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32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관람 시간이 지난 탓인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물론 위쪽으로 난 길도 조용했다. 검푸른 하늘에는 간간이 박힌 별들만 반짝일 뿐, 바람도 머물지 않고 제 길을 간다. 위쪽 길에서 보면 청동 기마상이 성당을 향해 서 있는데, 이에 대해 전해지는 얘기는 다음과 같다. 1201년 페루자 군대와 싸우기 위해 원정군에 참여한 프란체스코는 전쟁 도중 포로로 잡혀 이듬해 부친이 낸 보석금으로 풀려난다. 이후 그는 1205년 페루자 정복을 위한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고, 이 전쟁에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영적 체험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를 표현한 것으로 타고 있던 말도, 그 위의 그도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회개이며 순종이라 평을 달았다. 그 청동 기마상과 이만큼 떨어진 곳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꼼짝 않는 형체가 있어,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보았더니 어둠 속 검은 형체는 커다란 공벌레 같았다. '과연 어디까지일까' 곧추 세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아라가 툭- 건드리니, 몸을 둥글게 말기는커녕 그것이 벌떡 일어섰다.

"깜짝이야."

"그니까. 야심한 밤에 왜?"

대답 대신 그는 종이백을 건넸다. 들여다보니 와인과 쿠키 그리고 플라스틱 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훔쳤어요?"

"주셨어요. 인간사 give & take 아니냐며, 목 축이라고 수녀님께서."

"의사소통이 된다고? 거기 수녀님 하고? 에이 거짓말."

"내용물 확인하며 해석은 내가 덧붙였고. 그게 중요한가?"

"뭐 한 게 있다고."

"물꼬를 텄잖아. 내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해서 같이 마셔야겠어."

"핑계 한번 참 이뻐라."

입을 삐죽거리며 눈도 흘겼지만, 캄캄한 어둠 때문일까? 진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아무리 폐관했다 한들 성당 앞은 좀 그렇고, 어디가 좋을까?"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맘에 드는 곳을 찾았는지 아라는 휘적휘적 걸었고, 종이백을 옆구리에 끼고서 진호도 뒤를 따랐다.


"거기나 여기나."

"무슨. 어림잡아도 세 필지는 떨어졌구먼. 그냥 서 있는 고철 덩어리 같아도 주의 음성을 들은 후 그의 회개와 순종을 표현한 거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리 선데이 신자라도 그런 모습을 마주하고 대작할 만한 담력은 없어서. "

"되게 희한하다."

"난 되게 어색한데. 이것은 예수님의 피이며, 또 이것은 예수님의 살이라. 절기상 유월절은 아니지만. 무튼."

그냥 잠자코 있을 것을,, 아라가 어설피 인용한 성경구절은 어색함만 더욱 가중시켰다. 아라는 플라스틱 잔에 담긴 찰랑찰랑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내용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본디 과실주는 훅- 올라온다고."

"걱정 말아요. 내 발로 걸어갈 테니."

그러고는 다시금 술병을 기울이자, 진호는 대뜸 병을 뺏었다.

"작작 좀 해요. 네 발로 안 기어가려면."

이곳 포도 품종이 고약한 걸까? 별안간 목구멍이 따뜻해지더니 온기는 금세 관자놀이까지 타고 올라왔다. 고작 자판기 종이컵 사이즈 아니던가? 본디 포도주란 게 이런 취기 탓에 감질나게 홀짝거리는 건가? 눈꺼풀은 절로 끔벅여 눈동자를 수시로 가렸다. 간간이 박힌 별들은 띠를 이뤄 물결치는 듯했고, 검붉은 하늘의 표면은 굽이치는 듯했다. 내동 잠잠하던 청동 기마상이 들썩이는 것만 같았고 바라다본 진호의 얼굴은 동그랗기도, 갸름하기도 했다. 눈을 끔벅이고 손등으로 비벼도 보았지만 나아지기는커녕 퍼졌다 이내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그 흐릿한 형상에 두 개의 눈, 코 하나, 입 하나가 뚜렷이 박혀 있자, 아직은 멀쩡하다는 듯 아라는 배시시 웃었다.

