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caio bella."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숨이 막히게 반가웠을 텐데, 저승사자라도 본 듯, 아라는 발 하나를 뒤로 물리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는 달리 진호는 발 하나를 내딛으며 부러 숙인 아라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네."
그의 말에 재깍 반응한 아라의 고개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말을 해도. 꼭."
"시선을 피한 것은 봐 달라는 무언의 몸짓이 아니었던가? 부은 건지 못 잔 건지, 어째 영 아니올시다네."
"잠이 덜 깨서.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이면 멀쩡해졌을 텐데. 구태여 왜 와서는."
"오는 길에 누가 채갈까 봐."
"내박치고 팽 가버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
"역시 그 때문이었어.
순간, 진호의 입꼬리가 씰룩- 춤을 췄다. 물론, 아라는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진호가 애써 태연한 척하던 순간이었다. 아라의 몸이 중심을 잃고 차도 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이에 즉각 반응한 진호가 아라의 팔을 잡아당겼고, 아라의 몸이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그의 품에 안기는 듯했지만 이내 조금 틈을 벌렸다.
"왜 그래요?"
다급한 맘에 불쑥-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잠을 좀 설쳤더니."
그제야 진호는 아라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설친 게 아니라 한숨도 못 잔 얼굴인데."
아라는 말없이 그의 시선을 피했고, 진호는 손에 힘을 주어 아라를 끌다시피 했다. 진호가 움직이자 버티느라 안간힘을 쓰는 두 다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라의 몸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못 들어 가."
"힘 빼지 말고 그냥 좀 가자."
와 본 적 있는 진호의 숙소 앞이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줄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힘싸움이 한창이었다. 내내 팽팽했던 줄의 끝을 놓듯, 진호는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휘청이기 전에 헛발 딛는 거 봤어. 민망할까 봐 모른 척 넘어간 건데 결국, 실수가 아니었던 거잖아. 호스텔과 내 숙소를 놓고 볼 때 거리상으로 비슷하면, 방해받지도 않을 테니,, 여러모로 나을 거야. 미련 떨지 말고 눈 붙여."
"도둑잠은 편한 줄 알고?"
"나에 대한 믿음이 없구나. 고아라는.."
"뭐?"
애매모호한 진호의 말에 아라는 튕기듯 물었다.
"실은, 가이드를 자처한 알프레도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실 거라고."
난처한 듯,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실직고했으면, 쓸데없는 말싸움은 없었을 텐데."
가늘게 늘어뜨린 눈을 앞세워 아라가 불평을 털어놓자, 딴청을 하며 진호는 시선을 돌렸다.
"문 안 열고 뭐 하는지."
진호는 서둘러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고, 열린 문틈으로 아라는 급히 몸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진호의 팔이 성급히 끼어들었다.
"탐난다고 아무거나 손 데지 말고, 곧장 침대로 가서 자라고."
진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귀찮다는 듯 휘휘- 손을 저은 아라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던 진호는 몸을 돌려 왔던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발걸음을 확인하고서야 출입문에 기댄 몸을 앞으로 당겨 내딛는 아라의 걸음은 꽤나 조심스러웠다. 들어서도, 보아서도 빈 집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본 적 있는 소파, 가 본 적이 있는 계단이 보였다. 익숙한 계단을 올라가니 반듯하게 정리된 침대가 보였으나 진호의 명에 응하지 않고, 눈이 부신 햇살이 한바탕 어지러이 놀고 있는 통유리창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낯선 이의 등장이 반가웠나 보다. 찌를 듯한 빛의 움직임에 아라는 찡긋- 눈을 감았다. 이제 물러났겠지 싶어 슬그머니 눈꺼풀을 올렸지만, 빛의 장난은 여전했다. 그 세기와 온도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작고, 가벼운 아라의 눈꺼풀은 스르르- 내려앉았다.
분명, 머리 위로 두 팔을 올렸는데, 어째 한쪽 팔뿐이었다. 다른 팔은 제 몸 위로 덮인 이불속에서 영 나오기 싫은 모양이었다. 이불, 이불??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짝을 잃어버린 매트리스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불에 발이 달리지 않고서야, 분명,, 누군가 침입했다. 이에 바닥에 붙은 몸의 나머지를 일으켜 세웠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김진호."
쩌렁한 아라의 목청은 텅 빈 집의 이곳저곳을 마구 휘저어댔다.
