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54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빌라 침브로네(Villa Cimbrone)로 향하는 SiTA버스 안이었다. 정확히 말해, 목적지는 아말피였다. 반토막 난 망루를 보겠다는 헛된 일념은 발목을 잡았고, 결국 조반나의 주술에 걸려 뻘짓을 하고 만 셈이었다. 어제의 아말피행은, 여행 잡지를 통해 우연히 접한 절벽 위의 호화로운 저택인 빌라 침브로네를 보고자 함이었고, 그곳은 아말피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의 라벨로에 위치해 있었다. 즉, 아말피는 경유지였을 뿐, 목적지는 아니었다. 살짝 맛만 보리라는 애초의 계획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라벨로에 발 하나를 디디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하루를 통으로 날린 셈이었다. 그런데다 대저택은 자리를 벗어나 두 눈에 아른대었고, 골머리가 아플 만큼 고민은 한참을 이어갔다. 스위스, 더군다나 인터라켄까지 갔건만 융프라요후에 오르지 않은 누군가는 결국, 3454m의 설산을 보고자 재차 스위스를 방문하였고, 이에 '심히 좋았노라' 하지 않았던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결혼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언컨대, 땅을 치고 후회하리라. 그로 인해 다시금 지옥문이 활짝 열렸다. 어제의 뻘짓을, 부러 하는 오늘의 수고를,, 이 모두를 빌라 침브로네가 보상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혹 티클만큼의 의심이 있었다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지옥행 길잡이를 자처하지는 않았을 테니. 대체 얼마나 많은 차량이 파고들었던 걸까? 산의 허리는 한층 잘록해 있었다. 버스와 물아일체가 된 그들은 새총 끝에 달린 돌멩이처럼 팽팽히 당겨졌다가 단번에 튕겨져 나갔다. 목이 꿰인 채로 고무줄의 탄성에 속수무책으로 좌지우지되는 보잘것도 없음이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아말피 코스트'.. 누군지 모르나 제목 하나는 기똥차게 붙였다. 별안간 웃음이 흘러나왔다.

"죽음의 코스에 다시금 몸을 실을 줄이야."

뜻을 싣지 않은 그저 소리만 있는 진호의 불평은 상념 속의 아라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소렌토로의 여정이 남아 있는데."

"해서 말인데, 배를 이용할까 싶어. 포지타노에서 소렌토까지는 배로, 나폴리까지는 기차로 어때?"

"살레르노-로마행 기차도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

"이 길을 또 오라고?"

"그쯤 되면 익숙해지겠지. 본디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니."

진호의 눈동자가 잠깐 번뜩였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고는 작은 종이봉투를 무심하게 툭-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아라의 표정은 어수선했다. 닥친 상황이 제게 유리하지 않았다. 집안 대대로 이어오는 '비범한 것을 투척'하는 비법을 몸에 익힌, 윤 가의 자손이 아님을 떠올리자 난데없이 날아든 돌의 장난으로 수면 위로 자글자글 드리워졌던 동그라미 띠는 차츰 옅어져 갔다.

"뭐야?"

고개를 반 자는 내리고 건넨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진호는 대답을 대신했다. 봉투 안을 한참 들여다본 아라는 다시금 진호를 보았다.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제야 꺼내 놓고 보니 묵주반지였다. 제 오른손 검지의 링반지와 비슷한 밝기로 보아 14K인 듯했다. 가격, 장소, 시기 아닌 목적이 궁금해졌다. 별안간 골똘해진 아라를 진호는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아시시 프란체스코 대성당 성물방에서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봐서.."

나머지 말을 아낀 채 진호는 끼어 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가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손바닥 위에 묵주반지를 놓고 아라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설마 훔친 것이겠어?' 하며 왼손 검지에 조심스레 묵주반지를 걸었다. 그러나 손가락 중간에서 묵주반지는 멈췄고, 이에 온화하던 진호의 눈매와 들썩이던 아라의 마음이 뚝- 멈췄다. 당황한 진호의 눈길에 한 번, 억지로 밀어 넣는 아라의 손길에 또 한 번, 오도 가도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놓인 묵주반지는 영 가시방석이었다. 안 되겠는지 아라는 묵주반지를 잡아 빼, 오른쪽 검지에 끼는 둥 하더니 별안간 방향을 틀어 왼쪽 중지에 끼웠다. 어거지로 밀어 넣으면 들어갈 듯했으나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심정인지 살 속에 제 몸을 숨겼다. 그것을 가까스로 꺼내 약지로 옮겼더니 마치 제 자리라는 듯 단번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모양새로 보나 움직임으로 보나 안정되어 보였다. 오므렸다 펴는 손동작을 한참을 바라보던 진호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본디 손가락 다섯 개의 쓰임새가 다르듯, 그 생김새와 굵기도 다르건만, 보통의 인체의 비율을 벗어난 생경스러움이란. 손의 쓰임새가 많은 직업, 오른손잡이, 미혼이라는 갖가지 상황을 고려해 재고 또 잰 후 얻은 결과였는데, 약지에 들어갈 줄이야."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까지 돌려대며 진호는 웃음을 이어갔다. 그러기를 얼마, 쏘는 듯한 아라의 시선은 낭자한 웃음소리를 단번에 제압했다.