"데려다줄 테니 일어나요."

부산스레 자리를 정리하며 진호는 연신 구시렁거렸다. 역동적인 그와는 달리 아라는 하늘을 보며 넋이라도 있고 없고를 한다.

"혼자 마시라고 가져온 거 아니라고."

꿈쩍 않는 아라로 인해, 손동작뿐 아니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에도 짜증이 배어 있었다.

"자작하면 삼 년간 재수 없다는 거 다 거짓말이야. 그럼 난 평생을 그래야 한다고. 설마, 여자가 따라주는 술만 넙죽 받는 그런 한량은 아닐 테지."

점점 취기가 오르는지 아라의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너울거렸다. 급한 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뚝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던 그는 휘청이는 아라로 인해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신속하게 후속 동작을 마친 그의 손이 이번에는 아라의 손목으로 향했다.

"손목은 안돼. 절대로."

손사래를 치며 꾸짖듯 아라는 엄히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려 손을 내밀었더니 손목은 잡지 말란다. 이 무슨 궤변인가? 머리채를 잡아 버릴까?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 취기는 짙어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자, 진호는 아라의 팔뚝을 거칠게 거머쥐고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마을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해서 다행인가? 아니 술 취한 이와 함께라면 오히려 오르막길이 능사일 듯, 제 몸하나 못 가누던 동기 녀석을 부축한 채로 학교 후문 경사길에서 데굴데굴 굴렀던 새내기 대면식 때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현저히 완만했지만 그럼에도 진호는 디딘 발에 힘을 가해 무겁게 발도장을 찍으며 방심하지 않았다. VIa S.Framcesco 길로 접어들었고 Convento Frati Minori Cappuccini 수도원 앞이었다. 이렇다 할 술주정은 없었다. Palazzo Bernabei 박물관을 지났다.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Palazzo Bernabei - Università di Perugia 대학교를 지나 숙소까지 대략 한 블록 남은 상황.. 순간, 아라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이에 진호는 섬찟 놀랐다.

"속 불편해요?"

