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52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출발점은 두오모 성당이었고, 길은 두 가지였다. 해안을 끼고 빙 돌아 우회하는 약 1킬로미터 20여분의 거리, 산등성이를 향해 뻗은 비탈진 길을 거슬러 오르는 약 1.3킬로미터 30여분의 거리. 그러나 이 모두는 목적지까지가 아닌, 정확히 말해 등산로 입구까지의 거리였다. 10분이 더 소요되는 우회 없는 직진코스를 택했다. 초행길이었고, 미로 같은 골목과 폭이 좁은 계단을 고려한 결과였다. 시도는 좋았으나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그것은 '도보 경로가 실제 상황과 다를 수 있다'는 핏대를 높인 구글의 주의 사항을 묵살한 결과였다.

도보 경로를 따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서 만난 Salita per Pontone에서 우회전하여 Via Grotte로 들어선 후 맞닿은 Via Valle delle Ferriere를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 담벼락에 PALZZZO SAN GIOVANNI의 팻말이 보인다. 여기서 채 열 발자국을 떼지 않고 왼쪽으로 보면 Torre dello ziro(CLIMBING AREA)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이정표를 끼고 왼쪽 아래로 난 계단을 몇 개 내려가 팥죽색의 아치형의 구조물을 지나면 초록색 덩굴 식물로 벽을 장식한 Rosa's Charming House를 만나게 된다. 1.3km, 30분 거리라 했다. 출발지도 도착지도 일치했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적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시간에 도착하는 건 무리이지 싶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면 또 모를까. 고작 완만한 고개 하나를 넘은 셈, 정작 오르고자 한 산은 시간도 거리도 오리무중이었다. 반가운 것도 잠시,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외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VIA SPERUTO란 안내판 아래 AMALFI와 ATRANI라 적힌 쪽나무 팻말을 만난다. 아직은 아말피의 영역이니 안심하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Via Pisacane를 따라 걸으니 폭이 좁은 계단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개수 세는 것은 포기했다. 그보다는 천 마리의 양의 수를 거꾸로 세는 것이 훨씬 쉬울 테니. 터덜터덜 걷기를 얼마, 잔뜩 녹이 슨 낡은 철문이 보였다. 입장료가 없다고, 열린 문이라고 선뜻 발을 내디뎠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였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노란색 바탕에 검정 글씨, 좁은 도로에 외로이 서서 홀로 망루의 위치를 알리는 몸집이 가냘픈 이정표였다. 로마 시내 한복판 베르니니 분수대 근처에서 만났던 베네토 거리를 알리는 이정표와 흡사 같은 모양새에 그저 반가웠고, 외로운 그 자태에 눈길이 쏠렸다. 그렇게 경계심을 푼 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이정표의 역할을 추론해 본 결과, 노란 바탕의 검은 글씨는 앞을 다툰 따끔한 일침이었다. '자신 있으면 한 번 가 보던가' 하듯.. 행정구역이 달라서일까? 동일한 외형의 표지판은 다른 쓰임새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로써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한데 어우러진 노란색과 검은색을 본다면 두말 않고 등을 돌려야 함을 말이다. '반색 아닌 자각이 먼저였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골든타임은 물론 멈춰야 할 때는 저만치 뒤에 있었다. 만장 같은 하늘은 자비심이라고는 하나 없이 한껏 달궈진 제 몸을 거세게 뽐내고 있었다. 꾸역꾸역 계단을 오르는 겁을 상실한 생명체가 궁금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일말의 자존심마저 무참히 짓밟으려 하는 건지, 몸을 구부정하게 숙여 한껏 밀착해 왔다. 딴에 남자라며 스스로 길잡이를 자처하여 계단을 타는 진호의 두 다리가 아른아른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면 위로 잔뜩 내려앉은 해님의 심술궂은 장난이었다. 미적지근한 바람 한 점이 없었고, 잔뜩 머금은 햇살을 때마침 토해내는 초록의 잎사귀들로 인해 눈꺼풀은 절로 꿈벅여졌다. 대략 500여 개의 계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림잡아도 그 수를 넘었고, 폭이 좁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크고 작은 돌들과 삐죽 튀어나온 나무뿌리가 매복하고 있는 모난 길이 이어졌다. 게다가 비탈진 길이었다. 헉헉대며 몸을 끌어올리면 얕은 계단이 층층이 이어졌다.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정상은 까마득했고, 좁다란 계단 끝엔 빛을 머금지 못해 다소 축축한 흙길이 펼쳐졌다. 그리고 쉬지 않고 걷다 보니 깨닫게 되었다. 구글 지도가 Rosa's charming house에서 멈춘 것과 망루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를,, 그것은 몸소 가보지 않았거나 혹은 경험치에 의한 골탕을 먹일 심사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시작도 끝도 전부 제 선택이요 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애먼 핸드폰을 노려 보며 괜한 성질을 부렸다. 구글 본사가 샌프란시스코 인근 실리콘 밸리라고 했던가?

