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49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가 소리도 없이 멀어지는 파도의 움직임, 처음도 끝도 알 수 없을 만큼 펼쳐진 먹색의 하늘과 검푸른 바닷물, 길을 잃지 않게 스스로 길잡이가 된 불을 밝힌 상점들,, Music on the Rocks을 등지고 Spiaggia 해변을 따라 걸으니 이 모두가 보였다. 종일 퍼부은 비에 모래는 숨이 죽어 있었고, 샌들 위로 드러난 발가락 사이로 젖은 모래들이 파고들어 아라는 여간 신경이 쓰였다. 운동화를 신은 진호가 이때처럼 부러운 적은 없었다. 그러나 뭐가 불만인지 진호 역시 입술을 잔뜩 내밀고 있었다.

"나이트클럽은 강남이지."

"잠깐, 강남에서 가 본 곳은 교보문고뿐이라며?"

"드라마를 통한 간접 경험에 의하면."

"아무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부루퉁하게 내뱉고서 진호는 운동화 끝에 한가득인 모래를 툭툭- 차며 못살게 굴었다.

"바닷가 마을은 원래 그런 거야."

말없이 자신을 향한 진호의 시선에,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아라는 입을 열었다.

"어쩌다인 일탈이며 유희인 것과는 달리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니. 바닷가 마을 사람들을 왜 억척이라고, 드세다고 하겠어? 정작 그들은 불쾌해하겠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인식은 그래. 거칠고, 드세고, 억척이고."

진호 역시 바닷가 출신이었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입과는 달리, 두 눈은 연신 흘긋거리며 눈치 아닌 눈치를 보고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하지 않던가!! 좋은 소리도 아니지 싶어 아라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보길도.."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진호는 그녀의 말끝을 가로챘다.

"고산(孤山) 윤선도가 삶을 마감한 곳이며 <어부사시사>가 탄생된 곳이지."

"제법인걸."

"오답 체크 하다 건너 건너가다 보니. 근데 고아라는?"

"사촌 언니를 통한 간접 경험. 완도 화흥포항-노화 동천항, 해남 땅끝항-노화 산양진항의 뱃길을 이용한 뒤 보길대교를 건너는 다소 편해진 지금에 반해,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가 없던 2008년 이전에는 해남 땅끝항에서 보길도 청별항까지 1시간 남짓 배편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어. 우리나라 육지의 끝이라는 해남 땅끝, 거기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더 가야 닿는 먼 섬,, 윤선도는 왜 그곳에 갔던 걸까?"

"당쟁 싸움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으려 스스로 속세를 등졌던 거지."

"본관은 해남, 생부는 정 3품의 관직을 역임했고, 종 2품 강원도 감찰사를 지낸 숙부 윤유기에게 입양된 윤선도는 그야말로 금수저였어. 광해군 시절,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이이첨 등 권신(權臣)들의 부패와 횡포를 상소함으로 귀양살이를 떠나지.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해남에 머물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되었고, 이에 인근 주민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강화도로 떠나. 깊이 각인된 건 여기까지고, 정녕 기억해야 하는 건 지금부터야"

"지금부터라니. 뭐가?"

"윤선도와 의병들을 실은 배가 강화도에 닿기도 전, 강화도는 청나라에 함락되었고, 인조의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즉, '삼전도의 치욕'을 듣고 이에 통분한 나머지 은둔자가 되고자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하던 중 거센 바람길을 만나 잠시 배를 정박한 곳이 바로 보길도였어. 주변 산세와 보석처럼 반짝이는 모래가 깔린 해변 등 풍광에 반한 그는 육신마저 정박시켰지. 그의 나이 51세였어."

"그게 뭐?"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백성들은 굶주렸어. 그러나 궁으로 돌아간 왕과 신하들은 다시금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해 나갔지. 그리고 윤선도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어. 기아와 역병으로 백성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세연정과 낙서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탄생을 했지. 그래, 맞아. 사유재산이었어. 그렇지만 당대의 부패한 권력 앞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던 그였기에, 뒤따랐던 배신감이라고 할까!! 또한 '권력을 등졌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남인의 거두였던 그는 송시열이 속한 서인 세력을 꺾으려다 당쟁 싸움에서 패해 귀양살이를 하지. 당시 그의 나의 71세였고, 이를 어찌 권력지향적이라 하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그가 생을 마감했다 알려진 낙서재는 북향으로 임금이 있던 한양 쪽을 향했지. 임금을 그리는 마음에서였을까? 그의 정치적 야욕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윤 씨 문중이 들으면 매우 불쾌하겠지만.."

"그래서, 현시점에서 고아라의 의중은 뭔데?"

"나이트클럽 얘기하다 보니, 얘기가 또 이렇게 흘렀네. 졸업 여행으로 사촌언니가 보길도를 다녀왔어. 대문인 윤선도의 유배지,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까지,, 국문학도 입장에서 이 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는 교수들의 의견이었고, 다녀온 후에 답사 일지를 제출해야 했는데, 정작 떠오르는 건 갤로퍼, 나이트클럽, 여관뿐이더래. 기대에 찬 교수들, 휘황찬란할 동기들의 감상문을 떠올리니 안 되겠다 싶어 공부를 한 것이 미묘하나 파장을 불러일으켰다고. 윤선도와 그가 세운 건축물을 찬미하는 그들과는 반대의 입장이었으니 당연, 그랬겠지.

"뭐라고 했는데."

