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59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족히 사람 하나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한참을 걸으니, 익숙한 계단과 손때 묻은 출입문이 나타났다. 정확히 어디서부터였을까? 대화는 고사하고 눈빛 한 번을 주고받지 않은 채 각자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만 반복했다. 장시간 그대로였는지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것은 고작해야 숨소리가 전부였던 그들 사이의 정적을 단번에 깨트렸다.

"먹을 거 사 올게. 먼저 들어가."

통보하듯 진호는 말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몸을 틀어 등을 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아라가 손을 뻗었지만 진호는 어느새 계단 저 아래로 몸을 숨겼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를 애써 좇으며, 아라는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지금 제 할 일은 이것뿐이라는 듯 말이다. 그러기를 얼마, 열린 문 안으로 제 몸을 욱여넣었다. 막힌 실내는 어두컴컴했고, 한데 응집된 공기는 묵직했다. 그것들의 위세에 휘말리지 않으려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다. 파랏- 점등은 되었건만, 광속이 문제인지 전구의 수명이 문제인지는 몰라도 흡사 약을 올리듯, 조명은 서서히 물들어 갔다. 거실 한편에 놓인 소파를 지나 복층의 제 침대까지 달리다시피 하여 한달음에 도착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대충 엉덩이를 걸치고 텅 빈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건만, 정작 그는 없었다. 휑한 집에 덩그러니 놓인 제 처지에 괜스레 서글퍼졌다. 혹여 있을 불상사를 염려하여 서둘러 자리를 피한 진호의 의중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제 심정이 이러한데 그 홀로 신이 났겠냐만은,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만하자'는 진호의 말은 뾰족한 창이 되어 다시금 아라를 찔러왔다. 이윽고 눈물은 그렁그렁 차올라 금방이라도 넘칠 듯했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몸이 풀석- 침대로 주저앉음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려 결국, 하얀 면시트를 적시고야 말았다. 얼마나 지난 걸까? 여전히 침대 위였다. 몸을 곧추 세워 바라다본 통창은 잠식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사투 중이었다. 실내는 여전히 고요했고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어둠이라니? 그렇다면??

'그가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은 몸을 반 자는 기울여 전진을 위한 자세를 만들었다.

'알프레도면?' 실망한 마음은 앞서 나간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온 건 맞지만 다시 나간 거라면?'

그렇다면 영영 이별일 테지. 다급한 마음은 생각을 멈추었고, 계단을 타게 하여, 이윽고 진호의 방 앞에 이르도록 조종하였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커녕, 바스락대는 인기척 하나가 없었다.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할 뿐, 그것을 잡고 시원스레 돌릴 용기는 없었다. 앉았다 서기를 반복하며 줄기차게 신호를 보냈음에도 그의 방은 침묵했다. 졸지에 끙끙- 앓는 강아지 신세가 된 것만 같은 그 처량함에, 등을 돌려 주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근거리인데다 드러내지 않고 염탐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딸깍- 소리에, 어둠은 일시에 빛으로 바뀌었다. 곧장 시선이 닿은 식탁 위로는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납작 복숭아였다. '못생겨도 맛은 좋다'며 선 자리에서 두어 개쯤은 뚝딱 먹어치우는 자신을 보던 진호의 시선을 기억해 냈다. 단연코 그의 소행이리라. 이에 주체할 수가 없던지 아라는 털썩- 주저앉았다. 잠잠하던 아라의 양어깨가 성난 춤을 추었고, 진동은 이내 번져 몸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삼켰다가 토해낸 설움은 주방 안을 뒤흔들었고, 연거푸 떨어진 눈물은 마룻바닥에 깊게 새겨졌다. 지워도 지워도 종내, 흔적이 남는 붉은 핏자국처럼 말이다.


