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AR INTERANZIONALE CHIESA NUOVA의 초록색 문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SITA 버스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딘 진호와 아라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어 쉬었다. 그들 뒤로 우르르 내린 승객들이 잠시 뭉쳐 있는 것도 얼마, 하나둘 흩어졌다. tabacchi 간판을 끼고 Viale pasitea로 진입하는 진호의 발걸음을 아라의 목소리가 잡아챘다.
"호스텔까지 걸어서 오 분, 체크인하고 올 테니, 기다려요."
바라만 볼 뿐 정작 진호는 말이 없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초행길이잖아."
뱉듯이 말하고 서둘러 발을 떼는 아라의 뒤를 진호가 이었다. 굴곡진 차도를 거스르는 오르막길이었으나 계단은 없었다. 다소 평탄했지만 구글 지도가 제시한 것과는 달리 오 분이 넘게 걸려 도착한 목적지는 도로에 붙은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건물이었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건물의 외관을 훑는 진호를 뒤로 하고, 좁은 아치형의 출입구 안으로 아라는 빠르게 사라졌다. SITA 버스 정류장과 인접한, 차도와의 접근성은 물론, 1박 십만 원 선이라는 경제적인 가격까지,, 포지타노에서 이만한 곳은 없다는 아라의 말을 소환했다. 방의 컨디션 대신 발코니에서의 조망에 무게를 실은 아라의 시선처럼, 쪽빛 바다를 상상하기 바쁜 한 발 앞서 나간 진호의 마음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 발코니를 찾느라 건물을 훑고 또 훑었다.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일찍 왔네. 뷰는? 방은?"
"리셉션 직원이 미남이라 더 이상 안 따지려고."
눈썹을 크게 들어 올리는 진호를 보며 슬쩍 웃은 아라는 그의 등에 달린 배낭을 끌어내려 잽싸게 맸다.
"무거울 텐데."
"길잡이로 쓸모 있는지 볼 테야. 앞장서요."
큼지막한 끌낭의 네 바퀴가 도로 위에서 빙그르르 돌자 둔탁한 마찰음이 퍼졌다. 왔던 길을 되짚어서일까? 바퀴의 회전 속도는 힘차고 경쾌했다. 좀 전과는 달리 말이다. 뒤에 선 아라는 진호의 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오른발을 떼었다. 자신은 왼발이었다. 그가 왼발을 떼었다. 잠시 멈춰 서더니 아라 역시 왼발을 움직였다. 어긋났던 발동작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나란히 떼었고 걷다 보니 포지타노의 시작점인 BAR INTERANZIONALE CHIESA NUOVA 앞이었다. 건물의 초록색 문을 등지고 tabacchi 간판을 끼고 곧게 이어진 Viale pasitea 도로 깊숙이 그들은 몸을 숨겼다.
구글 지도의 안내에 따르면 550m, 십 분 내외의 거리였다. 걱정이 조금 앞섰지만 문제없으리라 여겼다. 좁게 이어진 내리막길을 내리 걸어 만난, 다소 평탄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좌회전하여 다시금 Viale Pasitea에 진입해 구불거리는 차도를 가로질러 다시 만난 계단을 내려가 Via Della Feluca를 따라 걷기를 얼마, 폭이 좁은 계단으로 시작해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지는 Via Monte의 끝자락에 닿아 있는 Viale Pasitea의 굽이진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묵직한 끌낭을 들었다 놓기를, 그 무게를 몸으로 이고 지고를 반복한 끝에 도달한 목적지였기에 십 분 내외면 가능하다는 구글 지도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 앞에서, 울컥 차오르는 분노를,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서둘러 눌렀다. 프런트의 남자 직원에게 휴대폰을 내민 진호는 그제야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훔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두어 걸음쯤 떨어져 있는 아라를 항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고생 많았다는 의미처럼 말이다. 잠시 호선을 그리던 그들의 눈매는 프런트 직원의 한 마디에 파르르 성을 내고야 말았다.
"sorry. double-booked the room."
채 식지 않은 땀이 다시금 분출하는 듯했다. 바짝 성이 난 네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잡아먹겠다 싶었는지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뱉더니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이에 질세라 진호도 핸드폰을 매만져 번역기 어플을 실행시켰고, 아라는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쪽수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 예약 메일은 대체 무엇입니까?"
진호의 긴 손가락이 이탈리아어 번역기 탭을 터치한 그때였다. 'caio' 익숙한 현지어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일순간에 정지시켰다. 듬성듬성한 흰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육중한 체형의 노신사의 등장은 실로 요란했다. 진호와 아라는 마뜩잖은 시선이었으나, 프런트의 직원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노신사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내민 그의 손을 진호가 엉겁결에 잡았고, 손과 손의 체온이 채 전해지기도 전,, 노인은 성급히 입을 벌려 자신을 호텔의 창립자인 알프레도라 소개했다. 그들이 정신없는 틈을 노린 남자 직원은 노신사 곁에 바짝 붙어있었다. 자칫했다가는 '떡도 떡같이 못 해 먹고 생떡국으로 망하는 것'과 진배없기에, 해서 아라는 단단히 팔짱을 끼었고, 진호는 어깨를 바짝 올리며 우위에 서고자 했다.
