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48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알프레도는 사업가로서는 유능했는지 몰라도 장사치는 아니었다. 숙박비를 놓고 한참을 고민한 그가 제시한 가격은 인당 50유로였다. 포지타노라는 특수성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분명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제 귀를 의심한 그들은 재차 가격을 물었지만, 산출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알프레도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재료는 손수 공수해야 했지만 이로써 숙식은 해결된 셈, 그들은 머물 날짜를 놓고 머리를 맞대었다. 현 시세와 알프레도의 마지노선을 놓고 계산기를 마구 두들겨대는 순간, 또 언제 와보겠냐는 막연한 마음이 부채질을 해댔다. 팽팽한 줄을 잡았다 놓기를 얼마, 총 5일 치의 숙박비를 알프레도에게 안겼다. 이는 알프레도와 그들의 단순 변심이 불러올 사태를 싹둑 자르기 위한 단도리였다. 건네받은 돈뭉치를 바지 주머니 속 깊숙이 찔러 넣은 알프레도는 청유형 같은 명령문을 쏟아냈다.


'주방을 비롯한 집 안의 시설물 이용은 가능하되 단,, 정리 정돈은 필수, 퇴실할 때는 머문 흔적은 물론 그림자까지 수거해야 한다.'


으레 수반되는 조건이기에 그들을 머리를 주억였고, 이로써 쌍방 간의 계약은 성립되었다. 호스텔에 견주어도 이익이었다. 진호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스텔과 등을 졌던 아라는 공짜 잠까지 청하지 않았던가!! 알프레도의 너른 인심에 감탄하기를 얼마, 아라의 마음은 급해졌다. 원래대로라면 포지타노에서의 일정은 단 삼일, 애당초 무엇을 보고자 알고자 한 것이 아닌 그저 풍경에 취하고 분위기에 휩쓸리고자 했던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는데, 변경된 일정으로 인해 별안간 욕심이 생긴 것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아라가 딱 그 짝이었다. 이에 아라는 관광지도를 알프레도의 턱밑까지 들이 밀어 현지인의 경험치를 동냥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지도를 반듯하게 접어 아라에게 건네며 지긋한 눈빛을 보냈다. 고친다 한들, 달라질 것 없다는 의미만 같았다. 이를 곡해하지 않고 겸연쩍은 미소를 슬쩍 새기고서 아라는 돌아섰다. 사람들에 쓸려, 분위기에 휩싸여, 눈요기를 하다 보니 계단을 오르고 골목길을 돌고, 다시 계단 내리기를 반복하였다. 왔던 길을 되짚는 것 같기도 했고, 같은 자리를 맴돌고만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불쾌한 감정은 없었다. 목이 타면 물 한 모금을, 입이 마르면 사탕 하나를, 다리가 뻐근하면 주저앉기를 번갈아 하며 크지도 않은 마을 곳곳에 제 흔적을 남기었다. 가는 길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포지타노의 전경에 넋을 잃고, 환호성을 내지르다가, 내일도 모레도 마주할 광겸임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라의 생각과, 알프레도의 경험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그랬다. 포지타노는 그 자체가 답이었다.


잠들기 전 바라본 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 박혀있지 않았다. '내일은 비 님이 오시겠구나. 반갑지 않게도 말이다.' 별 뜻 없이 읊조린 말이, 무게를 실지 않은 생각이, 눈앞에 펼쳐졌다. 쓸데없는 기우라 여긴 아라를 비웃기라도 하듯, 검디 검은 하늘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굵은 빗줄기를 연신 토해냈다. 언제쯤이면 끝이 나려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대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도깨비님 기분이 안 좋은가 봐."

진호의 인기척을 느낀 아라가 인사 대신 건넨 말이었다.

"무슨?"

"우울하면 장대비를, 쾌청하면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던걸. 드라마 안 봤나봐."

진호가 빗줄기로 한창 낙서 중인 거실 유리창에서 아라를 분리시킨 건 순식간이었다.

"하염없는 빗줄기만 바라보니 생각도 어처구니가 없는 거야. 쉬이 그칠 비는 아닌 듯한데. 이를 어쩐담?"

"생각났어."

