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짙은 감청색 슈트는 시선을 사로잡았고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새하얀 피부는 두 눈을 고정시켰다. 아말피 해안을 뚝- 떼어 박은 듯한 깊고 푸른 눈동자를 지나 날카롭게 선 콧날, 선홍빛의 탐스런 입술까지,, 흡사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 흠잡을 것 하나가 없었건만, 안타깝게도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한참이나 밑돌았다.
"길을 잃었니?"
알아듣지 못하는지, 말을 하기가 싫은 건지, 상대는 제 손에 감긴 붉은색 실만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 이를 테면 남자, 삼촌도 좋고, 작은 아빠, 것도 아니면 너네 아빠라도.. 정말 너 혼자니?"
일말의 기대감은 아라의 목소리에 높낮이를 만들었지만, 마지막에는 실망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마주 선 꼬마 아이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붉은색 실만 만지작거릴 뿐 꿈적하지 않았다.
"김진호."
튕기듯 오른 아라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흩어지기도 전에 진호가 반응했다.
"어쩌라고."
"애가 못 알아듣잖아."
귀찮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진호는 대답을 피했고 이를 참지 못한 아라는 찰싹- 소리가 나게 그의 팔을 때렸다.
"마주 선 아줌마가 별로인지라 주변 남자를 등장시키고 싶지 않은 교묘한 수는 아닐까?"
아라의 입꼬리 한쪽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괜한 헛기침을 할 뿐, 그렇다고 이어진 말을 없었다.
"나는 여행자야. 실을 따라왔더니 이렇게 만난 거야. 이 아저씨는 내 친구고."
제 손에 감긴 실패를 내민 후, 멀뚱히 선 진호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했다. 다행히도 아이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하기 그지없음에 애먼 진호의 팔뚝을 쿡- 찔러대며 시위를 하던 그때였다. 젊은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퍼걸러 안까지 전해졌다. 흡사 꼬챙이를 연상시키는 뾰족하고 단단한 구두의 굽은 무른 흙길을 만나 난감했는지 그 걸음새는 심히 뒤뚱뒤뚱했다. 마치 회전력을 잃은 팽이처럼 휘청였다. 게다가 햇빛을 가려할 챙이 넓은 모자는 스윽- 흘러내려 엄하게 시선을 가리는 바람에, 그것을 거듭 추켜올리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지 싶었다. 몸의 중심을 잃은 채 휘청이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우스꽝스러운 자태에 절로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힘든 여정이었으리라. 마주한 상황에 화도 치밀었으리라. 신이 여자에게 친히 하사하신 '육감'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구두를 벗어 손에 쥐는 쉬운 방법도 있었건만, 포기하지 않은 그녀의 고집과 집념에 기세가 눌린 아라는 저도 모르게 다소곳이 손을 모았다. '현장은 들켰으나 절대 한 팀은 아니다'는 입장을 표하며 서둘러 선을 그었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진호 역시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바르게 섰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모양새는 심히 반듯했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이에 부응하여 그녀 역시 한 수를 무르기를 바랐건만, 웬걸,, 마치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인 로켓인 양, 거센 말들을 폭죽처럼 터트렸다. 눈을 부라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좋은 말은 아닌 듯했고, 내내 시큰둥하던 아이가 '알프레도'라는 말에 유독 움찔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제 이름인 듯했다. 가족들과의 외출에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대열을 이탈한 걸까? 엄마의 잔소리를 성급히 끊어도, 어쭙잖게 아이의 편을 들어도 결국,, 그녀의 화를 돋울 뿐,, 이럴 때는 강 건너 불구경이 상책이었다. 싸움 구경은 말리는 것이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 미덕이니 말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몸에 익은 건지 아이는 무덤덤했다. 체구는 작지만 강한 아이였다. 퍼걸러 안을 뒤흔든 그녀의 일방적인 공격이 뚝- 멈췄다. 돌아가는 상황을 염탐하려 발에 머물렀던, 내내 공손했던 시선을 끌어당긴 순간이었다.
