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39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내가 밤새 고민이라는 걸 좀 해봤는데.."
"거짓말이었네. 카드의 효용가치는 무슨.."
말허리를 싹둑 자르는 아라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끝까지 들어 보라고. 성질머리 하고는. 더 이상 왈가왈부 안 할 테니 카드 수거해요. 그런 일에 쓰기엔 아깝잖아."
"낙장불입."
"화투판도 아니고. 이래저래 퉁치는 걸로 하고 카드는 유효한 거로 마무리 지읍시다."
선포하듯,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보는 눈이 같듯 생각도 매한가지야."
"무슨?"
"사람이 그래요. 틀린 건 어떻게든 고치려 하지만, 다른 건 용을 써도 수가 없거든. 해서 포기하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지."
아시시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무엇 하나 더 보려고 눈에 불을 켠 것은 아니었지만, 부러 하는 말싸움 역시 반갑지 않았다. 이만하면 알아들었지 싶었다. 마치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담배연기처럼 아라의 목소리는 희미했고, 부질없어 보였다.
"대체 어떠했길래."
"한참이 지난 후, 여자와 함께였었지. 그냥 봐도 이쁘고 자세히 보면 더 예쁜,, 여자 친구라 덧붙이지 않았어도 단박에 알 수 있었지. 얇은 스틱 빨대 하나로 커피를 나눠 마시던 그 모습을 보고야 말았으니.. 아~ 더 이상 내 자리는 없구나 했지."
"서운했다고? 제정신이니??"
"아니 사랑인걸 알았지. 내내 부인했던 내 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지."
"그럼,, 고백하지 그랬어?"
"밥 한 숟가락을 두고 고민했던 적이 있어요. 먹자니 배부를 테고, 안 먹자니 아쉽고,, 결국 같은 이치잖아. 떨림 없는 일상 대신 아쉬운 마음을 선택했어요. 품에 안겼다면, 입을 맞췄다면,, 무궁무진하니까."
도리질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진호의 입이 급히 벌어졌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사랑은 환희이자 기쁨이지. 슬프자고 고통받자고 부러 시간, 물질, 육체와 정신까지 때려 넣지 않으니까. 근데 늘 기쁨이고 환희뿐이라면?? 짠맛 뒤로 느껴지는 단맛, 눈물 뒤에 오는 기쁨,, 인생을 왜 희로애락이라 하겠어. 밤새 곰곰이 생각한 게 그거였다는. 당신 말처럼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였어."
빤히 바라보는 아라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경청하라는 듯 진호는 눈빛에 힘을 실었다.
"가령,, 오늘 점심은 햄버거를 먹는다 쳐. 보통의 사람이라면 결제할 카드랑 휴대폰을 들고 후다닥 집을 나설 테지. 근데 당신은 토마토는 빼고 마요네즈는 넣고, 음료는 사이다로, 얼음은 빼고, 먹고 갈 테지만 내용물이 담긴 종이백을 받아 들고 구석진 창가 쪽 자리로 향하는 모습을 그리겠지. 물론 햄버거 매장으로 향하는 다른 누군가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 단, 그 사람은 가는 길에 혹은 키오스크 화면을 터치하면서 밑그림을 그리겠지만, 그에 반해 이 모두를 짜 놓고서야 그제야 집을 나선다는 게 차이점이지."
흘끗 아라의 표정을 살핀 후 다시금 진호는 목소리를 내었다.
"짚어 말하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 보통의 사람은 차오르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먼저 이름을, 그다음에 전화번호를, 다른 날은 취미를 물어보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손끝이 스치기도 하고, 숨결이 닿기도 하고, 결국 복잡한 감정에 뒤엉키겠지. 그런데 당신은 궁금함 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겨야. 목숨처럼 믿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그 논리를 내세워서 말이지. 해서 사랑의 설렘이 아닌 이별의 슬픔을 부러 상상을 하지. 그로 인해 시작도 하기 전에 뒷걸음질을 쳐. 그렇다고 모진 사람은 또 아니라서, 자기도 모르게 감정을 흘리지. 멋도 모르는 상대방은 그걸 또 곱씹고, 용기를 내 다가간 어느 날, 호되게 당하는 거지. 그 옛날의 누구처럼, 그리고 어제의 나처럼,,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는.."
내내 꾸짖듯 하던 진호의 말이 끝이 나자 기다렸다는 듯 아라의 입이 빠르게 열렸다.