벌떡 일어난 아라는 다짜고짜 진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엉덩이 쪽으로 잔뜩 힘을 주며 진호는 뭉그적거렸지만, 아라의 완력을 당최 이겨낼 수 없는지 속절없이 딸려 일어나고야 말았다. 밖으로 나간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시선과 체험 사이의 괴리감이었다. 매만진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는데도, 자신의 우비를 고쳐 만진 아라는 진호의 우비 앞섶에까지 손을 댔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덮어쓴 우비가 그런대로 막아주고 있었지만, 빗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평소대로라면 폭이 좁은 계단 두 개쯤은 너끈이 내디뎠을 테지만, 자칫 부상으로 이어질까 싶어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발 하나, 걸음 하나를 조심스레 놓다 보니, 그로 인한 헛힘으로 몸과 더불어 마음까지 천근만근이었다. 앞장을 선 아라의 움직임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지만, 따르는 진호는 엉덩이를 쭉- 빼고 걷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기적거리고 있었다. 어려운 걸음 끝에 도착한 곳은 청과상이었다. '대체 이곳에 왜?'라 묻는 듯한 진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아라는 수북한 레몬 더미 앞에 멈춰 섰다. 정확히 네 봉지였다. 자신의 몫은 물론 무게를 달지 않아도 전해지는 묵직함까지,, 이 모두를 진호는 대번에 간파했다. 우산을 쓰자는 제 의견을 묵살하고 부득불 우비를 걸친 아라의 의도를 이로써 알게 되었고, 이에 진호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시비를 걸어왔지만, 한번 더 진호의 시선을 외면하며 두 봉지의 레몬을 그의 손에 걸고, 자신의 몫을 챙긴 후 아라는 다시금 앞장을 섰다. 노란색 우비에 레몬 봉지를 들고 빗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아라의 모습은 회색빛 도화지 위에 노란색 물감을 떨어트린 격이라 그 밝음은 쉬 눈에 띄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목적지인 숙소까지 우회는커녕 멈춤 또한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진호는 걷는 데에만 집중을 했다. 되짚어가는 길이라고 해서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양손에 들린 묵직한 레몬들이 출렁거리며 괜한 힘을 쓰게 했고, 덩달아 휘청이게 했다. 재차 목적지를 곱씹으며 스멀거리는 잡다한 생각들을 눌렀다. 훌쩍- 계단을 오르는 것이 나름 쌩쌩해 보이는 아라였지만, 말은 안 해 그렇지 그녀 역시도 힘이 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이 앞장섰기에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고, 책잡히는 것 또한 싫었기에 힘든 척도 않고 기운을 짜내어 계단을 타는 중이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출발점이었던 숙소의 문 앞은 어느새 결승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빗물에 제대로 숨이 죽은 우비를 대충 벗은 아라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호가 뒤를 이었고 쾅- 소리를 내며 출입문은 닫혔다. 종종걸음을 걸어 주방으로 온 그들은 식탁 위에 레몬 봉지를 내려놓고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빗물은 봉지를 물들이고도 모자랐는지 레몬까지도 물들여, 본연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였고, 그로 인해 싱싱함은 배가 되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어."

"응?"

"뭔 손이 이리 큰지."

"김진호 그릇은 왜 그리 작은지.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으로서 면 깎이지 않으려면 턱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음만 전달된다면."

"얼씨구."

부러 하는 진호의 타박에도 아라는 흔들림이 없었다.

"할 줄은 알고?"

"차멀미는 해도 비행기 멀미는 안 한다는. 짚어 말하면, 요리 아니라는."

입술을 비쭉이는 것도 모자라 진호는 연신 팔을 주물러댔다. 그것이 또 볼썽사나웠는지 아라는 그의 어깨를 맵게 쳤다.

"엄살 피울 거면 갖다 버리던가. 무겁게 왜 달고 다니는 건지?"

"지천에 레몬인데, 뭐 그리 특별하다고. 생색이 목적이라면 말이야."

"생색 아닌 마음이야. 흔해 빠졌어도 지겹도록 먹었어도 상관없어. 정작 엄마들이 중점을 두는 것은 내손이냐 남의 손이냐인 거니."

더 이상 진호가 볼멘소리를 못하게끔 아라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이에 진호는 끄응- 앓는 소리를 하고 입을 꾹 닫아 버렸다. 그것은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더해봤자 말싸움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못 해 먹겠어."

