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58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걸음 하나를 디딜 때마다 아라의 고개는 시계추처럼 까딱였다. 대놓고 마주할 자신이 없던 터라 시간차를 두고 흘긋거리는 차선책을 택했다. 분명, 한바탕 거센 폭풍우가 몰려올 거라 예상했는데, 두둑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저 걷기만 할 뿐, 진호는 별반 말이 없었다. 그러기를 얼마, 내내 닫혀있던 진호의 입술이 스륵- 벌어졌고, 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아라는 발 하나를 바깥쪽으로 슬그머니 던지며 최대한 티 내지 않고 그와 틈을 벌렸다.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은 곧 남과 북으로 나뉘었고, 두 동강 난 땅으로는 모자라 사상 역시 반토막되어 공산당과 국군이 한창 대치 중이었어. 그리고 여기 슬프지만 감동적인 사연이 있어. 공산당이 되고자 스스로 입산한 아무개의 늙은 노모 살아생전의 소원은 하나, 대를 이을 손주를 보는 것이었어. 생각해 봐. 며느리가 임신을 하자니 빨갱이로 몰릴 테고, 아들이 하산을 하자니 그 즉시 잡힐 것이 뻔하고,, 이에 늙은 노모가 머리를 부여잡기를 얼마 묘책 하나가 번뜩 떠올랐지. 그 즉시 노모는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계엄사령부의 대장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호소했어. 딱한 사정임에는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단박에 고개를 주억일 수 없던 군인은 일단 노모를 안심시켜 귀가시킨 후, 여러 의견을 토대로 노모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해. 이에 그는 입산한 공산당과 평소 친분이 있던 마을의 학교 선생을 통해 사정을 전달했고, 공산당들 역시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노모의 소원을 이뤄주려 했지. 평행선만 같던 그들은 이념도, 사상도 뒤로한 채 모처럼 한마음이 되었고, 결국 노모의 며느리이자 공산당의 젊은 아내는 남과 북의 합의하에 입산을 하게 되지."

지긋한 진호의 시선과 멀뚱한 아라의 시선이 말없이 만났다.

"뜬금없기는."

머물러 있는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아라가 꺼낸 말이었다.

"방향을 잡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음 해서랄까?

말투로나, 자세로 보아 진호는 물러서지 않으려 했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이만하면 돌부처도 돌아 앉겠다."

다분히 장난기가 밴 말투였지만, 으레 그러려니 넘기는 것은 아닌 듯하여, 아라는 진호를 빤히 보았다.

"그렇다고 이 말에 동하지는 말고, 뭐 그럴 사람도 아니지만. 구걸이나 동정의 선상에 사랑을 두어서는 아니 되니."

"김진호."

어색한 분위기를 덮거나, 머쓱한 상황을 엎거나, 정 다급할 적에,, 수차례 써먹었던 입증된 방법인 그의 이름을 다시금 들먹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꽤나 적절했고 유용했다. 단, 비겁함은 오롯이 제 몫이었지만 말이다. 눈치가 젬병이 아닌 진호였기에, 이를 재깍 파악하고 곧추 세웠던 제 마음을 스스로 꺾었다.

"전쟁 중이지만, 그럼에도 꽃은 피고 사랑도 있더라는..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맞아. '여명의 눈동자', 역사 드라마이며 각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방점은 '사랑'이더라는."

얼결에 핸들을 거머쥔 아라가 이때다 싶어 엄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고, 진호는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꽤 오래전 드라마 아냐?"

"자그마치 36부작에,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하여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6.25 전쟁까지 다룬 시대극이야. 원래 일간 스포츠에 연재되었던 소설을, '모래시계' 사단이 재구성해 어마한 시청률을 뽑아낸 걸작이었지."

"엄청 자세하다. "

"그게,, 말도 마. 보길도 사촌 언니의 최애 드라마였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었지. 소설가를 꿈꾼 본인은 그렇다 쳐. 그때는 몰랐는데.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 비슷한 거였어."

"그건 또 무슨?"

"내 또래의 느낀 점이 궁금하다나? 어찌나 거미줄을 치던지. 해서 보았지."

"고아라가 그리 순한 양이었다고? 핏줄이라 그런가?

"방송국에서 잠깐 일 했었어. 동방신기 싸인을 툭 던지길래 덥석 물었지. 그런데 '인기가요'는 개뿔, '터닝 포인트 사랑과 이별'이라고 거기 작가였어. 심지어 동방신기 데뷔 전에 종영된 방송이더라고. 분한 마음에 따졌더니 그 바람에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물론 애국심 고취까지 이뤘는데 불평이 웬 말이냐며 되레 큰소리잖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전쟁 드라마와 사랑과 이별은 어째 동떨어진 느낌인 듯. 그건 그렇고 깜박 속았다고?"

"작정하고 덤비는데 이길 재간이 있나. 띠동갑인 만만한 꼬맹이 상대로 가오 잡았던 거고, 자기 합리화였지 뭐. 내 비록 볼품없는 애벌레이나 언젠가는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고 날으리라. 뭐 그런.. 평생 대필 작가나 하라고. 살면서 처음 해본 악담이었어."