"핸드폰을 두고 왔나 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는 아라를 빤히 보는 진호의 얼굴은 말한다. '가지가지한다.'라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아라는 왔던 길을 되짚었고, 어쩔 수 없는 그도 어기적어기적 뒤를 따랐다. 성당 건너편 잔디, 야트막한 돌난간, 그리고 모래바닥에도 좀 전보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흔들던 바람의 노래도, 서로를 간지럽히던 잔디의 속삭임도, 찌르르르- 벌레들의 합창도 없었다. 내쉬고 들이쉬는 그들의 숨소리도 버거운지 적막한 밤은 삼키지 못하고 이내 토해냈다. 숨바꼭질 놀이에 재미를 붙였는지 휴대폰은 꽁꽁 숨어버렸다. 안 되겠던지 땅에 코라도 박을 듯 아라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번쩍이는 빛이 고르게 뿜어져 나왔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별안간 떠오른 창세기의 내용을 복기한다. 술이 덜 깼나? 아라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등 뒤로 돌린 시선에 진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빛이 들어왔다. 엄지를 번쩍 올렸으나 그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설마 이곳 아닌 내려가던 중이었던가? 동선을 곱씹어 봤으나 취기가 아직인지 머릿속은 대답을 피했다. 그때였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귀에 익은 선율은 밤의 정적을 뚫고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원 제목은 'Sonata quasi una fantasia'로, 베토벤 사후 1832년 베를린의 음악평론가이자 시인이었던 루드비히 렐슈타프가 '제1악장의 분위기가 달빛이 비친 스위스 루체른 호수 위의 조각배 같다'라고 묘사한 데서 월광 소나타(Moonlight Sonata)로 알려지게 된 곡으로, 빈 교외 귀족의 집에서 본 달빛을 묘사한 것이라는,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줄리에타를 위한 곡이었다는,, 제기된 여러 작곡 배경에 대해 베토벤은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던 그의 청력 장애가 이 곡이 작곡된 1801년에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고 한다. 신체와 영혼의 피폐함에 그는 자살을 계획했고 그 당시 발견된 유서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해서 곡의 낭만성은 아름다운 서정을 묘사한 것이 아닌 자신이 처한 불행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도 다분하다. 제3악장으로 구성된 곡 중, 익히 알려진 제1악장은 Adagio sostenuto로 베토벤은 최대한 감성적으로 연주하라는 의미에서 소스테누토(sostenuto), 즉 음을 충분히 끌어서 연주하라는 지시를 붙여 놓았다. 달에서 비춰오는 빛이라는, 해서 고혹적인 낭만 혹은 편안함 보다는 C#단조 2/2박자의 느리게 연주되는 이 곡은 표출하지 못한 내면의 아픔과 고통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건 아마도 영화에서 보았던 베토벤의 연주 장면 때문일 테지.. 바람마저 머물지 않는 고요한 밤, 제 몸을 불사르는 휘영청 둥근달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묘했다. 휴대폰의 존재를 잠시 잊고 아라는 작곡가의 바람을 담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을 눌렀고, 그렇게 생긴 소리는 그녀의 입을 통해 나지막하게 새어 나왔다. 그러나 달의 빛도, 그에 새겨진 꽁꽁 싸맨 내면의 아픔도,, 퉁명스레 휴대폰을 건네는 진호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달빛이 살린 거야."

"오호~ 짱구가 좀 돌아가네요."

그가 건넨 휴대폰을 사뿐사뿐 흔들고는 저만치 떨어진 그의 숙소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데려다 줄게요."

"얼씨구."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어느새 뾰족한 창살을 내세운 철문 앞이었다.

"공연도, 뒤풀이도,, 어쨌거나 성공입니다."

"말은."

"들어가요. 내일 봐요."

별다른 말없이 그는 등을 돌렸다. 옆구리에는 포도주와 쿠기가 든 종이백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졌다. 그러자 아라도 등을 돌렸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출입문 옆 울퉁불퉁한 외벽에 몸을 기댔다. 띠를 이뤄 물결치는 것만 같던 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했다. 간간이 반짝이는 그 빛의 움직임을 막연히 따라갔다.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분명, 문이 열리는 기척도 없었는데 어느 틈엔가 그는 서 있었다. 빤히 그를 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City of stars
There's so much that I can't see


Who knows?
I felt it from the first embrace I shared with you


That now our dreams
They've finally come true


City of stars
Just one thing everybody wants
There in the bars
And through the smokescreen of the crowded restaurants


It's love
Yes, all we're looking for is love from someone else
A rush
A glance
A touch
A dance


A look in somebody's eyes
To light up the skies
To open the world and send it reeling


A voice that says, I'll be here
And you'll be alright


I don't care if I know
Just where I will go
'Cause all that I need is this crazy feeling
A rat-tat-tat of my heart


Think I want it to stay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City of stars


You never shined so brightly

- City Of Stars from La La Land-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였다. 술기운인 건지, 아니면 밤의 기운인 건지, 것도 아니면 마주 선 그에게 취한 건지.. 아라는, 그렇게 주정을 했다. 나지막한 소리는 가벼이 날지 못하고 이내 땅을 향해 달음박질해 하늘과 땅 그 사이에 한동안 머물렀다. 칠흑 같은 밤, 그로 인해 별의 움직임은 한층 도드라졌고 저만치 떨어진 성당, 저 멀리 있는 로카 마조레,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그들뿐이었다.

이전 09화[연재소설] moments_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