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100일 앞둔 날, 엄마가 큼지막한 분홍 리본이 묶인 상자를 들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현관을 들어섰다. 단 둘이 사는 집에서 서로가 서로를 맞아주지 않으면 아무도 반겨줄 이가 없기 때문에 들어오는 기척에는 무조건 마중을 나가는 것이 우리 집의 암묵적인 규칙이었으니 어차피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었을 내가 어련히 문으로 갈 것인데도 엄마는 그날, 내 이름 석 자를 크고 벅차게 불렀다. 그것도 두 번이나.
엄마 곁에는 은색 정장차림에 파란 타이를 한, 피부가 아주 까맣게 탄 아저씨가 서서 허벅지 바깥쪽에 연신 손을 비벼 닦고 있었다. 침입자인가 생각하기에 그는 엄마의 오른쪽 뒤에 거의 붙다시피 서있었다. 엄마가 그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지 않아 경계를 할까 말까, 찰나의 시선 교환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누구세요?
나는 내 입술 끝으로 '요'가 떨어지기도 전에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 알았다. 모르기에 그 아저씨는 너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사해. 그..., 네 아빠야.
아, 안녀엉.
많이 긴장한 듯한 아저씨의 모습에 나는 뜻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엄마는 아저씨를 허둥지둥 집 안으로 잡아끌었다. 아저씨는 벌벌거리는 입술과 달리 시선만은 나에게 단단히 고정한 채 신발을 겨우 벗고 들어섰다. 다행히 그날은 바로 전날 이불을 세탁해서 집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아저씨도 아마 우리 모자가 아빠 없는 시간을 마냥 고통 속에서 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 내 뒷목에 힘이 빳빳이 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가 냉큼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마주잡자 그렇게 바지에 문질렀는데도 축축한 손이 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두 번째 침묵을 깬 것도 나였다.
공부하러 들어갈 테니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아, 아들!
엄마가 돌아서려는 나에게 들고 있던 하얀 상자를 내밀었다. 쟈각, 상자 안에서 무언가 조그맣게 단단한 것들이 약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도화지 같이 하얀 상자에 쨍한 분홍 리본이 달린 것이 딱 여자에게 선물하기 좋게 생긴 것이라 나는 그것을 받지 않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이거, 이거 그... 아빠가.......
어험, 흠! 그게, 그, 네가 올해, 고삼이라고 들어서. 뉴스에서, 그, 오늘이 마침 수능, 거, 백일 전이라고, 나오길래....... 그, 별 건 아니고, 초콜릿인데.......
나를 꼭 닮은 아저씨의 두 손이 화살표가 되어 오른쪽을 향했다 왼쪽을 향했다 바지에 문질러졌다를 반복하기에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상자를 받아 들고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뒤돌아 닫은 문 뒤에서 뒤늦게 파이팅! 하는 엄마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어수선히 늘어진 것들을 대충 팔로 쓱쓱 밀어 두고 가운데에 상자를 올렸다. 심장이 귀 밑에 있는 듯 고막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펄떡펄떡 들렸다. 한숨보다 더 깊은 숨을 내쉬며 분홍빛 리본의 한쪽을 잡아당기고 걷어내니 단 것이라고는 당최 모르는 나도 알 법한 고급 브랜드의 로고가 보였다. 다시 초콜릿 상자를 여니 비닐과 종이가 겹겹으로 이루어진 완충재가 한 겹 더. 완충재까지 걷어내고 나서야 굵은 설탕이 위에 장식된 빛깔이 고운 초콜릿 열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색해서 그래요, 어색해서.
알지. 알지, 그럼. 괜찮아. 허허허, 미리 말을 좀 하고 올 것을.......
미안해요.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수미 씨는 미안할 것 하나도 없어.
뿌연 목소리가 왠지 아까보다 힘이 한껏 빠진 것 같아 변명이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엉덩이가 의자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게 아니었다면 아마도 곧바로 일어나 정말 그저 공부를 해야 해서 들어왔을 뿐이라고, 수능이 백일 남아서 그런 거지 갑자기 나타난 아저씨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본디 수능을 앞둔 고삼이란 그런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초콜릿이 녹아 엉덩이에 질펀히 묻기라도 했는지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초콜릿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나 좋아했던 것인데, 고급 초콜릿이어서일까, 몹시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얀 것, 진한 것, 더 진한 것 중 무얼 먼저 먹어볼까 고민하다가 가운데 것에 손이 닿았다. 손이 뜨끈했던지 초콜릿이 손끝에 묻어났다. 더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집었다. 어떻게 먹는 것일지 고민이 들 뻔했지만 곧바로 통째로 입에 넣고 어금니로 콱 씹었다.
아니, 난 딸인 줄 알구선...... 허허, 민망하네.
거실에서 남자의 멋쩍은 목소리에 희뿌옇게 따라붙는 엄마의 웃음소리가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