"일어났어?"
진호의 목소리 끝을 붙잡았더니 주방이었다. 파, 마늘, 당근, 양파, 쌀,, 익숙한 식재료들이 식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그는 생닭과 힘겨운 사투 중이었다.
"이게 다 뭐야?"
"속초에 갔던 직장 사수, 정말 여자 맞아?"
싱크대에 눈을 박은 채로 닭 껍질을 벗기며 답 대신 진호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상황이냐고?"
아라는 재차 물었고, 낮게 으르렁 거렸다.
"사람이 오는 줄도, 이불을 덮어 주는 줄도 모르고, 자는 법이 어딨어?"
진호의 시선도, 대답도 얻지 못했기에, 성질 급한 아라는 그의 팔뚝을 힘껏 거머쥐었다. 그제야 진호는 손을 멈추었고 시선은 아라를 향했다.
"깜짝이야."
"내 질문에 대한 답 아직이야."
"보다시피 저녁 준비 중이라는. 좀 거들지."
"그러니까 왜?"
"그럴 시간 없는데. 그럼에도 듣기 전에는 손도 까딱하지 않겠다는 거지?"
"응."
마른행주로 손의 물기를 닦은 후, 진호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라는 무엇 하나 놓칠세라 집중을 했다. 그의 입을 통해 아라의 귀에 꽂힌 이야기는 이러했다. 아라와 헤어진 후 진호는 호텔로 가 알프레도를 만났다고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숙소 선택에 있어 제1순위는 안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북적이는 포지타노에서 호텔 아닌 호스텔이라는 과감한 선택엔 여성 전용 도미토리라는 이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웬걸,, 화장실이 급했는지 한밤 중 눈을 뜬 아라는 못 볼 광경을 직면했다. 자신의 침대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정원 네 명 모두가 입실한 것을 확인한 후 잠들었으니, 비어 있는 한 개의 침대로 짐작해 보건대 분명, 침입자는 아니었다. 다른 두 명이 고이 잠든 상황, 큰 소리를 낼 수 없던 아라는 제 몸을 보호하는 얇은 면 시트의 끝자락만 부여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자 그림자 아닌 인간의 형체는 'sorry' 한 마디를 속삭이고 곧장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잠시 멈췄던 밤의 정적은 그녀의 퇴장과 함께 다시 이어졌지만, 이때부터 아라는 설핏 잠들기는커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다. 오해였던 걸까? 그렇다기에는 많은 의혹들이 꼬리를 물었다. 혹여 밤바다를 보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아라의 침대는 발코니와는 정반대 쪽이었고 외려 그녀의 침대가 발코니와 붙은 창가 쪽이었다. 낯선 환경으로 인한 서성거림이었을까? 그렇다면 하필 자신이었을까? 침대에 모로 누은 탓에 그녀의 뒷모습뿐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 모습조차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해서 얇은 시트의 끝자락을 꼬집으며 생각을 씹고 또 씹었다. 칠흑 같은 밤의 색은 점차 옅어졌고, 마침내 새날이 되었다. 이에 아라는 자는 척을 하며 그녀들이 침대를 박차고 나가는 그 순간을 기다렸고, 모두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방을 나섰다. 한달음에 달려 도착한 리셉션에서 거친 숨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온 카이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흔한 러시아식 아닌, 흔치 않은 여자 이름이라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히 리셉션 남자 직원 역시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이틀 치 숙박비를 계산했다는 직원의 말로 인해 아라는 다시금 파리해졌다. 밤새 쌓인 피로와 앞날에 대한 걱정은 아라의 어깨를 짓눌렀고, 삭이지 못한 채로 드러난 그것들은 진호에게 아로새겨졌다. 보고 들은 이상, 가만있을 진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단 아라에게 기운 자신의 마음 이전에 동포애였고, 측은지심이었다. 해서 본바, 들은 바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알프레도에게 낱낱이 고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알프레도가 허락을 했다고?"
"몇 번을 말해.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던가."
"대체. 왜?"
"딸 가진 부모 마음이라더라."
"외아들뿐이라며."
"손녀가 있잖아. 그도 그렇지만, 빈 집에 객식구 하나 더 는다고 달라질 것 없다고."
"말도 안 돼."
"태어나고 자란 이곳이, 누군가에게 안 좋게 기억되는 게 싫다고."
