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38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가장 큰 요새라?"

로카 마조레의 뜻을 굳이 입에 올렸지만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아라의 관심을 돌리는데 실패했다.

"묶던가, 풀던가, 하나만 해요. 바람도 불어 가뜩이나 심란한데."

발아래 흙을 질질 끌며 말하는 진호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둘 다 하고 싶은데. 어떡하라고."

기도 안 찬다는 듯 진호가 입을 쩍 벌린 순간, 결국 일은 벌어졌다. 아라의 손끝에서 연신 놀아난 노란 고무줄이 저만큼 튕겨져 나갔다. 이에 고소하다는 듯 그는 목소리를 보탰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버럭 성질을 부릴 만도 한데 바라만 볼뿐 화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잠잠한 그 모습에 진호는 되레 겁을 집어먹었다.

"오늘은 풀은 머리가 이쁘네."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자칫 싸움으로 번질까 싶어 진호는 일보 후퇴를 선택했으나, 그의 의중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에코백을 뒤적거리더니 좀 전의 것과 같은 노란 고무줄을 손목에 걸며 아라는 입을 열었다.

"고무줄은 소모품이에요. 쉬이 닳고 사라지기에 늘 여분을 준비하지요."

"그렇다 치고."

더해봤자 말장난일 터, 진호는 그 싹을 싹둑 잘랐다.

"손목 아니면 머리던데? 장신구인가?"

"하다 보니 일상이 되었다는."

손목에 있던 고무줄로 머리를 묶더니 다시 풀었다. 갈 때는 혼자였던 고무줄은 올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한 올과 함께였다.

"거 봐요."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딱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머리카락 하나 떨어 뜨리는 거야. 그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떨어져서 이 바늘 위에 딱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엄청난 확률로 지구상, 하고 많은 나라, 그중 아시시, 그것도 모자라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된 겁니다."

머리카락을 날리며 아라는 읊조렸다. 종교까지 들먹여가며 본 적 없다고 딱 잡아떼지 않았던가? 분명, 영화 속의 대사였다. 물론 밀씨와 머리카락이 뒤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명백한 그녀의 거짓말이었다. 이에 진호의 추궁이 이어졌다.

"본 적 없다며?"

"들었어요. 예전 직장 동료의 작업 멘트. 공룡상이 이상형이라 수없이 말을 했는데도, 정작 내 얘기는 귓등으로 들었다는 거니."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대며 진호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로 인해 더 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로카 마조레에서 시작된 그의 웃음소리는 바람이 지나는 길을 따라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밤은 아직이지만 장소가 적절치 않네요."

DEL GIGLIO 수녀원, 밤의 한가운데 그들이 있었다. 아라가 꺼낸 뜻 모를 얘기에 진호는 갸우뚱했다.

"할 말이 남았다거나, 하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이니까. 그 할 말도, 하고 싶은 것도 당최 모르겠으니 속 시원히 얘기해요."

곧추 세워 바닥을 연신 쪼아대는 그의 발끝을 가리키며 아라는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호가 입을 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 2번, 내 휴대폰 벨소리.."

달밤에 체조만큼이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뭉그적 꺼내 놓은 속마음을 스스로 짓이기는 그를 단박에 거절하기에는 제법 여운이 남을 듯한 밤의 짙은 기운이었다.

"할 말은 들었고, 하고 싶은 것도? 처음이나 어려운 거지."

아라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이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를 얼마, 진호 역시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손끝이 맞닿을 찰나, 아라는 그의 손등을 맵게 때렸다.

"과부 심정 과부가 안다고."

"예를 들어도 참."

"새벽 기도 주간이라 잠자리에 드셨겠지만 소리로, 너울거리는 형체로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의외로 잠귀가 밝으시더라."

"나한테만 야박하지."

"조심히 가요."

몸을 틀어 출입문 앞까지 간 아라가 등을 돌린 순간, 밤의 하늘색 같던 진호의 얼굴에 돌연 빛이 돌았다.

"못다 한 춤은 신데렐라랑 추고, 12시까지면 충분할 테지."

눈을 찡긋 하고는 서둘러 수녀원 안으로 사라졌다. 쿵- 하고 닫힌 육중한 나무문을 노려보는 진호의 얼굴은 좀 전의 먹빛으로 변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만큼 지났으면 사라졌겠지? 하는 마음에 한동안 문에 기댔던 몸을 추슬렀다. 호기롭게 말을 쏟았지만 정작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곧장 방으로 향하지 못했다. 빼꼼히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진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눈은 어디쯤인지도 모를 그를 좇았고, 하나뿐인 마음은 그에게로 향했다. 몸과 마음은 그렇게 분리되어 쫓고 또 붙잡았으나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후- 짧은 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나지막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고아라."

놀란 흔적을 지울 새도 없이 아라는 진호와 마주 섰다.

"당신 대답에 내 행동이 결정될 테니, 신중히 답하길."

걸음 하나, 또 하나를 내딛으며 진호는 거리를 좁혀왔다. 여차하면 발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이르렀다. 놓인 처지나 상황도, 먹색의 하늘도, 별도 달도 심지어 공기마저도 편을 들며 그의 등 뒤로 숨었다.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전과는 달리 보였다. 거리로나, 분위기로나 더 이상 뒷걸음칠 곳은 없었고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아 울컥- 몸이 떨려 왔다.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양팔로 몸을 조이는 순간, 진호의 두 팔이 아라를 감쌌다. 등 뒤에 닿은 따듯한 그 손길에 떨림은 곧 잠잠해졌다.