"아이고, 선생님!! 할 뻔했다는."
"마음먹으면 그렇게 집요해요. 내가."
"당신과 내가, 다름에 사과라도 해야 하나요?"
"아니. 내 접근 방식이 옳지 않았어."
"그건 또 무슨?"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의 아라였다.
"구구절절 설명 아닌 행동이었어야 했는데.. 이를테면 이렇게.."
순간, 진호는 얼굴을 기울여 코 끝이 맞닿을 만큼 틈을 좁혀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아라는 움찔했고 그로 인해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눈을 맞추던 진호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손을 잡고, 품에 안고, 키스하고, 다음 그리고 그다음. 무슨 계획서 써요? 달빛에 끌려, 향기에 취해, 눈빛에 빠져들어 닿고, 잡고, 안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하는 거지. 고작 뺨 한 대가 전부 아닐까? 그만 좀 속박하라고. 방금 전 당황했어. 분명."
행동으로, 말로 진호가 옥죄고 또 죄어 오자 아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나만 해요. 왔다 갔다 하는 남자 매력 없거든."
"매력 어필하자고 마주한 자리는 아닐 텐데, 분명.. 갈 때까지 갔는데 뭐가 아쉽다고. 발버둥을 쳐봐도 안 된다며, 난 아니라며,, 해서 생떼라도 쓰려고. 왜!!"
"어. 어?"
한껏 올라간 목소리를 애써 다스리며 아라는 좀 전보다 차분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김진호 씨."
"왜? 나이도 같은데 말 놓자고. 존칭하느라, 점잔 떠느라 그동안 적잖이 힘들었어."
"김진호 씨!!"
아라의 목소리는 조금 더 격양되어 있었다.
"왜!! 고아라."
"정말 이럴 거예요?"
"그러려고."
언짢은 표정도 모자라 아라는 단단히 팔짱까지 채웠다.
"내 비록 매너를 갖춘 신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겁하지는 않아. 감정 앞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는 않지. 누구처럼은.."
진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재차 입술을 떼었다.
"제 마음도 모자라 남은 왜 재는 건지. 사람이 가구니? 냉장고니?"
마치 벙어리가 말문이 트인 듯 진호는 거침없이 쏟아 내었다. 들어봐야 좋은 것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처음 감정은 분명 불쾌했다. 그러나 들을수록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기분도 들었다. 물론, 시원했다기보다 쓰라림이 먼저였음에도,, 그럼에도 끊기는 싫었다. 듣고 또 들은 결과,, 아라는 그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철저히 등을 진 자신이 그의 눈에 각인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기보다 그간의 울타리는 단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자신의 민낯과 맞닥뜨렸다. 타인의 객관적 시선은 자신의 모습을 거짓 없이 투영하였고, 그로 인해 씁쓸했으나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실망하기 싫으니, 먼저 선을 긋는 거겠지."
"뭐?"
진호가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잔뜩 헤집어 놓은 머릿속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는 다시금 돌팔매를 던졌다. 이에 튕기듯 아라가 물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진호는 말을 늘어놓았다.
"완전치 않은 모습을, 그런 자신을 드러내기 두려워 말로, 행동을 막는 거지. 당신이 그렇듯 상대 역시 완벽하지 않아. 불완전한 둘이 만나 하나기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관계인 거고 남녀 간의 사랑인 거지. 상대가 싫어졌다 할까 봐 먼저 떠나는,, 방어심리라고."
아라는 듣기만 할 뿐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할 말이 아직이라는 듯 진호의 입이 다시 열렸다.
"평생 그럴 거야.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두려워만 하다 결국 외로움 속에서 허덕일 테지."
"방어심리라.. 맞는 거 같아."
육두문자는 없었다만 결국 악다구니였다. 작정한 끝에 나온 말이었다면 덜 속상했을 텐데, 하다 보니 늘어놓은 제 말에 자신도 아픈데, 당사자인 아라는 어떨까 싶어 걱정이 되었으나 자칫 그녀의 끓는 마음에 부채질을 하지 않을까 싶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심장이 방망이질하던 찰나, 담담하게 말을 뱉는 아라로 인해 되레 진호는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애정결핍이라 말들 했어.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어도 뒷걸음질은 안 했는데. 동성 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반해 이성 간에는 문제였지. 유독 그 애한테는 더욱 그랬어. 전에 손목 잡지 말랬던 거 기억해요?"
