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40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수많은 관광객들이 머물렀다 떠나요. 저마다의 사연들을 간직한 채 말이죠. 해서 덤덤해질 때도 되었다 싶다가도.. 한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네요."

DEL GIGLIO의 수녀는 애써 웃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씩씩한 여자 고아라는 쉬이 잊힐 캐릭터가 아닌지라."

"어. 어?"

헤어짐의 순간은 늘 어색하고 더디기만 하다.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해서 진호는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슬쩍 올라간 눈매, 그러나 분명, 아라의 입꼬리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행이었다.

"한 번 안아 주세요."

말과는 달리 아라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수녀를 와락 안았고, 수녀는 아라의 등을 쓸고 또 쓸었다. 아쉬움을 담은 짧은 포옹이 끝이 나자 비어 있는 수녀의 품을 진호가 파고들었다. 그의 너른 등을 한참을 토닥이고서야 수녀는 그를 품에서 놓았다.

"옷깃이 스쳐서 그런지 벌써부터 밟히네요. 간간이 소식 들을 수 있을까요?"

말끝에 손에 든 수첩과 펜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아라가 먼저였고 뒤를 이어 진호가 적었다. 진호가 건넨 그것들을 바라만 볼 뿐, 수녀는 이렇다 할 말은 없었다. 마지막 인사를 두고 서로가 미루고 있던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건 DEL GIGLIO의 수녀였다.

"남은 여정에 주님이 함께 하실 거예요. 더불어 나의 작은 응원도 덧붙일게요."

"건강하세요."

"아시시도, 수녀님도 기억할게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그들은 애써 돌렸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한동안 눈으로 좇던 수녀도 등을 돌렸다. DEL GIGLIO의 수녀원의 나무문이 쿵- 하고 닫혔다. 이로써 그간의 흔적들은 말끔히 사라졌고 추억들은 고스란히 묻혔다. 수녀원 외벽에 달린 화분에 움튼 꽃잎들은 새 식구를 위한 몸단장에 부산했지만 그렇다고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다만,, 구석 화단에 장미 넝쿨 중 하나가 제 성질을 못 이겨 붉은 몽우리를 슬쩍 드러내고 있었다.


"고아라에게 박카스란?"

"약국에서 파는 피로 회복제."

그들을 실은 기차의 바퀴가 쉬지 않고 움직여댔지만, 아직은 아시시 안에 있었다. 아라에게 있어 여행의 다른 정의는 아쉬움이기에, 머물렀던 그간이 날들이 무색해질 만큼 아시시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을 생각이 없었다. 저만치 있는 하늘에는 티클 하나가 없었고, 바람은 얼굴을 간지럽혀댔고, 들이마신 공기는 달큼했다. 마치 이 모두가 쌍수를 들고 이별을 환영하는 것만 같았고 아쉬움은 혼자만의 몫인 듯했다. 그로 인해 적잖이 불편한 심기가 핑곗거리를 찾고 일던 찰나, 불이 붙은 성냥을 진호가 던졌다. 잘 지내보자며 철석같이 약속하지 않았던가? 수녀님과 성경 공부도 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상황이었다. '아시시만 아니었어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성난 감정을 잠재운 후 적절하다 싶어 답을 달은 것이었다.

"아프니까 사랑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눈치가 젬병은 아니었다. 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웬걸,, 작정하고 덤비는 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박카스를 건네려 DEL GIGLIO의 수녀를 찾아갔던 요전날,, 책상 위에 버젓이 놓인 박카스와 짝꿍인 우루사가 눈에 들어왔다. 건넨 이는 보나 마나였다. 분명 자신의 행동을 추궁하는 태도였다. 가만,, 이 자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참지 못한 아라의 입이 열렸다.

"혹 수녀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아니."

"그럼?"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사이좋게 드시길래. 두 분이 나란히 앉아서."

"아. 아.."

"설마 그게 끝?"

"마시던가 아님 남 주던가 하랬잖아. 혹 남 줄 거면 그에 얽힌 사연 토해내라는 조건도 모자라, 준 건지 마신 건지 형은 다 아는 방법이 있다고 겁박하길래, 이실직고했잖아."

