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군대에 다녀오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어 헛바람이 들고 헛물을 켜고 헛소리를 하는 게 문제라고 하던데 나는 영 그렇지 못했다. 성격이 무던한 편이어서일지 군생활은 힘들었지만 죽도록 힘든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사람을 잘 만나서이기 때문이겠지만, 겁을 지나치게 집어먹고 들어갔던 훈련소는 의외로 사람 사는 곳이었고, 따뜻하게 나를 안아줄 것으로 기대한 사회는 오히려 차갑고 냉정했다.
군생활도 견뎌냈으니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엔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자란 성체였다. 스스로 사냥을 해 먹이를 구해야 할 시기까지 딱 일 년이 남은, 25년 산 수컷 왕도마뱀.
여자가 2년 꼬박 기다려봤자 전역하고 반년이면 차인다던데.
전역하던 날 나를 데리러 부대 앞까지 은색 경차를 몰고 나타난 연인은 흥흥 콧노래를 부르다 말고 던지듯 말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눈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렸다.
복학하면 어리고 예쁜 새내기들이 오빠, 오빠 하며 쫓아다니고, 오랫동안 헌신한 애인은 결혼이라도 해서 그 세월 책임지라고 할까 봐 부담스러워진대.
애인은 내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던 듯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오른쪽 사이드미러에 내가 비쳤다. 그을리고 그을려 까맣게 탄 얼굴, 군인 치고는 나쁘지 않지만 그 티를 벗을 수 없는 까까머리, 그 밑으로 적당히 수납되어 있는 이목구비.
눈을 굴려 애인을 보았다. 운전하는 옆모습이 보인다. 평소보다는 짙지만 역시나 화장기 옅은 얼굴, 올망졸망한 눈코입이 붉은기 도는 피부 위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어여쁜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네가 제일 이뻐.
알아, 나도. 장난기 가득 묻은 그 음성에 마음이 뭉근해진다. 진짜라고 재차 말해주고 싶지만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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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받아 부모님이 계신 집에 방문할 때면 아버지는 꼭 목이 잔뜩 늘어난 흰 티셔츠에 내가 사드린 파란 트렁크 팬티를 입고 현관에 맨발로 나와 나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 몇 번이나 휴가를 나와 동기들이 '얘는 또 나왔어' 할 때도 아버지는 꼭 그렇게 했다. 파란 팬티에는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듯했다. 나는 파란 트렁크 팬티를 보면 스스럼없이 아버지를 마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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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그 마법이 걸린 팬티를 골라준 것은 애인이었다. 아버지께 드릴 트렁크 팬티를 사라고 채근한 것으로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저 애는 백화점까지 따라와서는 훈수를 두었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고른 검은 것이 훨씬 세련되고 좋아 보였는데도 애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편안한 실내복의 기본은 파란 체크 트렁크라고.
애초에 내 의지로 선물을 사려고 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곧장 애인이 고른 것으로 결정했다. 새 상품을 꺼내어 사이즈를 한 번 더 확인시켜 주는 점원에게 선물포장 예쁘게 해 주세요, 요청한 것도 애인이었다. 무슨 팬티 한 장 사면서 포장인지 한 마디를 보태고 싶었지만 나를 보며 환히 웃는 그 얼굴에, 접히는 눈꼬리에 말문이 막혔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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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을 앞두고 9박 10일 휴가를 나왔을 때에 아버지 팬티는 이제 파란색이 아니라 하늘색이 되었다. 낡아서 약간 거뭇거뭇 비쳐 보일 듯 얇은 팬티를 아버지는 그렇게도 입으셨다. 매번 입고 매번 나를 맞아주실 때마다 나는 애인의 눈꼬리를 떠올렸다. 선물 포장 해주세요. 예쁘게 해 주세요, 저희 아버지 드릴 거예요. 애교 섞인 그 애의 말꼬리가 눈주름을 타고 늘어졌다. 아마 그게 마법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예쁘게 해 주세요.
진짜야, 네가 제일 예뻐.
그 말을 기어코 참지 못했다. 애인의 웃음소리가 좁은 차 안에 향기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