"말이 없길래, 동의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는. 울고 싶으면 울어요. 내 앞에서는 그래도 돼."

진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아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참고 또 참아서인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울음을 다 토해낼 때까지 그는 그녀의 등을 쓸고 또 쓸었다.


물론,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치미가 웬 말이인가!!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아라의 이런 태도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진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은 좀 잤어요?"

"어제 일은 못 본 척 넘어가줘요."

없던 일로 하자는 그 말이?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어쨌거나 결론은 그녀였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진호는 이에 응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사고는 종종 예상치 못한 시공간에서 벌어진다. 결국,, 쟁여놓고 망설였던 그 말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몸에 문신이 많을수록 겁쟁이라는,, 당신이 그랬어. 겹겹이 방어막을 치고 그 안에 잔뜩 웅크리고 있지. 그걸 알면서도 조금씩 기우는 내 마음을 붙들어 볼 양에 노선 이탈하지 말라고 덧붙인 거야. 왜? 상대가 선을 그으면 그만큼 단념은 빨라지니까. 근데 섣부른 내 자만심이더라. 프란체스코 성인의 축일을 알면서도, 말도 안 되게 과자를 핑계 삼아 아시시를 택했어. 왜?? 그다음 상황은 도통 그려지질 않아서, 그렇게라도 보고 싶었던 걸까!! 매일 만나는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통계를 뒤집어 보았더니 희망이라는 게 생기더라. 없는 시간을 쪼개서 오는 거나, 시간 내서 부러 하는 거나, 결국 같은 말이랬지? 당신도 다르지 않던걸.. 안 해도 될 수고를 부러 할 때, 연민도 사랑의 다른 말이라는 걸 알기에 썩 내키지 않았지만 끄덕였어. 그런데 금세 들통날 거짓말에 조바심을 내며 설레어할 때 알았지. 당신도 기울고 있구나!! 물론 반가웠지. 근데 뭐가 문제야?? 한 발짝 오라는 게 아니잖아. 손을 잡자는 것도, 입을 맞추자는 것이 아닌 조금,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건데, 그럼 적어도 물러서지는 말아야지."

닥친 상황이, 이 지경을 만든 아라와 자신이 맘에 안 든다는 듯, 진호는 머리카락을 한 줌 크게 쥐었다가 마구 흩트렸다.

"단 한순간도 설레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지. 친구만 하자는 그 말에 반발심이 생겼어. 로마에서 헤어질 때는 휘청이기도 했고, 다시 만난 이유는 분명 있을 터, 해서 일단 지켜보자 마음먹었지. 그랬는데.."

아라는 말을 멈췄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이어진 말은 없었다. 충분한 시간을 줬다 생각했는지 진호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난 현재에 있고 당신은 과거에 있네."

씁쓸한 표정으로 그는 공허하게 말을 뱉었다.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거야."

틀린 것을 바로 잡으려는,, 그 묘한 심리가 사람에게는 있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알면 포기는 빨라진다. 그것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이치를,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한 아라였기에, 그 화살을 이번에는 진호를 향해 조준했다.

"이럴 거면 내심 기대하게나 말지."

"똥 밟았다 생각해요. 마음이라도 편하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비겁한 사람이야. 당신은.. 본인 마음 들여다볼 줄 모르고, 뭐가 옳고 그른지 그 쉬운 거 하나 모르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이야. 세상 가장 쿨한 척하지만 누구보다도 겁쟁이지. 제 울타리 안에서 생각하고 재고 지레 겁먹고, 상처받을 게 무서워 막상 시작도 못하는,, 그러다 어느 날 깨닫겠지. 그러나 정작 그때는 곁에 아무도 없겠지. 그 고통은, 외로움은 상상이 안 되나?"

하다 보니 원망이고, 악담이었다. 유치한 것도, 틀렸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속에 말을 다 뱉어내지 못한 것처럼 진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표정 하나 없이 아라는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의 가슴에 아리게 박혔다.

"내가 지나쳤어요."

"키스를 했어 그렇다고 안기를 했어!! 우는 사람 토닥여준 것 같고 뭘 사과씩이나."

코가 한 자나 빠진 진호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라는 받아쳤다.

"면죄부가 있었다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손에 넣었을 거야. 회개했으니 하나님은 용서하셨겠지. 그러나 정작 사람에게는 용서받지 못했었는데, 내 마음을 모른 척하며 던졌던 그 화살들이 돌아와 내게 꽂혔으니."

분명, 아라는 웃고 있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결국, 같은 말을 되풀이한 셈,, 괜한 노력 말고 다른 사람 찾아요."

진호는 아라의 말을 곱씹었다.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였고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어 빤히 바라만 보았다. 두 사람 사이 침묵은 이어졌고, 긴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아라였다.

"지금이 적기인 듯 나 그 카드 쓸래요."

오를 대로 치솟은 감정의 끝은 두 갈래, 폭발하던가 아님 사그라들던가.. 뻔한 그 이치를 알기에 아라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기울든 간에 동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진호의 마음이 분노에 더 가깝기를 바랐다. 그래야 내심 기대도, 헛된 희망도 품지 않게 되기에.. 아라는 그렇게 서둘러 이별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비겁하지만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는 거라며 미련스럽게 자신을 책망하고 또 힐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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