조목조목 반박하는 아라의 기세에 눌린 진호는 입을 앙- 다물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두레박에 왜 버들잎을 띄웠게. 급히 마시다 체하는 경우 여럿 봤지. 잘했다고. 막상 떠나려니 아쉽네."

"얼씨구."

본전은 고사하고 쟁여둔 쌈짓돈마저 털릴 지경으로 몰리자 냉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진호에게 아라는 추임새로 일격을 가했다.

"miserere mei. Dues."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설마가 사람 잡는다 했던가? 전공자인 자신도 몰랐었던 곡이라 당연 아라도 그러려니 했는데, 웬걸!! 물론, 대충 봐도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었으나, 아라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듬뿍 묻어 있었다.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려 취한 행동은 오히려 자신을 옥죄어 왔다. 스무고개는 필요 없게 되었다. 해서 진호는 핵심을 물었다.

"<miserere mei>는 시편 51편의 합창곡에서 영감을 받았다 해요. 교적부에 이름 석자 당당히 올린 자매님께 물어요. 시편 51편은 뭐다?"

"다윗의 고백."

거침없는 아라의 대답에 은근 빈정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왜?? 미숙한 행동이 자칫 도화선이 되어 큰 불로 번질 수 있으니 말이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성현들의 말씀을 부여잡고 아니꼬운 마음을 누르고 밟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좋은 말씀 전하러 오셨군요. 자매님."

'지는 것이 결국 이기는 거다.' 힘껏 주먹을 말아 쥐며 진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의 의중을 파악했지만 못 본 척하며 아라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자신의 심복인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다윗이 예언자 나단에게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며 지은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1630년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통치 아래에서 성주간(聖週間) 예배를 위해 작곡된, 이 곡은 당시 교황청이 시스티나 성당의 독점건을 유지하기 위해 복사를 금하고 악보를 공개하지 않아, 1770년대까지 이 음악을 듣고자 하면 바티칸에 가야 했으나, 알레그리가 세상을 떠나고 120년이 지난 어느 날, 시스티나 성당을 찾은 14살의 모차르트가 10분에 걸쳐 연주되는 이 곡을 암기해 악보로 옮겨 공개했다고 해요. 이 곡은 성금요일 저녁 미사 테네브레(tenebre)를 위해 작곡된 곡으로 '테네브레'는 '어둠'이란 뜻으로 미사 예식 중 성당의 촛불을 하나씩 꺼, 마침내 하나의 촛불만 남게 되어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때 <miserere mei>가 부드럽게 울려 퍼져 신성하고 더없이 경건한 분위기에 젖게 하죠."

"사순절의 마지막 주, 풀어 말하면 수난의 주일부터의 1주일간을 말하며 영어로는 'holy week'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기 전, 그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기 때문에 '고난주'라고도 하죠."

"오.. 오!!"

음절과 음절 사이 적당히 틈을 벌리고, 거기에 감탄의 감정을 얹어 놀란 척하는 아라의 연기가 아주 그럴싸했다.

"부를 기회가 있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요. 고아라 아닌 수녀님 덕분에."

"기특하네."

"그건 내가 할 소리.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관심이 부른 일종의 집착?"

피식- 웃는 아라를 따라 진호 역시 웃음을 흘렸다.

"김밥, 사이다도 없이 나폴리까지 어찌 가나 했는데, 시간 줄였네요. 해서 박카스 사건 덮어준다. 내가."

"고맙다는 말 밖에."

눈이 마주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었다.

"내 버전은 어땠어요?"

시종일관 당당하던 아라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이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진호는 추궁을 했다.

"조회수 엄청났는데. 아직이라고?"

"이승철 씨 노래 중에 <말리꽃>이라 있어요. 여러 가수가 커버했음에도 원곡의 느낌을 채워주지 못하더라는. 요는, 성가곡이에요. 아무렴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다 한들, 가톨릭 신자는 고사하고 성경의 내용도 몰랐으면서."

의기양양한 아라의 기세에 질세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진호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야. 질문을 달리해서 파바로티랑 보첼리 중 누구 버전이 더 좋던가요?"