"그게 아니라 대화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프런트 직원이 영어가 되잖아."
"김진호는 영어도 별로던데."
진호의 두 눈이 찌릿- 파장을 보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뭔 줄 알아? 바로 도구를 이용한다는 점이지. 번역기 어플을 미친 듯이 돌려댔지. 거기에 손과 발, 표정까지 보탰지. 그러니까 나 좀 믿고, 손 좀 보태지. 알프레도 초대했다고. 시간이 없어."
"착각하지 마. 알프레도 집에 우리가 얹혀 있는 거야."
"제정신 돌아온 거 아주 반갑고. 일단 마늘부터 까자."
그만하면 답변은 충분했다 싶었는지, 아라는 통마늘을 집어 들었다. 아라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둔 진호는 다시금 닭 손질을 시작했다.
"안 궁금해?"
"뭐가?"
"알프레도에게 미주알 고주알한 나의,, 의중 말이야."
"당연한 걸 물어야 해!!"
"죽 쒀서 개 주기는 싫었다는. 멋대로 생각할까 봐 이실직고하는 거야."
아라가 던진 마늘 한쪽이 진호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엄청 아프다는 듯, 그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분명, 바늘방석을 깔고 앉은 기분이리라 예상했는데 웬걸,, 번역기 어플은 필요 없었다. 세세한 감정을 전달하고자 함께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걸까? 대화가 멈춰 버리면, 호탕한 웃음이 그 자리를 꿰찼다. 깊게 파인 얼굴의 주름이 값을 하듯, 감싸 안는 알프레도의 너른 마음 덕에 시종일관은 아니었지만 화기애애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듯, 식탁 위로 싱크대 안으로 널브러진 식기와 재료들이 저 먼저 정리해 달라 아우성이었고 이에 응답하듯 고무장갑을 야무지게 낀 그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돌아가면 다시 일한댔지?"
"먹고살자면 그래야지."
"그럼, 그곳 주소 좀 알려줘."
순간, 아라의 손동작이 멈췄다. 그리고 빤히 진호를 바라보았다.
"어, 지금 아니야. 설렐 포인트 아니라고."
슬쩍 웃음을 흘리는 진호를 아라의 두 눈은 대차게 쏘아댔다.
"손맛이 이래 젬병인데, 해서 거긴 거르려고."
참다못한 아라가 고무장갑에 맺힌 물방울을 힘차게 튕겼고, 쓱 닦아내는 진호의 표정에서 불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거지는 좀 하는데."
"설거지 짬이 얼마인데."
"잘됐네. 난 뒷정리가 젬병이라."
"다른 사람 알아봐요. 커피숍 알바 경력녀 지천에 널렸으니."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가아해?"
"닭은 껍질 맛으로 먹는 건데, 그걸 또 벗겨낼 때 마음먹었지. 속궁합보다는 음식 궁합에 비중을 두는 편이라서."
순간, 진호의 얼굴빛이 붉게 변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화가 났다기보다 당황스러움의 표출이리라. 속궁합이라!! 이 무슨 황당한 말이던가?? 단어 자체는 문제가 없다손 치더라도, 눈치 없는 그의 마음이 품고 있는 뜻을 헤아리려 한 발을 앞서 나간 탓에, 한번 오른 열기는 두 볼을 물들이고도 성에 안 찼는지 귀마저 물들였다. 진호의 이런 변화를 곁에 있는 아라가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고, 그냥 넘길리는 더더욱 없었다. 제 요리 실력을 폄하했던 진호를 향해 바득바득 성을 내고 싶었으나 눈앞의 현실은 냉정했다. 제 두 눈과 두 팔이 어쩔 줄을 몰라 휘적일 때, 진호는 일머리 있게 손과 몸을 움직여댔다. 간혹 보기에만 좋은 떡도 있기에 말없이 비쭉였으나, 통마늘을 넣어 푹 고아낸 닭곰탕과 잘게 썰은 해산물을 듬뿍 넣은 부침개를 먹어 보고는 동그랗게 커지는 두 눈망울을 잡아채느라 어지간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설거지라도 잘하는 게 어디냐는 빈정거림이 다분한 진호의 말에 억울해하고 있던 찰나, 긴장을 풀어버린 그가 덥석 걸려들었고, 이에 아라는 힘하나 실지 않고 진호를 넘어뜨렸다. 그 통쾌함에 아라의 입꼬리는 절로 올라가 있었다.