"낸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알고 받는 선물은 재미없잖아. 왼손으로 뭐 해? 콕 짚어 검지로?"

"커플링은 아직인가?"

"커플링?"

"피아노, 아.. 이젠 남의 여자가 된 그녀와의 빛바랜 추억의 정표라 해야 맞겠지."

심각해하기는커녕 진호의 눈동자에 장난이 굴러다녔다.

"질투하는 거야 지금?"

"그럴 리가."

"커플링이 맞긴 한데. 그녀가 아니라."

뜸을 들이며 진호는 아라의 표정을 대놓고 살폈다. 그의 작전이 먹혔는지 어두운 곳에 막 들어선 듯, 아라의 동공이 대번에 커졌다.

"백세시대라며 요즘 환갑은 생략하잖아. 부모님 반지 맞춰드렸지. 돈이 궁해 결혼반지 팔 때 그렇게 서운하셨데."

"아.."

겸연쩍어하는 아라의 모습이 재밌기만 한 진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원래 그런 거야? 아님 후천적인 거야? 엄마 모르게 반지 맞추느라 내 손을 자 삼았는데, 24년이란 세월을 무색하게 하다니.."

말을 아끼며 진호는 현미경이라도 된 양 아라의 손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이에 아라는 단단히 손을 말아 쥐었다.

"잘 됐지. 뭐."

"끝까지 이럴 거야?"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오른 목소리는 꽤나 앙칼졌다.

"정작 망설였잖아. 본인의 의지 아닌 선물을 검지 아닌 약지에 끼우며, 죄책감 없이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결국, 다 가진 셈. 본의 아니게 신체의 비밀을 들켰으나, 그건 내가 꼭 지켜줄게."

"말이나 못하면."

아라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웃긴다."

"또 뭐가?"

받아치는 아라의 목소리가 심드렁했다.

"천주교의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은데, 묵주반지 낀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될까? 사고 보니십자가와 열 개의 묵주알로 이루어져 있던데. 물론 천주교와 기독교의 방식은 다르겠지, 그럼에도 종착역은 하나같이 천국. 선데이 신자인 고아라가 제 딴에 생각해 낸 것이 가톨릭을 벤치마킹 해서라도 천국에 가겠다는 건데, 그 의지를, 노력을 과연 고까워하시려나?"

"김진호가 교적부에 이름 올리기 전이라 잘 모르나 본데 그게 무 자르듯 그리 딱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라고."

답답하다는 듯 아라는 절레절레 도리질을 했다.

"그건 그렇고, 그러고 있으니 꼭 결혼반지 같다."

가까스로 편안해진 아라의 눈에 번쩍- 불꽃이 일었다. 이에 진호는 움찔했다.

"걱정하지 마. 혹여 그리 물어온다면 매형은 저쪽에 있다 그리 말할 테니."

마치 어릿광대의 재롱이라도 본 듯 거푸 히죽거리는 진호를, 노려 보는 눈의 모양으로나 단단히 말아쥔 손동작으로 보아, 한 대 치고도 남을 기세였으나 정작 마음은 그와 반대였다. 훤히 보이는 속내가, 꼬마아이나 할 법한 유치한 장난이 두고두고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포지타노뿐 아니라 그들의 여정 역시 끝자락이었다. 그간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이별이 턱밑까지 추격해 왔음을 깨달았다. 갖고 싶었으나 쉬 손을 뻗을 수 없던 묵주 반지였건만, 저도 남도 아닌 그에 의해 전해진 것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것도 잠시,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것이며, 이별 앞에 미리 건네는 선물'이라던 진호의 말이 훅-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곧바로 달뜬 흥분으로 일렁였던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삽시간에 추수가 끝나 벼의 그루만이 남은 휑한 논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랬다. 손가락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반지는 스스로를 빛내며 '이별'을 거푸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간의 여정을 되짚어 볼 때, 다듬으면 '섭섭함'이라, 날것 그대로는 '서운하고 아쉬웠으며 애틋하고도 아깝기만 했고 불만스럽기까지 했다'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내내 맴도는 그것이 답답함과 초조함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개학을 앞두고 밀린 일기를 몰아 썼던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차라리 밀린 일기라면.. 인물을 재등장시키고, 상황을 재탕하고, 시공간을 뒤바꾸고, 사건에 채색을 하고, 우려먹은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한데 섞고, 그나마도 바닥을 드러내면 형제자매의 것을 곁눈질하여 이름 한 자 교묘히 바꾸어,, 밤새 쓰고 또 써내려 갈 텐데. 첫 장에서 선뜻 연필이 나아가지 않던 밀린 일기와는 달리 출발선에 서는 것은 큰 무리가 없지 싶었다. 탕- 출발 신호에 놀란 두 다리는 움직일 테지만, 나아가는 방법과 결승점으로의 지구력은 당최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덮어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지선다형이라면 쉬 끝낼 수 있을 텐데.'