"와!! 고아라. 세다. 말이 씨 된다고."

"근데 중요한 건, 이제껏 입 밖으로 뱉은 말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거지. 아무리 화가 났어도 팔은 안으로 굽지. 안 그래?"

진호는 껄껄 웃었다. 그러기를 얼마, 웃음기를 대번에 지우고는 단호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보길도 사촌 얘기로 내 본질을 덮을,, 그런 얼렁뚱땅한 꼼수는 집어 쳐."

제 진심이 묻힐까 싶은 진호는 다시금 돌을 던졌고, 때아닌 그 분위기에 아라는 적잖이 애간장이 탔다.


낮때의 기세등등했던 태양의 화력은 한 김 식었고 내내 꼿꼿했던 사람들의 어깨 역시 한풀 꺾여 있었다. 긴장감이 감돌던 공기의 질감 역시 한결 느슨했고, 재게 걸음을 걷는 모양새에는 변한 것이 없었으나 분명, 아침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 시간의 흐름 앞에 자연과 인간은 납작 엎드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손발을 맞추었고, 이에 깜짝 놀란 찬란한 빛은 냅다 꽁무니를 빼 달아나, 하필이면 푸른 바닷물에 걸터앉았다. 폭발할 듯 농염한 해와 깊고 푸른 바닷물로 인한 색의 대비는 확연히 달랐고, 그것은 외려 강렬하게 와닿았다. 실로 묘한 그 광경에 간간이 시선을 박은 사람들과는 달리 차창에 머리를 의지한 채로 아라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전쟁 중이지만, 그럼에도 꽃은 피고 사랑도 있더라는.. 그 말을 하고 싶었어.'


상대의 꼬리를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뱅- 원을 그리는 고추잠자리처럼, 진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며 가며 툭- 던진 얘기 같았으나, 필시 그것은 은연중에 내비친 본심이리라. 알게 모르게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해오고 있었고, 더 이상은 답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상념이 깊고도 깊은 곳으로 아라를 추락시키는 사이 SITA 버스는 종착역인 포지타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아라 역시 움직였다. 멈춰 선 버스에서도, 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도,, 점만한 여운 하나 묻어있지 않았건만, 아라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마치 아이 두고 가는 어미처럼 땅을 딛었다 떼는 그 걸음에서 납덩이같은 묵직함이 엿보였다. 그것은 마치 흰 도화지 위로 불시착한 검은색 물감의 흔적과도 같아,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져 종내, 혼자서만 도드라져 보이는 오점만 같았다.


숙소 근처 Chiesa nouva 대신 Spiaggia Grande 해변과 가까운 sponda에서 하차한 이유는, 포지타노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함이었다. 먹고자 하는 것은 물론 가고자 하는 곳 역시 뚜렷하지 않았기에 터벅터벅 걷기를 얼마, Music on the Rocks은 등 뒤로 밀려나 있었다. Via del Brigantino를 따라 걸으니 Restaurant L'incanto의 바다 조망이 가능한 야외 테이블과 맞닿았다. '레몬 딜라이트'가 이곳의 시그니처라던데.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진호였건만 여전한 걸음폭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동안이야 그렇다 해도 마지막에까지 옥신각신하고 싶지 않은 아라였기에, 아쉬움을 달랠 장소를 물색하려 눈을 크게 벌렸다. '파전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딱이련만..' 속된 제 욕심에 절로 고개를 젓던 순간 진호가 멈춰 섰다. 이에 좌우를 살펴본들 Spiaggia di Positano Marina Grande의 모래사장과 이름 모를 누군가의 집 사이로 난 Via del Brigantino의 한복판이었을 뿐, 요동치는 식욕을 달래줄 변변한 그 무엇 하나가 없었다. 궁금함에 아라의 고개가 번쩍 올라갔다.

"음악 소리 안 들려?"

귀를 쫑긋 세워, 집중을 해보아도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진호를 향했다.

"글쎄. 내 귀에는.. 어!! 박수 소리 맞지?"

고개를 끄덕이며 진호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했다. Via del Brigantino의 끝은 Via Regina Giovanna과 닿아 있을 뿐 아니라 Spiaggia di Positano Marina Grande의 모래사장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즉, 이 세 면이 만나는 지점에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기타 하나 달랑 걸치고 선 남자가 목소리를 뽑아냈고, 무리들은 그를 에워싼 채 박수를 치며, 발장단을 맞추고, 몸을 까딱이면서,, 저마다의 흥을 발산하고 있었다.

"거나한 상차림은 없지만, 노랫가락은 제법 풍성한데."

가사는 몰라도 들어 본 적 있는 팝송이었다. 아라가 입술을 달싹여 작게나마 음의 파동을 내보내었고, 이로써 암묵적 합의하에 기타맨과의 이중창이 된 셈이었다. 이에 질세라 진호는 어깨를 들썩이며 대열에 합류했다.