'화살 끝 작약통 부분 심지가 벌겋게 타오른다. 이에 불화살은 활시위를 튀어 올라 맹렬한 기세로 적진에 박힌다. 이어 작약통이 터지면서 활활- 불길이 번진다.'

이를 상상하기를 얼마,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긴 고행이 끝이 났다.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기대 이하였다. 부추긴 자신도 이러한데 따라온 그의 심정은 오죽할까. 차마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아라는 슬쩍 진호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설령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할지언정 반박하지 않으리라.'

"과연 몇이나 될까?"

앞뒷말을 자르고 몸통만 던져도 대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에 겁을 집어 먹은 아라가 숨을 토해내자 뜨거운 기운이 훅- 터져 나왔다.

"이렇게 고될 줄은 몰랐어. 정말.."

다음 말은 '괜한 객기를 부린 내 탓이야. 미안해'였으나 진호에 의해 막혔고, 뱉지 못한 말을 입 안에 머금은 채 숨을 죽이고서 진호를 바라보았다.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약 2.2km, 왕복 2시간 남짓하는 거리를 사람들은 산책로라, 나는 등산로라 불러. 시작은 순조로웠지. 이제 막 제대를 한 혈기왕성한 사내 녀석들의 발걸음은 가벼웠어. 여름의 절정이라 그런지 오르고 내리는 내내 사람들을 대신해 이름 모를 새와 아름드리나무들만 가득했어. 산사의 고요와 정적을 부러 찾는 그 누군가와는 달리 덜컥 겁이 나더라. '오를 때는 둘이어도 돌아가는 길엔 혼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도 들고.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예정에도 없던 산행까지 보태진 결과는 속옷까지 흠뻑 젖게 했지. 결국 미친놈들의 객기였어."

'미친놈' 진호가 쏟아낸 무수한 말들 중에 유독 그 단어만 다른 어조로 들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것은 아라의 귀에 깊게 꽂혀 감정선을 불끈 솟구치게 했지만, '오늘은 그가 왕이다'라 외며 필사적으로 눌렀다. 아라에게 머물러 멈추어 있던 진호의 시선이 다시금 움직였다.

"근데 만나면 으레 그 얘기만 해."

추론해 본 결과, 진호의 다음 말은 아마도 '미친년의 객기에 놀아났다'가 아니었을까?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그 열한 자를 웃음으로 대신하듯, 진호의 웃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지. 아말피에서 가장 잔혹했던 곳 치고는 눈이 시리게 아름다우니, 아이러니하다. 고된 여정이 싹 잊힐 만큼 황홀하네. 이 맛에 오나봐."

찌를 듯한 태양의 두드림에도, 쏘아대는 사람들의 눈총에도, 끝도 없는 푸른 바다는 제 몸을 부추겨 살랑살랑 일렁일 뿐 좀처럼 깊은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마음 따윈 상관없다는 듯 드넓게 자리를 잡은 채로 어지간히 애만 썩이고 있었다. 망루의 끝은 절벽이었다. 발 하나를 잘못 놀린 어리석은 그 누군가를 집어삼킬 듯, 물살은 몸을 세워 절벽을 때리고 또 때렸다. 저만치 시선을 두면, 잘게 부서진 다이아몬들이 빛의 각도에 따라 아른아른 춤을 추었다. '전진 앞으로'를 줄곧 외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방해가 될까 싶어 시계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호락하지 않은 산등성이로 인한 고된 행군이었다. 그런데다 어렵사리 만난 반토막이 난 망루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누르고 다스렸던 감정들이 일제히 요동을 쳤다. 그러나 일렁이던 속사정은 금세 잠잠해졌다. 그것은 망루를 둘러싼 주변 경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눈이 시리게 아름다웠고, 황홀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 모두를 음미하고 눈에 새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천국은 필시 이와 같으리라.


아말피(Amalfi)와 아트라니(Atrani)를 포함하는 스칼라(Scala)의 작은 마을 폰토네(Pontone)에 있는 스칼렐라(Scellalla) 성의 성채인 토레 델로 지로(Torre dello Ziro)는 중세시대 아말피 공국이 만의 전략적인 위치인 높은 절벽 기저부에 세운 망루로, 이는 바다에서 도착하는 사라센인들에 대한 감시 역할을 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turris ctiri'라 불리게 된 1292년을 토대로 하여, 산펠리체 탑을 건축하며 이를 'Rocca S. Felice'라 기록하고 있는 1151년의 문서에 무게를 싣고, 그 가능성 역시 두고 있다. 'Ctiri'는 고대에 기름과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사용된 원통형 및 지하 용기를 칭하는 고대 아랍어로, 원통형의 탑의 구조가 올리브나 곡물이 보존되어 있던 전형적인 꽃병을 연상시키기에 이와 같이 붙여졌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탑과 총안이 있는 벽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 성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길이 여전한 것은 과거 사라센들을 감시했던 망루의 위용을 되짚기 위한 것보다는 시대가 외면했던 참혹함을 몸소 확인하기 위함은 아닐까.