텅 빈 일기장을 한 장, 또 한 장을 넘기던 조그만 머리가 내놓은 답안이었다.

'해도 되는 일인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할 수 있는 일인가? 할 수 없는 일인가?'

그때의 꼬마는 어른이 되어 고대했던 사지선다형을 맞닥뜨렸으나, 만만치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생쥐 꼴이었다. 저 깊은 곳의 무언가가, 저만치 어딘가의 누군가가 얄밉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제 마음만으로는 당최 안 되겠는지 아카시아 잎을 떼며 쉼 없이 자문을 구했건만, 무성한 잎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길게 뿜어내는 숨소리가 궁금했던 걸까? 뚫어져라 차창을 향한 해의 시선에 지레 놀란 묵주반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로 인한 번쩍임은 다시금 '이별'을 상기시켰고, 이 꼴 저 꼴 보기 싫은 아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미 익혀둔 승강장으로는 불안했던지 버스 정면에 새겨진 행선지를 재차 확인했다. amalfi-revello-scala로 향하는 5110번 버스였다. 18개의 정류장을 거치느라 25분 여가 소요된다 하였다. HOTEL LUNA를 지났다. 짧으면 1분 길면 3분 간격으로 멈췄다가 이내 언덕길을 오르는 버스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여 정류장의 개수 세는 것은 접었다. 부산 전경을 한눈에 담겠다는 욕심에 초량 산복도로를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바닷가 마을, 좁은 골목을 굽이돌아 오르는 현란한 움직임까지 닮은 꼴이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한편을 먹은 운전사와 현지인 틈에서 관광객이 드물었던 국내의 현실과는 달리 파도처럼 밀려오는 관광객의 등살에 묵묵히 핸들을 부여잡은 외로운 운전사가 이곳의 현 상황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아닌 눈을 몇 번 꿈벅였더니 어느새 revello였다. 버스에 부러 몸을 실은 목적은 쪽빛 바다가 아니었음에도 약속이나 한 듯, 땅을 밟은 사람들은 저만치 아래로 넘실대는 푸른 파도의 움직임에 시선을 꽂았다. 혹 그들의 여유를 방해할까 싶은 아라와 진호는 슬며시 등을 돌렸다. ALBERGHI HOTEL 간판이 보였다. 시작점인 Via Giovanni Boccaccio에 들어선 것이며 650미터 10분 거리라 구글은 안내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낮은 아치 터널이 보였다. 폭도 길이도 다소 짧은 터널을 지나 Piazza Duomo, 다르게 표현하면 마을의 중앙 광장에 발을 디뎠다. 성당 십자가를 등지고 왼쪽 흰색 외관 건물 1층 'KINGSOR'라는 상점을 끼고 이어진 좁다란 골목을 따라 걸어 Via dei Rufolo에 진입했다. 다행히도 외길이었다. RISTORANTE VITORIA까지 걸으니 갈림길이 나왔다. 구글의 안내에 따라 오른쪽으로 꺾인 Via Trinita 아닌 정면의 낮은 아치 터널로 향했다. 두 번째 만난 터널이었다. HOTEL RUFOLO을 안내하는 표지판으로 인해 헛발질은 면했다. 낮고 좁고 짧은 터널을 빠져나오니 Via S. Francesco로 이어졌다. HOTEL RUFOLO와 CHIESA S.FRANCESCO를 내리 지나쳐 A CASSA DI SAMU를 지나자 Via Santa Chiara에 닿았고,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Via Santa Chiara, 26, 84010,, 드디어 목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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