"sorry. double-booked the room."
노신사의 입을 통해 나온 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한통속이로구나, 요놈들!! 기대했던 답이 아니자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은 눈에 힘을 주었다. 이에 직원의 입이 급히 열렸다. 그를 통해 들은 예약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가업을 이은 2대 사장이자 노신사의 아들이 자녀의 출산으로 인해 타지에 있는 관계로, 은퇴한 알프레도가 업무를 보던 중, 전화 예약 내용을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이를 숙지하지 못한 결과로 결국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란다. 시점상 전화 예약이 앞섰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 후 본인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그는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짝 좇는 그들의 눈에는 빠직- 다시금 불꽃이 일었다.
"follow me."
노신사의 목소리는 그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호텔 대신 다른 곳을 보여준단다. 일단 보고 결정을 하잖다. 지푸라기라도 잡은 싶은 진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진호가 마음을 바꿀까 하는 염려에, 남자 직원은 그의 끌낭을 냅다 채서 프런트 깊숙이 박아 두었고, 노신사는 커다란 손짓으로 그를 유혹했다. 그리고 진호는 마치 자석에 붙은 철가루처럼 걸음 또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등에 맨 진호의 배낭을 벗어 프런트 직원에게 급히 건네고 아라 역시 질세라 그들의 뒤를 따랐다. 길잡이를 자처한 노신사는 호텔 옆으로 난 좁다란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고, 세월에 바랜 삶의 무게가 무색할 만큼 걸음걸이는 쌩쌩했다. 행여라도 놓칠세라 진호의 두 다리는 바쁘게 움직였고, 다급한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종종걸음을 걸으며 아라 역시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의 숙소는 아라의 위시 리스트에도 있던 곳이었다. 애당초 그녀의 바람은 발코니가 딸린 방이었으나, 진호는 발코니가 없는 방을 잡았다. 그럼에도 궁금한 마음에 버선발로 따라나선 건데, 괜한 오지랖이 결국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제 스스로 자초한 상황이었으나, 본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내 가슴에 화살 꽂아대던 그 김진호는 대체 어디 간 건지."
아라의 한마디에 앞서 걷던 진호가 걸음을 멈췄다. 돌린 시선은 찌릿- 파장을 보내고 있었다.
"잔소리할 거면 뒤돌아서 가."
차갑게 말한 진호는 다시 앞서 걸었다.
"확인 없이 그 사람들 말만 믿고, 인종 차별일 수 있다고. 어쨌거나 본인들 실수잖아. 그럼 그에 응당한 대가를 해야 하는 거잖아. 이를 테면, 숙박비를 깎아준다던가, 아님 방을 업그레이드해 준 다던가. 보통의 방법 제쳐두고 대체할 숙소를 보여주겠다? 선택권이 없는 거잖아.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잖아. "
걸음을 멈춘 진호가 크게 몸을 돌려 아라와 마주했다. 그러나 빤히 바라만 볼 뿐, 말은 없었다. 그 모습에 아라는 움찔했다. 멈춰 선 그들로 인해 저만치 앞서 걷던 노신사 역시 몸을 돌렸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긴,, 사기꾼이 얼굴에 사기꾼이라 써놓지는 않으니. 아라의 생각을 읽었는지 진호의 눈썹이 크게 꿈틀 했다.
"결정해. 따라오던가 아님 돌아가던가. 마지막 경고야."
