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 앞 조그만 방 한 칸에 혼자 살게 된 후 엄마는 아저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정확히는 내가 나온 집에 아저씨가 들어왔다. 이따금 한 번씩 집에 들르면 낯선 것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현관에 늘어져 있는 낯선 남자의 구두와 운동화, 테라스 문을 열기에 거슬리는 위치에 세워진 골프가방, 빨래걸이에 널려 있는 내 것이 아닌 남자의 속옷과 양말들. 그것들은 별로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괜찮았다.
심지어 거실에서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다 나를 보면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와, 왔니? 그... 밥은, 먹었니?" 한 마디 한 마디를 달달 떨며 건네는 아저씨의 말투도 나는 불편하지가 않았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러니까, 아저씨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아저씨는 항상 약간 하늘빛이 묻은 와이셔츠에 면으로 보이지만 두 다리에 각이 잡힌 바지를 입고 있었다. 늘상 정장 양말을 신고 있었으며 머리는 단정하게 오른쪽으로 빗어 넘겨 아주 얇은 주름이 둘 있는 넓은 이마를 드러내고 왼뺨의 보조개를 꾹꾹 눌러가며 웃었다. 그 보조개는 나도 가진 것이었고 나는 그 보조개가 실은 오른뺨에도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 보조개는, 양쪽으로 패여야 옳은 보조개였다.
아저씨는 뜬금없이 갈치를 발라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 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 밥그릇에 코를 박고 멋쩍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가 입은 옷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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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술을 마시고 읊조리듯 내뱉은 푸념에 연인은 웃음을 섞어 물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것을 설명해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어김없이 눈을 한 바퀴 데로록 굴리고 몇 번이고 혀를 내밀었다 집어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파충류로서의 충실한 고민 모션을 통해 나는 머릿속 가장 핵심적인 말을 찾아냈다.
남 같잖아.
내 말에 애인은 눈을 흘기며 웃었다. 어이구....... 그 애는 별말 없이 내 술잔을 채웠고 나는 그것을 입에 넣어 삼키지 않고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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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로 술을 마시면 평범하게 마시는 것에 비해 더 소량으로, 더 빠르게 취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술이 입 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구강을 통한 흡수가 많아지고, 식도나 장기에서 천천히 이동하게 되어 골고루 흡수되게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이었다. 해 보니 그랬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와, 빨리 흡수되고 싶었다. 우리는 그냥 마신 가족이 아니라 남들보다 천천히 만난 가족이니 더 빨리 더 많이 취하고 싶었다.
며칠 후 애인의 채근에 못 이겨 나는 트렁크 팬티 한 장을 샀다. 흔히 남자들이 집 안에서 한 장만 걸치고 다닌다는 유형의 그런, 파란색 체크무늬의 아주 무난하고 넉넉한 것으로. 고작 한 장을 샀을 뿐인데 무슨 쇼핑백이 이리도 큰지 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한 손에 덜렁 들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 엄마가 깜짝 놀라며 현관으로 마중을 나왔다.
연락하고 오지 그랬어! 집에 먹을 것 하나도 없는데.
잠깐 들른 거예요. 바로 가봐야 해요.
옆에서 아저씨가 어정쩡하게 일어나 웃으며 와, 왔니? 하며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까치가 집이라도 지은 듯 덤벙덤벙한 머리에 코 밑 거무스름한 수염 자국에 내가 고른 트렁크 팬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반바지, 목이 다 늘어나 명치까지 보일 듯한 반팔 티셔츠를 보고 나는 입에 힘을 주었다.
엄마, 이거.......
이게 웬 거야. 우리 아들, 뭘 이런 걸 사 왔어.
나는 현관에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고 엄마는 그 앞에 주저앉아 선물을 풀어헤쳤다. 우리 아들 다 키웠네, 벌써부터 뜬금없이 엄마 선물도 사 올 줄 알구......, 어머? 이거 남자 팬티 아니니? 엄마는 왠지 너절해보이는 파란 팬티를 손에 들고 나를 한 번, 아저씨를 한 번 보았다. 그런 엄마 옆에 쭈그린 채 숨어 앉아있던 아저씨는 엄마 손에 들린 파란 팬티를 한 번 보고 나를 보고, 다시 파란 팬티를 보고 나를 보았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입으시라고.
나는 곧바로 갈게요, 하고 문을 열고 도망치듯 집을 벗어났다.
...고맙다!
등진 아버지의 목소리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무래도, 취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