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53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무슨 일이야?"

크게 벌어진 아라의 두 눈도 문제였지만, 머리끝에서 낙하한 물방울이 총총걸음으로 마루 바닥에 내려앉는 현 상황이 더욱 시급했다. 욕실 안을 쩌렁- 흔들어 댄 다급한 목소리에 물기를 털기는커녕 수건도 얹지 못한 채로 한달음에 주방으로 온 자신과는 달리 진호는 딴 세상에 있었다. 식탁에 냄비를 내려놓고, '앉으라' 하는 손동작은 꽤나 요란스러웠다. 그런 모습이 아라에게 곱게 보일리 만무했고, 장승처럼 서 있는 아라 역시 진호의 눈이 곡해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불면 맛없어. 일단 앉아."

포크에 돌돌 감은 면을 후후- 불기는커녕, 후루룩- 소리를 내며 단번에 입 안에 욱여넣고 조그맣게 벌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와중에도 연신 오물대느라 얼굴 근육은 방정맞은 춤을 춰댔다. 한마디로 볼썽사나웠다. 라면 아닌 자신을 향한 아라의 시선에 대한 의구심은 진호로 하여금 급히 목소리를 내게 했고, 채 삼키지 못한 내용물로 인해 말투는 어중간했다.

"이런 날은 라면을 먹어야 하는 법이지."

"이런 날?"

줄곧 입을 오물거리기를 얼마, 이어 쏟아 낸 말은 좀 전과는 달리 또렷했다.

"집 떠나 제일 많이 먹은 음식이라 물릴 때도 되었건만, 피곤하거나 공연 후엔 생각이 나더라. 희한하지?"

"여정의 피날레로 파리에서 먹기로 한 거 아니었어?"

로마에서였다. 일정을 고려해 본 결과, 분명 짐이 될 거라는 아라의 눈총에도 부득불 진호는 봉지라면을 구입했다. '마지막 여정의 자축'이라는 타이틀을 달면서 말이다. 일부러 박아둔 것을 손수 꺼냈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현상태를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다. 하긴, 진호의 외침이 아니었다면 샤워기 아래에서, 선 채로 잠이 드는 생경한 체험이 가능하지 않았던가. 아라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잠깐만."

"불면 맛없다고. 고아라!!"

벌떡- 일어난 아라는 주방을 등졌다. 등 뒤로 이어진 진호의 외침이 흩어져 희미해질 무렵, 잠시 주인을 잃었던 의자는 짝을 찾았다. 갈 때는 혼자였으나 올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라의 양손에는 팩소주가 들려 있었다.

"레몬청 꺼내 줄래."

익숙한 동작으로 진호는 냉장고를 열어 레몬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 아라는 입구가 제법 넓은 유리컵에 소주를 따르고 설탕에 절인 레몬 조각을 아낌없이 넣었다. 그러고는 잔 하나를 진호 앞으로 밀며 건배의 제스처를 취했다. 떨어져 있던 두 개의 잔이 하나의 지점에서 합쳐지며 쨍- 날카롭게 울어댔다. 적당히 쓰고, 입맛을 돋울 만큼 달고, 넘기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한마디로 기분 좋은 맛이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두 사람의 콧등에 약속이라도 한 듯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괜찮네."

"라면도."

그제야 맛을 본 아라가 건넨 답이었다.

"요리와 운전은 닮았는지 해 본 만큼 늘더라. 라면엔 또 일가견이 있지."

"라면이 요리였다는 것을 아말피에서 알게 되네."

실없는 아라의 농담에도 진호는 스스럼없이 없었다. 다시금 잔을 채우더니 건배를 생략한 채 홀짝였다.

"후회하지 않겠어? 팩소주 아껴둔 거 아니었냐고?"

"그러는 본인은."

"라면과 구공탄은 '글쎄올시다'이나, 라면과 소주는 '진리'야."

소주로 인해 비로소 합을 이룬 것을, 아라의 배려에 대한 감사를,, 진호는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처음에는 분명, 각자 앞접시를 이용했는데 어느 틈에 냄비 안에서 동시에 수저질을 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달아오른 술기운은, 팽팽했던 경계를 시나브로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한쪽 손에 턱을 괸 채 아라의 고개가 어깨 쪽으로 조금 쏠렸고, 무심히 목을 긁어대던 그때였다.

"그만 일어나자."

"술도 안주도 아직인데."

팩소주를 흔들고, 건더기 하나 없는 국물뿐인 냄비를 가리키며 느릿하게 이어진 아라의 변명이었다. 내내 꼿꼿했던 어깨도, 늘 딱딱했던 말투마저 벗어던진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이 낯설기는 했어도 싫지는 않았다. 웃는 모습이 이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스르르 내려앉는 눈꺼풀 아래로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흐트러진 동공의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모습마저도 눈에 박히면 어쩌란 말인가!! 시간도 상황도 물리적인 힘까지도 제게 유리했지만, 혹여 공든 탑이 무너질까 싶은 진호는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목 긁는 것으로 보아 졸린 모양인데. 뭐."

순간, 흐트러졌던 아라의 동작에 바짝 군기가 들었다. 대번에 달라진 태도에 진호의 입은 성급히 벌어졌다.