15세기경의 일이었다. 1400년대 후반 아말피는 부유한 봉건 국가였고, 이는 초대 공작인 안토니오 피콜로미니의 역할이 컸다. 1493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알폰소 피콜로미니가 아말피의 2대 공작이 되었고, 나폴리의 프레데릭 왕의 이복형인 엔리코 다라고나(Enrico d'Aragona)의 딸인 Giovanna d"Aragona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알폰소의 죽음으로 조반나는 미망인이 되었고, 당시 20살이었던 그녀와 행정관이던 안토니오 볼로냐(Antonio Bologna)의 금지된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비밀 결혼과 슬하의 자녀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형제였던 Luigi d'Aragona추기경과 Carlo d'Aragona후작은 그 둘을 갈라놓을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아챈 그들은 도망을 쳤지만, 볼로냐는 밀라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조반나는 아이들과 함께 절벽 위의 망루에 갇혀, 1510년 3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왕족의 불륜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고, 이후 볼로냐의 친구였던 마테오 반델로(Metteo Bandello)의 1554년 소설을 시작으로, 17세기에 John Webster의 유명한 'Malfi 공작부인'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조반나의 핏빛 치정으로 물든 망루는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슬프고도 잔혹하며 비정한 사랑의 말로는 아리너리하게도 아말피의 기암절벽 위에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그 정상에서 볼 때, 왼쪽으로는 호화로운 빌라 침브로네(Villa Cimbrone)와 장엄하게 서 있는 라벨로(Ravello) 정원이, 오른쪽으로는 레몬 나무가 무성한 테라스 아래 계곡에 압착되어 있는 아말피의 테라코타 옥상이, 그 아래로는 아트라니 해변이 펼쳐져 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제 막 결혼식이 끝났는지 예복을 입은 신랑과 신부의 모습이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신랑의 두 팔에 안겨 있어, 흑과 백의 대비는 실로 명확했고 또한 묘했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성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수는 대략 62개라 했다. 젊은 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자의 자존심 때문일까? 한데 쏠린 사람들의 시선 때문일까? 대충 몇 개 오르고 말겠거니 했건만, 남자는 꾸역꾸역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신부를 안은 채로 말이다. 두 사람만의 이벤트는 점차 밀집한 사람들까지 물들였고, 그들이 나아감에 따라 박수와 환호는 더욱 거세졌다. 어느새 계단의 중턱이었다. 계단 아래에 선 아라와 진호에게는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은 알 수 있었다. 성큼 계단을 타던 동작이 더뎌졌고 남자의 다리에 떨림이 포착되었다.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다른 목소리를 토해냈다. 여자들은 환호성을, 남자들은 탄식을,, 계단을 오르던 남자의 동작이 뚝 멈췄다. 이에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탄식을 내뱉었다. 더는 못 보겠는지 아라는 고개를 돌렸고, 돌린 그 시선에 진호의 얼굴이 아로새겨졌다. 마치 그는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그 광경에 녹아들어 있었다.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아라가 진호의 팔뚝을 건드렸다.

"저들은 백년해로할 거야. 분명히."

"진심으로 축복을 비는 거지?"

뱉은 긍정의 말과는 달리 짓고 있는 표정은 삐딱했기에, 아라는 진호의 의중을 재차 확인했다.

"지역 전설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아말피 교회의 계단을 올라가면 부부의 연을 이룰 수 없다고 해. 번쩍 안고 오르는 것이.. 안 그래?"

잠시 벌어졌던 입을 가까스로 오므리며 아라는 목소리를 내었다.

"신성한 교회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지. 덧붙이자면 덕수궁 돌담길을 제 집 안방처럼 거닐었던 남녀의 백년회로가 코앞이라고."

"혹 부모님 얘기야?"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짝꿍님이 종로에 있는 서울대 병원 간호사라서, 서울 갈 때마다 창경궁을 시작으로 덕수궁 돌담길까지 걷고 또 걸었데. 그때에도 언뜻 흰머리가 보였으니 파뿌리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요는,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미신이라고. 창경궁에서 덕수궁까지 걸으며 젊은 시절 선생님을 상상했었는데. 건강은 여전하신가?"

호기롭게 쏟은 말투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엔 아련함이 가득 머물렀다. 분명 같은 공간 안이었으나 진호의 감정선은 아라와는 달랐다. 눈썹을 한껏 추켜올린 것이 꼭 따질 듯 덤비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서울에서 가 본 곳이 교보문고뿐이라며?"

"그건 강남 얘기고, 행정구역이 엄연히 다른 걸."

"그걸 또 변명이라고."

"현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텐데."

"미신이라 비난해도, 겁쟁이라 놀려대도 좋아. 단언컨대, 난 덕수궁 돌담길은 물론, 저 계단 역시 오르지 않을 거야."

힘을 실어 말하는 진호의 어투는 비장했고, 단단히 팔짱을 낀 태도는 확고했다. 부러 채운 팔의 빗장이 풀릴까 하는 염려는 그로 하여금 몸을 더욱 옥죄게끔 하여, 그 몸사위는 자못 부자연스러워 보였으나 진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꿋꿋하게 그 자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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