마주 앉은 그들 사이 놓인 식탁 위로 어림잡을 수도 없을 만큼의 레몬이 쌓여 있었다. 칼과 한몸이 된 아라는 레몬 썰기에, 진호는 잘린 레몬의 단면에 박힌 크고 작은 씨를 빼기에 각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툭- 터진 진호의 볼멘소리에 아라의 칼질도 멈췄다. 그러나 빤히 바라만 볼 뿐 달리 말이 없자 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매직아이도 이보다 낫겠어. 벌써 눈이 뻑뻑해."

진호는 두 눈을 꿈벅이며 의자를 뒤로 빼고 식탁에서 몸을 물렸다. 더 이상은 무리라는 시위라도 하듯 말이다.

"도와 달라 한 적 없어. 잠을 자든, 나가 놀든 마음대로 해. 단, 우중충한 그 얼굴은 좀 치워주고. 능률 떨어지니까."

"어느 세월에 다 할 건데?"

"방해만 안 한다면야. 손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아니 왜 놀러 와서까지 일을 해."

의자를 끌어당기며 진호는 레몬 조각을 집어 들었다. 부루퉁한 말투와는 달리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조각 난 레몬에 박힌 씨를 빼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라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어.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에 의한 거라고."

다시금 아라의 칼질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세척 과정을 거친 레몬을 일정한 굵기대로 썰고, 크고 작은 씨를 제거한 후, 기호에 따라 선택한 꿀과 설탕으로 레몬과의 비율을 맞춰 유리병에 켜켜이 담은 후,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를 얼마, 그제야 비로소 레몬청이 완성된다. 감을 먹으려면

감나무 아래 누워 입을 벌리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듯, 밀착시킨 엄지와 중지를 튕겨서 내는 '손가락 스냅'에 의한 요행 아닌,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 없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결단코 없다.


종일 내릴 것 같던 장대비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땅거미가 잔뜩 내려앉은 후에야 벌어진 일이라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눅진하긴 했지만 코끝에 닿는 공기의 질은 조금 가벼웠다. 집 밖의 상황과는 달리 집 안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흰색과 주황색 티셔츠를 들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라나, 이를 바라보는 골똘한 표정의 진호나,, 심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내 눈에는 같아 보이니 아무거나 입지."

"다른 이의 눈에 띄어야 해."

"이럴 시간 없어. 문 닫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고."

"종일 퍼붓던 비가 그쳤어. '옳거니'하며 밤새 영업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그래서 둘 중 어떤 거?"

흰색과 주황색 티셔츠를 제 몸에 번갈아 대며 아라는 홀로 분주했다.

"그래봤자 끈 떨어진 갓 신세일 텐데."

보란 듯이 비웃는 진호의 시선과 성난 아라의 두 눈이 격하게 마주쳤다. 그러기를 얼마, 진호는 헛기침으로, 아라는 티셔츠를 개키며 엉킨 시선을 물렸다.

"박카스는 왜 안 파는 건지."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 말은."

"거듭 말했으나 새겨듣지 않기에 다시 한번 말하자면, 현지 산품이라 배로 오는 긴 여정을 위한 약품 처리 과정이 생략된 관계로 세척이 엄청 용이했다는. 한국이었다면 씻느라 종일 걸렸을 텐데. 레몬이 돕고 박카스가 살린 셈이니, 즉,,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랄까? 물론 수고한 것은 인정해."

"아랫사람 챙길 줄 아는 오너상이려니 해서 창업 진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부추기려던 참이었는데, 맥주 한잔에 체하겠네. 생색은."

되지도 않는 말싸움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진호는 진저리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다가는 꿈에서나 가보겠네. 반짝이는 그곳에서 어지럽게 돌고 싶다. 나도!!"

아라의 등 뒤로 바짝 붙어 선 진호는 다짜고짜 그녀의 등을 밀었다. 쿵- 소리를 내며 출입문이 닫혔다. 겉도는 미지근한 온기가 무색할 만큼 컴컴한 내부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와는 달리 그들의 발걸음과 말소리와 체온이 더해진 출입문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것은 마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몸소 봄을 알리는 개구리의 역동적인 몸짓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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