"혹 박카스남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야?"

"아니야.. 아니라고.. 근데 어떻게 알았어? 졸리면 목 긁는 거.."

두 번 당하기 싫은지 마음의 빗장을 채우느라 말꼬리는 어물어물 늘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 졸리면 하품하고 목도 긁고."

"너도 그래."

어지간히도 급했었나 보다. 그동안엔 없었던 '너'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응."

"못 봤는데. 그리고 내 주변엔 한 명도 없는걸."

"박카스남이 신사였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놀랍다는 듯 아라의 눈동자는 크게 벌어졌지만, 가당찮다는 듯 진호는 그저 빤히 보았다.

"똑똑한 척하는 허당이잖아. 그런 여자 공략법은 뻔하고 쉽거든. 그런데도 손목만 잡았다는 건, 그 됨됨이를 말하는 거지. 그리고 고아라 역시 그를 엄청 좋아했네. 흐트러진 와중에서도 단번에 정신줄 부여잡는 걸 보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어 아라는 못마땅한 척을 했다.

"재주는 내가 부렸는데 공은 박카스남이 갖다니. 앞의 남자 두고 딴 남자 생각하는 건 숙녀답지 못한 거야."

"그러게 왜 목 긁는 얘기는 해서."

"내가 치울 테니 얼른 사라지지."

보란 듯이 진호는 툴툴거렸다. 그리고 서둘러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 어딘가에 시선을 박으려 했지만 노상 몸을 움직여대는 통에, 아라는 정신없이 눈동자만 굴려댔다.


꿈이라 하기엔 너무도 생생했지만, 분명 꿈이었다. 몸을 지탱하는 침대나, 제 몸을 감싼 얇은 면시트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침대 모서리와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유리창에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걸려 있었다. 달콤했지만 석연치 않은 내용이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벌건 해를 마주하기 싫은 아라는 면시트를 걷어찼다. 달아올랐던 열이 조금 내리자 생각을 곱씹을 수 있었다. 아말피에서의 상황을 복기하듯 꿈은 시작도 끝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닮아 있었다. 망루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몸은 긴장이 풀려 쉴 곳을 원했고, 그런 연유로 이름 모를 좁은 골목의 가파른 계단 중턱에 대충 몸을 놓았다. 시선을 아래로 두면 쪽빛 바닷물이 일렁였기에, 계단 아래에 서면 곧장 바다로 빠질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잠깐의 휴식은 흥건한 땀을 식게 했고, 옥죄였던 근육을 자유롭게 했다. 그러기를 얼마, 그들이 막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Excuse me.'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작은 사내아이를 앞세운 가족이었다. 폭이 좁은 계단, 어깨를 맞대고 앉은 그들로 인해 통행이 어렵게 되었으니 잠시 길을 터 달라는 뜻이었다. 이에 아라가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던 순간, 진호의 왼쪽 팔이 벽 쪽을 짚으며 아라의 어깨마저 힘 있게 눌렀다. 그 바람에 들린 아라의 엉덩이가 계단에 내려앉았고, 어깨와 팔은 울퉁불퉁 튀어나온 벽돌 그대로가 새겨질 만큼 건물 외벽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일사불란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다소 여유가 생긴 공간을 아이가 앞장을 섰고, 그리고 여자가, 그 뒤를 남자가 이었다.

'Thank you.'

저만치 아래에서 그는 인사를 건넸다. 좁은 공간을 보폭이 다른 세 사람이 차례로 내려갔다. 분명한 것은, 짧은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는 것과, 자신의 어깨 아닌 벽을 짚었다는 것이었다.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왜였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이어진 꿈에서도 진호의 행동은 같았으나, 물을 용기는 없었다. 묻지 않은 것은, 물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에 의한 것일 테니 결국, 원점이었다. 그것이 못내 답답한 아라는 벌떡 일어났다. 땀을 흘리면, 몸이 힘들면 잡생각은 사라진다. 그러나 수차례의 검증을 통해 몸에 익은 경험치는 반기를 들었다. 평소 멀리했던 뜀박질을 이어가도,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종종거렸음에도 엉킨 그것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또렷하기만 했다. 응집하는 생각들을 분산시키고자 마구 도리질을 하던 그때였다.

"식전 조깅은 아니다 싶지?"

"깜짝이야."

반색 아닌 반감을 표하는 아라와는 달리 진호는 실실대고 있었다. 꿈에서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마주한 상황은 흡사 꿈과 현실을 한데 버무려놓은 듯 모호했으며 어지러웠다. 그런 불편한 속내를 반영하듯 못으로 쇠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어떻게 왔냐고?"

"우리의 건축양식이랑 달리 집에 울림이 있더라.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가는, 출입문을 닫는 소리에 깼지 뭐야. 한숨 늘어지게 자고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

"김진호는 그러라고. 나는 좀 뛰어야겠어."

"이왕 나온 김에 같이 뛰자."

옆에 딱 붙어 선 '그'라는 존재는 꿈과 현실을 다시금 뒤엉키게 했고, 이에 참지 못하고 아라는 벌컥 짜증을 내었다.