말없이 끄덕였지만 진호의 두 눈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야유회에서 말뚝박기가 한창이었고, 덩치 좋은 크루 하나가 힘껏 올라타는 바람에 한껏 숙인 말들은 줄줄이 무너져 버렸지. 손에 묻은 흙을 스스로 털고 일어나는 애들과는 달리 나는 그 애의 힘에 의해 일어났어요. 은근슬쩍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임에도 굳이 손목을 잡더라는. 그래서일까? 그 진심이 닿아서인지 덜컥 겁이 나더라. 해서 그 애가 한 발 다가오면 제자리걸음을 했고, 두 걸음을 내리 걸으면 뒷걸음질을 쳤어. 한 번에 두 발자국 오면 그건 반칙이니까."
술주정이라고만 여겼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라에게 있어서 손목은 그의 진심과 자신의 죄책감이 공존하는 오직 둘만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 부숴 버릴 것도 아니며, 어설픈 힘에 의해서 깨어질 그런 상징도 아니었다. 이별은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가 된다던 그 보통의 진리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말이다. 이런저런 상념들은 진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 혼돈의 소용돌이는 다시금 이어진 아라의 말에 의해 이내 멈추었다.
"김. 진. 호., 씨는 그 애를 생각나게 해요. 자꾸만.."
이름 석자를 일부러 끊어 읽었다. 것도 한 자 또 한 자 꾹꾹 눌러서 말이다. 감정은 최대한 배제했다. 불편하니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빙 둘러 말했지만 결론은 거리를 유지하자는 당부인 동시에 경고였다. 한껏 머리를 든 이성과 감성이 저 먼저 보아달라 아우성이었다. 아라는 도망을 가려한다. 시작도 하기 전이라는 그 유리한 상황을 핑계 삼아서 말이다. 모른 척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님 억지로라도 붙잡아야만 하는 걸까? 자신의 마음도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도와줄 이도 방법도 없는 홀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진호는 덜컥 겁부터 났다.
"수녀님이 겨누신 칼 끝이 향하는 방향,, 알아요. 알고, 이해도 되는데. 결국.. 또 도망가겠지."
"난 사람을 믿지 않고, 당신은 사랑을 믿지 않으니 결국,, 우린 같은 병을 가진 사람. 함께 고쳐 나간다면.."
힘겹게 싸운 끝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아라는 지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진호는 여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험한 세상 내가 너의 동그라미가 되어 준다는 거 아니야. 잘 들어 봐. '나는 너를 사랑해' 여기서 주어는 '사랑해'가 아닌 '나'잖아. 완벽한 문장이 되려면 동작의 대상이 되는 즉, 목적어가 필요하지.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그 대상이 되어주는 거야. 단, 확신이 들 때까지만,, 짚어 말하면 예행연습 혹은 모의고사라 하면 이해가 빠를 테지. 속되게 말하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서로를 이용하자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멀어지던가 아님 좁혀지던가 하겠지. 결승점에 선 이가 나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이왕지사 나였으면 좋겠지만,, 어때?"
같게도 다르게도 와닿았다. 곱씹어 본다면 분명 다른 말일 테지만, 그럼에도 어째 헷갈리기만 했고, 실로 묘했다. 아라가 어수선한 반면 진호는 승기를 잡은 듯했다. 눈앞의 고지에 깃발을 꽂을 일만 남은 사람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미 흘린 것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이제 더는 안 흘린다고."
선언하듯 던진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제대로 각인되기를 진호는 바랐다.
"고아라를 분석한 나의 입장 표명은 여기까지. 더 이상은 안 하겠다고."
한마디로 가능한 것을 구태여 나눠 말한 것은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정확히 박힐 테니 말이다. 그의 뜻이 통했는지 아라는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폴리 행은 여전한 건가?"
"푸하하."
"웃지 말고 확실히 해두자고. 아~ 그러고 말은 놓자."
"그러지. 뭐."
방치해 두어 자칫 곪아 터질 수 있는 문제를 먼저 들추었다. 흔적은 조금 남겠지만 쓰라린 상처는 덜하겠다 싶었다. 스스로를 던져 아라를 엿본 결과, 기대했던 정답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오답지도 아니었다. 9회말 2아웃 동점 주자 만루 상황, 유격수 키를 넘기는 짧은 안타 하나면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한 번의 기회는 반드시 오리라 진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지켜보다가 혹은 몸에 맞고라도 진루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결국 노림수와 선구안의 싸움이었다. 자신 있다 여겨졌는지 진호의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