'헉'
아라가 내뱉은 외마디 비명이었다. 조금 전까지 마주하고 있던 아이와 엄마는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었고, 꼿꼿했던 아라의 자세는 허물어져, 반 자는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 모습이 흡사 마부가 잡아당긴 고삐에 끌려가는 말과도 같았다. 현 상황을 유추해 볼 때, 여자의 말이 끊긴 시점으로부터 자신이 비명이 터지기 전까지 짧았으나 분명 틈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 아이의 어깨를 틀어쥐고 몸을 돌렸을 테지.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의 아이가 할 법한 일도 아닐뿐더러, 가해진 힘의 세기로 보아 분명 먼지와 때가 잔뜩 묻은 어른의 것이었다. 마주 선 아이의 눈동자가 바다 저 깊은 곳처럼 짙어졌다. 종합해 볼 때,, 아이 엄마의 일방적인 행동이었음을 확신했다. 아라의 판단에 확답을 주듯, 아이는 제 엄마 품을 박차고 나와 아라에게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아라의 손끝을 단단히 쥐었다. 마주 잡은 손으로 한 번, 붉은 실로 또 한 번 연결됨으로,, 이로써 그들은 단단히 얽혔다. 그러고 있기를 얼마, 아라는 냉큼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제 손에 감긴 실패를 풀어 아이의 자그마한 손에 건넸다. 비록 말은 불통이었어도 행동은 통했나 보다. 원래 제 것이던 실을 향했던 아이의 시선은 들린 고개에 의해 아라에게로 향했다. 그로 인해 크고 푸른 눈동자와 작고 검은 눈동자가 잠시 엉켰다. 훼방꾼이 되고 싶지 않은지 주변은 더없이 고요하였다. 잠깐의 정적은 시선을 돌린 아이에 의해 깨졌다. 그러나 이것은 계획의 일부였을 뿐, 정작 아이의 목적은 아라의 손을 잡는 것이었나 보다. 야무지게 말아쥔 모양새로 보아, 놓을 생각이 없다는 강한 의지로 해석되었다. 그 순간, 정면에서 강한 힘의 존재가 느껴졌다. 바라다본 아이 엄마의 표정이 말했다. '왜 저래!!'.. 모자의 장단에 쓸데없이 놀아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었지만, 닥친 상황을 일단락해야 했기에 아라는 억지 반달눈을 만들어 헤벌쭉 웃었다. 그러기를 얼마, 생각 하나가 퍼뜩- 스쳤다. '저 여자라면 웃는 얼굴에 침을 사발로 뱉고도 남을 테지.' 이에 아라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잡힌 손을 떼어내려 부단히도 노력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포기한 듯 아이 엄마는 뒤를 돌았다. 어찌나 힘 있고 절도가 있었던지 그 바람에 흙먼지가 훅- 올라왔다. 조심스레 시작한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신체의 곡선을 한껏 살린, 몸에 착 붙은 검은색 상의 재킷이 성난 춤을 추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것인지, 제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몸을 돌려 불현듯 하는, 그녀의 주시는 여간 불편했다. 차라리 조금 전, 고삐에 묶인 말 신세가 나을 듯했다. 피붙이도 아닌 이방인의 손을 왜 잡은 걸까? 아이의 생각을 읽으려 손을 움직였으나 잡은 손에 되레 힘을 가하며 아이는 대답을 대신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안심하려는 찰나, 몸이 불편한 노인을 앞세워 이를 돕는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인신매매 수법을 전해 들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비록 등장인물과 상황은 뒤죽박죽이라 한들, 약자를 앞에 세워 모성애를 자극하고 있지 않은가!! 즉, 극의 현상은 달라도 악의 본질이 같다면? 혹여 아이가 '맑은 눈의 광인'이라면?? 퍼컬러는 저만큼 뒤로 물러나 있었고,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숲길에 접어들었다. 군집한 이름 모를 꽃들과 어지럽게 뭉쳐있는 덩굴뿐이었다. 시간을 들여 발품을 팔아 빌라 곳곳을 이 잡듯 뒤졌는데, 이런 곳이 있었다니? 뭔가 단단히 틀어진 듯했다. 불안감은 성난 파도가 되어 밀어닥쳤다. 나름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어깨에 맨 에코백을 뒤졌으나 괜한 허탕질을 했는지, 아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김진호."
속삭이듯 아라가 말했다.
"왜?"
진호 역시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급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왜 작게 말해?"
"중요한 얘기라서."
이에 진호는 즉시 아라의 입 가까이로 제 몸을 기울였고, 손을 말아 쥐어 제 귀에 가져다 댔다. 보태어 안심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비스킷 남은 거 있어?"
"없어."
벼락같은 진호의 목청에 저만치 앞서 걷던 아이 엄마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반갑지 않은 그녀의 시선에 진호는 괜스레 목청을 다듬었다. 제 머리 위 뚫린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라 아이에겐 피해가 없었는지 몰라도, 관을 타고 세차게 쏟아붓는 수돗물처럼, 제 귀 안으로 오롯이 들어온 천둥소리를 맛본 아라는 그저 아연실색했다.
"있어도 없어."
놀란 토끼눈을 한 아라에게 진호는 호되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은 아라는 입을 벌렸다. 그렇지만 끝내 말을 잇지는 못했다.
"8헥타르가 얼만큼인지는 당최 모르겠지만, 호텔 빼고는 다 보았다 생각했는데 지금 걷는 길도, 주변도 죄다 처음이잖아. 혹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쳐, 아니 왠지 그럴 것만 같아. 곤경에 빠지면 초인적인 힘이 생기는 누군가와는 달리 정신줄을 놓는 사람이 바로 나야. 해서 흔적을 남기는 것이 현 상황에서 최선일 듯싶어. 요는, 김진호는 적을 교란시키고 나는 퇴각로를 맡고.."
혹여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싶은 아라는 소곤거렸다.
"안타깝게도 없어."
진호의 목소리가 절망적이었다.
"젠장."
아라의 목소리가 한탄조였다.
"욕심껏 먹은 사람이 누구더라? 애당초 이 사단을 만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닌 듯하고."
"내 잘못이라 이미 말했잖아."
"언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야 아나? 나야 괜찮지만 김진호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잖아. 지금."
"퍽이나."
"비아냥거리지 마."
"숫자는 같지만 우리가 유리해. 여차하면 김진호는 여자를 맡아. 그리고 구두를 뺐어. 난 아이를 인질로 잡을게. 계모가 아닌 이상 자식을 앞세울 수는 없어. 피부색은 달라도 모성애의 본질은 같을 테니 말이야."
그러나 진호는 대답이 없었다. 차근하던 아라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난 미필에 여자잖아. 나라의 안전 앞에 노인과 여자, 아이를 먼저 두는 게 전시 상황 군인의 임무 아냐?"
"그렇게 보면 저들이 먼저가 아닐까?"
"대체 누구 편이야?"
"불가능한 임무야. 육군 참모 총장이 온다 한들 가능할까? '아줌마'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그들이 옥신각신하기를 얼마, 무성했던 초목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군집한 사람들이 보였다. 이미 노출된 상황이었고 되돌리기엔 늦었다. 자신들을 향한 수십 개의 눈동자에, 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님,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