"근데 말이지. 그 꼬마는 왜 고아라 손을 잡았을까? 새삼 궁금해지네."

진호의 눈동자에 장난이 가득했다. 답을 원한 것 아닌 일종의 추임새였음을 눈치챈 아라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고, 그렇게 마주한 그들은 잠시 웃음을 교환했다.

"It's a song for lovers."

삼각형 모형의 기타 피크가 팽팽한 기타 줄 위에서 사뿐사뿐 노닐자 이에 울림통이 제 몸을 떨어 밝고 경쾌한 음을 토해냈다. 순음에 가까운 가공되지 않은 어쿠스틱은 솟구쳐 찌르는 전자음과는 달리 대지를 품어 안는 어머니의 품처럼 풍요롭고도 따듯했다. 기타맨은 약속을 지켰다. 냇킹콜의 'L.O.V.E'였다. 첫 벌스에 이미 끝이 나는 노래, 사랑하는 사이라면 불러 주고 또 듣고 싶은,, 즉 사랑하고 있는 자들에게 헌정되는 곡이었다. 까마득한 높은 하늘에는 여전히 짙푸른 색이 역력했건만, 한데 모인 연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부끄러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L is for the way you look at me

O is for the only one I see

V is very, very extraordinary

E is even more than anyone that you adore can


그러나 돌연 기타 소리가 멎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의아했다. 저 먼 하늘 역시 궁금했는지 잔뜩 몸을 웅크렸고, 그 바람에 좀 전보다는 한층 짙어졌다.

"This is song for you."

알파벳을 깨친 자라면 누구나 알 테지, 사랑 노래라는 것을,, 제목에서도 대놓고 말하고 있으니,,, 청중이 다 아는 그 사실을 기타맨은 굳이 짚고 있었다. 아라와 진호를 가리키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 약지를 흔들었다.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말이다. 어둑한 저녁 바닷가에 마주 선 채로 웃음을 교환하는 남녀, 왼손 약지에 자리 잡은 반짝이는 금속물질..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그의 눈엔 묵주반지 아닌 보통의 반지로 보였으리라. 그로 인해 제 딴에는 연인 혹은 부부로 오해했으리라. 군중의 시선이 몰려왔다. 장승처럼 선 진호는 그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연코 그것은 강한 부정이 아닌 쑥스러움의 표현으로 보였으리라.


L is for the way you look at me

O is for the only one I see

V is very, very extraordinary

E is even more than anyone that you adore can

Love is all that I can give to you

Love is more than just a game for two

Two in love can make it,

take my heart and please don't break it

Love was made for me and you


잠시 멈췄던 기타맨이 다시금 목청을 돋우었다. 기타맨은 목소리로, 군중은 시선으로 아라를 옭아맸고, 그리고 진호는 구경꾼인 양, 그저 멀대처럼 서서 이를 관망할 뿐이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어린놈이나 나이 먹은 놈이나 죄다 고아라만 보는 것이."

차라리 말이나 말지. 참다못한 아라는 결국 터져버렸다.

"김진호는 가마니야? 가만히 있게?"

"지폐뿐이었고, 그걸 던질 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고."

말없이 아라는 노려 보았다.

"답이 틀렸구나. 설마 그들이 오해한 것 때문에? 내가 잠자코 있어서?

"유치한 건 내 진즉 알았지만, 왜 이리 두루뭉술해?"

이 말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진호의 음성은 껑충 뛰었다.

"내동 가만히 있다가 뒷북은 왜 치는 건데?"

잠시 숨을 고르고 진호는 이어 말했다.

"좋은 기분 틀지 말고 그냥 가자."

말없이 빤히 보는 아라의 시선에 참다못한 진호가 폭발하였다.

"이만치 했으면 돌부처도 돌아 앉겠다."

"뭐?"

말꼬리는 올라갔으나, 마치 철퇴에 맞은 듯 무너지는 투였다. 힘없이 닫히던 아라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도끼질 열 번 했으니 넘어가야 해? 그러길 바라니?? 동정이나 구걸을 사랑의 선상에 두지 말라 했나? 일방적인 것도 주입에 의한 것도 온전한 사랑은 아닐진대."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 느닷없는 장소에서 발생한다. 그 슬픈 예감은 한 치의 오차가 없고, 악역을 맡는 누군가에 의해 결국 끝이 난다. 안타깝지만 이번 역시 제 역할임을 아라는 즉각 감지했다.

"나를 향한 너의 자리가 거기고, 너를 향한 나의 자리가 여기인 거야.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으나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애당초 좁혀질 수 없는 거리였던 거지."

"... 그만하자."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였다. 만약 여기서 등을 돌리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만 같은 확고함이 느껴졌다. 혹여 발걸음을 떼면 벌어진 만큼의 거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진호의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간간이 뱉는 숨소리는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저였더라면 분명 아팠을 텐데. 고개를 내리깔기는커녕 속눈썹 하나를 깜박이지 않은 채 빤히 보는 시선은 물론, 물러날 줄 모르는 아라의 태도가 싫어,, 진호는 크게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