들이 집안 가득 전집을 채울 때 엄마 친구가 선물로 들고 왔던 유아용 동화책을 읽다 못해 줄줄줄 읊어내던 그런 아이. 엄마는 낡은 패션 잡지를 들고 글자를 읽어내는 어린 나를 안고 비싼 사립 고등학교에 지원하게 되면 학비를 어떻게 감당할지를 고민하곤 했다. 나는 사립 고등학교에는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이렇게 곤란하게 할 일이라면, 그것은 나쁜 일일 테니까. 내 나이 다섯 살의 나날이었다.
너는 알아서 컸어.
엄마는 내 기억이 시작되는 어릴 때부터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너는 알아서 컸어. 너는 이유식 시작할 때부터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고, 한글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혼자서 깨우쳤어.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공부를 잘했고, 어미 도움 없이 스스로 제 밥벌이도 했어. 너는 정말 손이 안 가는 애였어. 너는, 귀한 내새끼, 너는 엄마를 살렸어.
나도 한때는 내가 알아서 큰 줄로 알았을 만큼, 엄마는 종종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나 그랬을 리가 없다. 엄마는 나를 골고루 먹이려 일을 다니면서도 부지런히 쌀을 갈고 채소를 다져 정성껏 끓여 내 입에 넣었고, 더러운 폐지 무덤을 지나치지 못하고 엄마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한글판을 주웠다. 글이나 겨우 깨우친 나를 두고 비싼 학비를 어떻게 벌어낼지 고민했고, 사회에 나가 풍파를 맞기 시작했을 나를 위해 없는 종교를 가지고서도 간절히 기도를 했다. 제 가련한 새끼 도마뱀이 상처 입지 않기를, 저 얇은 거죽에 흠이 나지 않기를.
나는 정말이지 어려서부터 아주 영특한 아이였다. 그래서 엄마는 팔순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내 비늘이 단 한 번의 흠집도 없는 줄로 알고 떠날 수 있었다. 엄마는 바보였다. 엄마가 낳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도마뱀이었다. 나는 어느 한 구석이 조금 찢어져도 조금 고통스러워하며 기다리면 탈피하고 깨끗해질 수 있었다. 이따금 아득한 통증에 시달리고는 했지만 겉껍데기만 한 겹 벗겨내면 나는 한 번도 다쳐본 적이 없는 것처럼 엄마 앞에 설 수 있었다. 엄마는 그것을 눈치챈 적이 없었다. 엄마는 정말로 바보였다. 나는 엄마가 바보여서 좋았다.
너, 아빠 없잖아.
나는 엄마가 바보여서 정말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