"내 사전에 공짜는 물론 공치는 날도 없다는. 뒷정리 끝내고 저녁 마실 가야지. 꾸물 거리는 건 가기 싫다는 무언의 몸짓인가?"
세게 한 방을 날리고 아라는 남은 설거지에 힘을 쏟았다. 진호 역시 다시금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댔다. 더운 모양인지 그가 손을 들어 이마에 땀을 훔쳤다. 붉은기가 사라지지 않은 양 볼과 귀의 언저리에 연분홍색 고무장갑까지 겹쳐지자 붉은빛의 농도는 우열을 가리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옷깃을 부여잡는 진호, 이를 뿌리치는 아라,, 그런 그들은 타인의 눈에 분명 연인으로 비쳤으리라. 그러나 현실은 들어가려는 자와 말리는 자의 팽팽한 기싸움일 뿐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숙소 문제가 해결된 이상 짐을 찾아오자는 진호의 제안에 끄덕여 도착한 호스텔 앞이었다.
"기다리래도."
"같이 가재도."
"러시아 감자밭엔 감자가 반, 사라포바가 반이라는. 혹 반할까 그건 싫은데."
"딱 십 분 준다. 지나면 쳐들어 간다."
배시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아라는 아치형의 좁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진호는 호스텔의 외관을 쓱 훑고는 기다리라는 아라의 권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가파른 대리석 계단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가니 리셉션으로 추정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라가 언급한 미남은 보이지 않았다. 본디 호스텔이란,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는 곳이기에 진호의 존재에 신경 쓰는 이 하나 없었고, 그 무관심을 무기 삼아 실내를 둘러보는 두 눈에 좁고 가파른 계단이 들어왔다.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해서 익숙해질 만한데도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가만,, 자고로 싼 방은 지하 혹은 옥탑일 텐데, 끌낭과 배낭을 메고 지고 들고 내리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구경꾼 아닌 감시자의 시점으로 계단을 응시했다. 계단과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며 아라를, 시간을 체크하기를 얼마,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능숙하게 계단을 타는 아라가 보였다. 반가움도 잠시, 진호는 저벅저벅 걸어 여전히 계단과 사투 중인 아라에게 다가갔다.
"세어 본 것만 열두 개, 몇 층부터였어? 약발이 떨어진 건가. 남자들이 저래 많은데 죄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니."
"러시아에서 온 카이저야. 만나고 오던가. 모르겠다 싶으면 리셉션 직원한테 도움 청하고. 바빠서 이만."
묵직한 끌낭이 거칠게 포물선을 그렸다. 그 바람에 놀란 진호의 두 다리가 껑충 뛰어올랐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닿았다. 그 스스로 자초한 상황이기에 아라는 모른 척 앞으로 나아갔고, 진호는 겅중겅중 걸어 아라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발은 짝을 맞춰 사이좋은 모양새였으나 휘감은 공기는 텁텁했다.
"어, 저기, 카이저."
아라가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끌낭이 주인을 잃었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진호가 새 주인이 되었다.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야."
소리는 없었다만 아라의 입모양으로 보아 분명 육두문자를 곱씹고 있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진호의 입이 급히 벌어졌다.
"욕 한 거야? 방금!!"
빤히 바라보는 시선과 거칠게 움직이는 아라의 손동작에 진호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이고 지고, 돌쇠니?"
"삼월이겠지. 여자 가방 드는 남자 딱 질색이나, 굳이 그런다면 말릴 재간은 없네."
"핑계를 또 그렇게 달지."
몇 걸음 가던 아라가 갑자기 멈췄다. 이에 진호도 멈춰 섰다.
"왜?"
"카이저를 들먹인 건, 도저히 못 넘어가겠다."
말끝에 아라가 진호의 팔뚝을 맵게 때렸고, 억울하다는 듯 진호는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마치 잘잘못을 따지듯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새 호스텔을 등진 채 걷고 있었다. 차도와 붙은 좁은 도로였다. 빠앙-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크게 울리자 이에 진호는 아라의 뒤로 바짝 붙어 섰다. 그러기를 얼마, 자동차가 사라진 텅 빈 도로 위에는 나란히 걷고 있는 그들뿐이었다. 성질 급한 작은 별님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급히 몸을 숨겼다. 방해꾼이 되기 싫은 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