"길도 넓은데, 날도 더운데, 붙어 붙기를."

"괜히 성질이야. 기분 좋으라고 하는 운동인데 성질을 부리면 쓰나."

암팡지게 눈을 흘긴 아라는 휘적휘적 팔을 저었다. 유치하긴 했지만 진호의 접근을 막는, 깜냥 취할 수 있는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속을 모르는 진호는 장난이 하고 싶었는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아라의 등을 곧장 떠밀었다. 이제 막 언덕길에 들어선 리어카를 밀듯 말이다. 이에 몸서리를 치며 아라가 멈춰 섰다.

"김진호."

단번에 공기를 찢는 새된 소리에 순간 당황한 진호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럴 만큼 잘못한 거야?'

"그러게 떨어지라고 했잖아. 땀도 나고 냄새도 나잖아."

제 소리에, 진호의 표정에 괜히 머쓱해진 아라는 어물어물 말을 늘어놓았다.


흡사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와도 같았다. 언덕배기를 내리 오른 탓에 기진맥진하여 식사와 휴식을 겸해 찾은 식당, 옅게 스치는 바람에도 힘없이 팔랑대는 종이인형 같은 아라와는 달리 진호는 새벽이슬을 한껏 머금은 초록의 잎사귀처럼 생동감 있어 보였다. 눈은 접시에, 손은 새우 껍질에, 입은 눈과 손 그 어디쯤에 두고 그 모두를 정신없이 이어갔다. 아무래도 요리는 간이 세지 싶었다. 요리사가 손수 뿌린 밑간 위로 진호의 입에서 투하된 천연 조미료까지 골고루 내려앉았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마주 앉은 그도, 식탁 위로 자리한 요리마저도 호감보다는 반감이 먼저 앞섰다.

"피로 회복에 박카스만 한 것이 없건만.."

물 만난 고기처럼 팔짝 뛰지 않은 것으로, 아라의 상태를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이는 진호가 '박카스'를 들먹인 실질적인 이유였다.

"갑각류 역시 타우린의 보고, 그중 새우 만한 것이 없지. 꽃게가 있었으면 금상첨화인데."

아쉬운 듯 말하는 진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껍질과 머리에 이어 내장까지 제거한 새우들이 푸른빛의 둥글납작한 자기 그릇 위에 구부정하게 누워 있었다. 속살을 드러낸 것이 못내 부끄러운 듯 말이다.

그러나 아라의 관점은 조금 달랐다. 제 몸을 발랑 까뒤집어 파도의 기세와 태양의 화력을 즐기는 것만 같은 엉뚱한 상상을 불러왔다. 그러나 꾸짖듯 이어진 진호의 음성에 혼자만의 상상은 금세 깨졌다.

"음식 앞에 두고 제사 지내는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남의 가정사에 관심 끄시고."

"새우가 별로야? 그니까 저 밑에 피자집 가자니까 부득불 우기더니. 약이라 생각하고 먹어."

새우 껍질이 덕지 붙은 엄지와 검지를 거푸 흔들며 진호는 재촉을 했다.

"처음 아니야. 새우 껍질 까 준 남자. 박카스남은 더더욱 아니고."

"난, 또. 그건 이미 알고 있고."

"어떻게?"

"본디 갑각류라는 것이 맛은 있는데 손이 여간 많이 가지, 비린내는 또 어떻고, '내년 대하철에도 또 오이소' 직업 정신 투철하신 사장님이 손수 하셨겠지. 대하철에 안면도로 가족여행 갔었다면서."

"짜증나. 진짜."

팽- 아라는 토라졌다. 그 모습이 밉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재밌는 건지 진호는 껄껄- 웃었다.

"가만 보면 속이 비었을 때 짜증 내더라. 아까도 나 잡을 뻔했잖아. 애쓴 사람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 싱싱해서 그런지 비리지도 않고 버터를 곁들여서일까? 색다르다."

입을 오물거리를 얼마, 이번에는 접시 한편에 쌓아둔 새우 머리를 집어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더니 맛에 놀랐는지 눈깔사탕만큼 큼지막하게 눈을 키웠다. 진호의 행동이, 새우 머리의 맛이 궁금해진 아라는 그대로 따라 했다. '어두육미'라 했던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짭조름하고 달큰한 새우 본연의 맛에 고소한 버터의 풍미가 더해져 씹을수록 감칠맛은 배가 되었다.

시종일관 심각하고 싶었다. 못마땅해하며 그를 배척하고 싶었다.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고 여길 무렵, 난데없이 등장한 새우도 아닌 꼴랑 새우 머리에 빳빳했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방어기제 가운데 하나인 '부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까? 눈앞에 닥친 실존적 공포에 맞서기 위해 단순하고 일상적 고민에 초점을 맞추는 것 말이다. 새우 머리를 맛보게끔 하여 꿈과 현실의 복잡 다난한 '그'로부터 잠시나마 보호하려 한, 녀석의 수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저 단순한 '식'의 욕구였단 말인가?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아라는 모난 마음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제 할 일은 이뿐이라는 듯, 새우 머리를 입에 넣어 와그작 씹어대며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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