"제목은 비슷하나 다른 곡인 거, 알고 있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좀 전은 <miserere mei. Dues>, 지금은 <miserere> "

보란 듯이 진호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이 곡은 들어 봤어요. 김진호 씨 버전."

그녀의 말에 쑥 내민 그의 입술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고는 짐짓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질문에 답 아직인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답도 없는 질문 같지만, 그럼에도 파바로티요. 왜냐. 제목과 가사는 몰라도 이 한 구절은 다들 알 테지. 뀌노맨마레루치카.."

카랑한 아라의 목청에 껄껄- 진호는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Caruso>에 홀딱 했던 저울추가 단박에 보첼리 쪽으로 기운 건 <Time To Say Goodbye> 때문이었지. 내 기준에서는 훨씬 더 익숙했으니..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기운 저울추는 바닥까지 내려갔어요. 열 손가락을 깨물어도 더 아픈 손가락이 있어요. 모성애가 많아도, 적어도, 여자라면 다 그런 법. 장애를 극복한 그 모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는데 <miserere>가 터닝포인트였다는. 애당초 주케로는 파바로티와의 협업을 원했지만, 보첼리의 데모테이프를 듣고는 그를 극찬하며 협업은 정중히 고사했지. 결국 주케로 & 파바로티의 앨범 버전과, 주케로 & 보첼리의 공연 버전으로 나뉘었고, 그 덕에 취대 수혜자는 대중들이었지만,, 성량만큼이나 너른 그 마음이 좋았어요."

"그럼에도 보첼리를 마음 한편에 두었다. 저울질은 너무한데."

보란 듯이 비아냥대는 진호를, 아라는 빤히 바라보았다.

"2020년 아시시 프란체스코 성당에서의 크리스마스 공연보다 2007년 로레타의 공연이 더 좋았다 하지 않았나? 내가 또 돌려봤지. 고아라 덕분인지 때문인지, 아무튼 그랬다는."

"보았다니, 들었다니 알겠지만, 두 공연 모두 담고 있는 뜻이 대단하잖아. 2020년은 코로나가 지구를 덮은 와중, 크리스마스라는 시기와 프란체스코 대성당이라는 장소에 힘입어 지치고 다친 세상을 주의 사랑이 포근히 감싸기를 바라는 뜻,, 이 모두가 합을 이룬 그야말로 치유의 장이었다면, 2007년 9월 로레토(Loreto)에서의 공연은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4000명의 순례자들이 함께였던 은혜의 장, 진정한 사랑을 찾고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하여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라는 교황님의 특별 강연 후 이어진 <fratello solo sorella luna>는 더없이 은혜스러웠으니까. 나도 이런데 막상 현장의 순례자와 영상을 접한 신자들은 어떠했을까!!"

순간, 진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말을 한다.

"장소적 특성상 볼륨 못 올리니 귀는 바짝, 재방송 없느니 집중하도록."

그러고는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fratello solo sorella luna(Dolce è sentire)>,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성이었다. 해서 아라가 바짝 귀를 붙이자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그것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모양새였고 결국, 종잇장 하나 간신히 통과할 만큼의 거리만 허락한 채 붙은 형국이었다.


Dolce sentire come nel mio cuore

ora, umilmente, sta nascendo amore.

Dolce capire che non son piusolo

ma che son parte di un’immensa vita.

che generosa risplende intorno a me

dono di Lui, del Suo immenso amor.

Ci ha dato il cielo e le chiare stelle

fratello Sole e sorella Luna.

la madre Terra con frutti, prati e fiori

il fuoco, il vento, l’aria e l’acqua pur.

fonte di vita per le Sue creature

dono di Lui, del Suo immenso amor,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와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이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1225년 프란체스코 성인의 시에 곡을 붙여, 이 세상의 피조물을 형제, 자매라 부르며 이 모두를 만든 창조주에게 바친 찬미의 노래,, 하나같이 알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에 와닿았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데도 말이다. 시종일관 그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성가는 후반부를 향해 나아갔고 그렇게 아시시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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