"알았어. 조용히 간다고."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경고를 한 진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를 중심으로 앞선 노신사와 등 뒤의 아라도 발걸음을 떼었다. 연이은 계단의 출몰로 어지간히 기운을 뺏었던 Via Monte와 Via Della Feluca가 만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차도를 건넜다. 그리고 다시 만난 계단을 서른 개는 타고 올랐을까? 계단식 논처럼 이어 올려 지은 집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다다른 좁다란 계단의 끝에 흰색도 아이보리색도 아닌 바람에 치여, 세월에 쓸려, 색도 형태도 바랜,, 마치 초로의 노인과도 같은 쓸쓸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17이라는 이정표 옆 별다를 것 하나 없는 좁은 아치의 굳게 닫힌 나무문이 열렸다. 스쳐 지나온 집들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곳이 별로인 건지, 외관에서 오는 실망감은 내부의 기대감마저 짓밟았다. 급히 발을 들여놓는 진호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아라는 시선을 돌려 건물의 겉모습을 재차 훑었다. 창문의 위치로 보면 2층집인데, 이상하리만치 높은 건물이었다. 그마저도 맘에 안 드는지 재빨리 눈을 거둔 아라가 발 하나를 앞으로 쭉 뻗자 흰색 정사각형 타일 위로 불시착했다. 촘촘히 깔린 타일은 흰색의 벽과 옅은 하늘색으로 칠을 한 세 개의 문에 닿아 멈춰 있었다. 네모반듯하고 제법 널찍한 공간으로 거실인 듯했다. 장식장 위에 놓인 TV, 구석에 놓인 짙은 감청색의 페브릭 소파와 그 옆을 지키는 스탠드,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붙박이 장식장뿐이라 다소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하나같이 손때가 묻어 있었다. 소파 뒤쪽으로 좁다랗게 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자리하고 있는 덩치 큰 침대, 나란히 붙어 있는 콘솔 위로 펼쳐진 책은 누군가의 흔적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난간을 뒤로하니 커다란 통창에 살짝 기운 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리 걸어 닿은 커다란 유리창은 포지타노의 시가지와 해안가를 정확히 둘로 나눈 채 이 모두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해서, 고개를 갸웃 숙여야 하는 번거로움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서 목을 길쭉이 잡아 빼 아래로 향한 시선에 거실과 붙은 실외의 발코니가 걸려들었다. 이로써, 높은 층고의 의문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주저앉은 채로 넋을 잃은 아라를 현실로 불러들인 건 진호의 목소리였다.
"고아라!!"
거북이처럼 목을 길게 빼어 거실과 붙어 있는 발코니를 살폈지만, 진호는 없었다.
"주방으로 와."
진호의 목소리를 따라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곧장 주방으로 향하니 아치형의 개방된 공간 안에는 6인용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싱크대, 가스레인지, 냉장고,, 익숙한 모습이었다. 휙 둘러보는 그 순간 삐그덕- 문이 열렸다.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더라면 애당초 문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낯선 공간에서 익숙한 진호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를 따르니 계단이었다.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숨도 쉬지 않고 올라가니 독립된 공간과 마주했다. 작은 침대와 샤워부스뿐인, 분리되어 있는 협소한 욕실이 다였다. 그러나 반대쪽으로 난 문을 열고 나가니 제법 널따란 옥상과 마주했다. 선베드와 파라솔, 등받이 의자까지 합세하여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리번거리는 아라의 어깨를 진호가 지그시 눌러 선배드에 앉혔다. 그러고는 재빨리 출입문 위에 매달은 접이식 어닝의 기어 고리에 핸들의 갈고리를 걸어 시계 방향으로 연신 돌렸더니, 선베드 위로 순식간에 그늘막이 설치되었다. 그저 놀람을 표현하는 그들을 향해 노신사는 크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끌려 옥상의 난간 끝에 다다르니 시선을 돌리는 수고에 응한 포지타노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뭉뚝하고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산타마리아 아순타 성당을, 항구를 그리고 자신의 호텔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차고도 넘치는 포지타노의 전경 때문인지, 아님 현재의 위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반박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수 없이 접했을 노신사도, 생경스런 그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풍경에 넋을 잃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인지하지 못한 시간의 정적은 노신사의 휘파람 소리에 의해 깨졌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 만난 하늘에는 한층 짙어진 붉은색과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일 테지."
고개를 끄덕이며 진호는 대답을 대신했다.
"뭐, 나쁘지 않네."
슬쩍 흘린 진호의 웃음소리 때문일까? 노신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앞장선 노신사를 따라 계단을 타고 내려가 거실을 빠져나와 나무문에 섰다.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근 노신사는 진호에게 열쇠를 건넸다. 한창 바쁜 그들과는 달리 아라의 두 눈은 건물을 찬찬히 훑었다. 좀 전과는 다른 관점이었다. 복층의 비밀 공간을 위한 세심한 배려 때문일까? 발코니와 옥상을 보아서일까? 다소 허름한 외관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SITA 버스 정류장과도 인접한 위치였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가격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진호의 선택은 옳았다.
"가는 길은 알 테지. 나는 맡겨둔 짐을 찾으러 가야 해서."
이 한마디를 툭- 뱉고서 진호는 아라에게서 등을 돌렸다.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땅의 저 아래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그는 점점 작아져 갔지만 진호와 노신사가 뱉어내는 웃음소리는 벽을 치고 계단을 타고 와 고스란히 아라에게 전해졌다. 진호의 말처럼 호스텔로 향하는 길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종일 껌딱지처럼 옆에 딱 붙어 있을 때는 언제고, 엄마라도 온 것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진호 행동에 못내 서운했다.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고 뒤늦게나마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진호가 사라진 곳에서 정확히 반대쪽을 향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아라는 힘없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