아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어진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세연정에 핀 동백꽃은 백성들의 피요. 새의 지저귐은 백성들의 통곡이다. 당겨진 활시위는 백성들의 가슴을 향한 것이요. 흥겨운 가락은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입마저 막았도다. 유유히 떠다니는 조각배는 피고름을 등지게 하는구나. 정작 군자가 없는 곳에서 소나무와 대나무만 슬피 울고 있구나."

잠시 입을 다물기를 얼마, 이번에는 사뭇 힐난조의 어조가 이어졌다.

"풍악과 연회, 뱃놀이는 장소를 옮겼다 뿐이지, 왕과 권력가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 <어부사시사>에 의하면 치열한 어부의 삶이 아닌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속세를 떠나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접하게 된 풍경,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음을 말하고 있으니. 부용동 원림을 비롯해 섬을 조성하는데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완성된 그것들 속에서 먹고 마시며 유희를 즐길 때, 정작 백성들은 굶어 죽어갔지. 그의 사후, 자손들이 기거했던 낙서재는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져 최근에야 복구되었다 들은 바 있고. 그것은 선비의 안빈낙도 아닌 대부호의 풍요로웠던 여생의 단면이지 않을까? 은둔자로서가 아닌 자신과 열세 살의 어린 첩을 비롯한 가솔들이 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낙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타당한 의심과 극히 미화된 그를 향한 대중의 뿌연 시선에 비판적인 입장을 늘어놓았지. 갸우뚱하면서도 얼토당토않다고는 생각 안 했어. 한참 전이었는데도 이렇게 생생한 걸 보면 말이야."

아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제주도 가느니 보길도라는 민요가 있어.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최용한의 <보길도 여행기>에 실린 내용인데, 이보다 2백 년 앞서 윤선도의 5대손 윤위의 <보길도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예로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


보길도가 알려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 윤선도에 의해서였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러나 문인이며 학자였고 선비였던 그가 남긴 무수한 업적과 더불어 무릉도원이라 칭하는 한국의 3대 정원을 후대에 안긴 그 성과를 간과할 수 없음에도, 쉬이 끄덕여지지 않는 것이 영 씁쓸했다고."

"새로운 접근이다. 지금은 뭐 해?"

"허울뿐인 작가 나부랭이로 세월만 보낸다며 이모가 복장 터져하시지 뭐."

"낙타가 바늘 뚫는 것만큼 그 세상도 힘들다고 하더구먼."

"세상 사람 시선과는 달리, 언론고시만큼이나 힘든 과정이라며 입만 열면 넋두리라 질렸는데, 이참에 한번 만나 볼래? 코드가 딱일 듯한데."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할게."

"그렇다면야."

"그건 그렇고, 갤로퍼, 여관, 나이트클럽은 대체 뭐야?"

"정작 해야 할 것은 뒷전이었네. 2002년도에 졸업을 했으니 보길대교가 건설되기 전이었고, 해남 땅끝항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 청별항에 도착하니 갤로퍼가 열을 맞춰 서 있더래."

"운송 수단이었구나."

"정확히. 늦은 밤 여관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배편이 끊겨 오도 가도 못하는 젊은 연인과 여관 주인의 흥정을 목격했다고."

"배편이 끊길 시간에 맞춰 온 거겠지."

진호의 짓궂은 시선에 아라 역시 맞장구를 쳤다.

"간판만 믿고 호기롭게 들어간 나이트클럽 안은 처참했다고. 오색찬란한 미러볼이 돌아가고 있음에도 어두컴컴했던 내부에 대략 서넛쯤 모여있던 중년의 남성들이 꽃다운 여학생들의 등장에 반색을 하자, 교수들이 띠를 이뤄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고. 열악한 시설에 예비역 선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했어. 그때 알았다고 해. 유흥 아닌 삶을 유지하기 위해 수반되는 동기부여는 아닐까? 즉, 멋과 맛은 그들에게 1순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본의 아니게 길어졌지만, 맞아."

"본의 아니게는 무슨. 작정하고 아는 척하고 싶었으면서."

"아니래도."

"그렇다고 치고, 궁금해졌어."

"나 역시 늘 궁금만 했지.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넨 이는 실은 마녀 아닌 생모였다지. 남편이 자신을 멀리하고 백설공주만을 이뻐하자 이를 시기해서 벌인 일이 미화된 것처럼, 밝음 뒤로 드리워진 어두움을 확인하고 싶은 초점 나간 마음 때문이라고 할까?"

"난 나이트클럽이 궁금하다는 건데."

되받아치는 진호의 말에 살짝 열려 있던 아라의 입이 급히 닫혔다. 그로 인해 오가던 대화도 뚝- 끊겼다.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는 10시가 되면 포지타노의 마을은 멈추고, Spiaggia Grande 해변에 있는 Music on the Rocks은 깨어납니다. 해안가 노두(露頭)를 깎아 만든 나이트클럽과 위층의 레스토랑은 해의 움직임에 따라 비치클럽으로, 테라스 식당으로, 나이트클럽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클럽 내부 노출된 암벽과 흰색 기둥, 조명이 켜진 도자기로 이루어진 천장이, 마치 실제 동굴처럼 보이게 하여 로마 유적지를 연상시키게 합니다. 디스코, 펑키, 팝, 하우스, 클래식 음악으로 채워지는 내부에 발을 딛기도 전, 몸은 절로 반응할 것이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법이 펼쳐집니다.'


마을의 유일한 나이트클럽인 Music on the Rocks을 홍보하는 전단지는 더러 거짓을 담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던 전단지를 꺼내 반듯하게 편 다음, 그것을 Spiaggia Grande 해변 모래사장 어딘가에 슬그머니 놓았다. 누군가의 발에 밟혀 혹했으면 하는 아라의 심술궂은 장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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