서슬 퍼런 칼날과도 같은 어슴푸레한 빛이 드리워졌다. 몸을 이리저리로 움직였으나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셈이었다. 지금이라고 청해질 잠이 아님을 알기에 앓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저녁나절부터 이어진 통곡과 밤사이 지속된 불면은 몸의 기운을 빼앗고 눈의 평온함마저 앗아갔다. 모래를 한 줌 넣은 듯 까끌하고 뻑뻑한 불편함은 인공눈물을 절실히 요구했으나 안타깝게도 수중에는 없었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눈꺼풀의 붓기를 가늠해 본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녹인 설탕에 식소다를 때려 넣어 휘휘- 저은 시점처럼 천정부지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에 다급해진 아라는 빠르게 계단을 타고 주방으로 진입해, 냉동고 손잡이를 잡아당겨 엊저녁 미리 넣어둔 스테인리스 수저 두 개를 꺼내 솟아오른 눈두덩이에 가져다 댔다. 생경스러운 냉기에 오소소- 몸은 떨었다. 순간의 떨림은 오래가지 않아 잦아들었지만, 눈은 여전했는지 눈물을 흘려보냈다. 또르르- 볼을 타고 내린 서글픔은 입술 언저리에 닿았고, 그마저도 파르르- 떨게 했다. 그 울림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으나 힘으로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크게 일렁이는 입술의 움직임에 결국, 눈두덩이에서 수저를 떼고 젖은 제 얼굴을 거칠게 훔쳤다. 그러고는 다시금 냉동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수저 놓을 위치 파악에 집중하다 보니 머리를 조금 들이민 셈이었지만, 그로 인해 수저는 자리를 잡았다. 이제 냉동고 문이 닫혀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냉동고의 열린 문도 그 안으로 들어간 아라의 머리통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기를 얼마 터져 나온 눈물에 결국 아라가 주저앉았고, 복받치는 설움에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었다. 딴에는 위로랍시고 쌩쌩- 냉기를 내보내며 애석해하는 냉동고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하늘의 정중앙을 차지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는지, 제 꽁무니 챙길 여력이 없던 해가 훑고 지나간 흔적은 오롯이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고, 그 타는듯함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치 에어컨 실외기 지옥에 갇힌 것처럼 찌는 듯했고 후텁했다. 어떤 이는 챙이 큰 모자로, 누군가는 손 선풍기로, 다른 이는 레몬 셔벗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지독한 여름과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열에 기꺼이 동참한 듯, 아라는 까만 선글라스 차림이었다. 날씨가 후텁하니, 태양이 뜨거우니, 눈이 따가우니,, 새까만 선글라스 차림이 뭐가 대수겠냐만은, 장소가 틀렸다. 커다란 통창이 틈 없이 보초를 선, 게다가 사방이 막힌 실내였기에 그녀의 모습에서는 분명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간을 돌아볼 때, 내리꽂는 태양이 비단 오늘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었고, 피하기는커녕 되레 그것을 즐겼던 그녀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것도 실내에서??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들키기 싫어 부랴부랴 택한 방법이었지만, 그런 제 모습에 어색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리고 불편한 상황에 보태어 시선 둘 곳 없는 진호의 입장 역시 애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보통은 그렇다. '어려운 것은 처음뿐이다.',, 이를 증명하듯 선글라스 안에 감쪽같이 숨은 아라의 두 눈이 비겁하게 반짝였다. 씹어 먹을 듯한 자세로 진호의 모든 것을 꿰뚫려는 아라에 반해, 진호는 딱 보이는 만큼만을 엿보려 했다. 그것은 단연코 기선 제압을 위한 기싸움이었다. 제게 승산이 있다 생각되었는지 아라의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늦게 들어왔나 봐."

"자길래, 방해될까 싶어 되짚어 나갔어."

"복숭아 잘 먹었어."

진호는 말이 없었다. 딱 봐도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으나 그럼에도 다시 한번 두드려 보기로 했다. '지는 것 아닌 이기기 위한 수단'이라는 끊임없는 자기 암시를 걸면서 말이다.

"토스트 해놨어. 나는 먹었고."

보통의 그였다면, 계란은 어떻게 익혔냐고, 소금은 쳤냐고, 햄은 넣었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을 시점이었으나, 가타부타 말도 없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다는 의중이 반영된 건지도 모르게 말이다. 물론 예상치 못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시공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반응이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밤새 빽빽이 써 내려간, 달달 외운 대본은 한낱 휴지조각 신세로 전락했다.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비집고 들어갈 틈새 하나가 없는 냉담하고 꼿꼿한 진호의 태도에 아라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섣부른 행동과 어설픈 말로 되레 틈을 벌릴까 싶어 멀뚱히 선 채로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휘감은 정적이 싫었던 건지, 소득 없는 상황이 싫은 건지,, 한동안 멈춰 있던 진호의 발이 움직였다. 이에 다급한 마음은 목소리를 툭- 내보냈다.

"김진호."

멀어짐을 위한 발동작이 뚝- 멈췄다. 이미 방향을 틀은 진호였기에 아라의 시선에는 옆모습뿐이었고, 그의 시선 역시 온전한 그녀가 아닌 까만 선글라스의 형체만 도드라져 새겨졌다. 눈조차 마주하지 않으려는 진호의 태도에 급기야 울컥- 화가 치밀어, 아라는 여과 없이 토해냈다.

"나 먼저 갈게."

그제야 진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 섰다.

"페리 타고 간다며. 나는 버스 타고 갈 거야. 그러니까.."

"그래. 그럼."

분명, 그의 음성이었고, 그의 의중이었다. 그래? 그럼??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제 말허리를 뚝- 자르는 생경스런 진호로 인해, 화와 원망은 불길처럼 솟구쳐 올라, 이윽고 여름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묵주반지는 돌려줄게."

싸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아라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마자 묵주반지는 대번에 빠졌다. 기필코 건네고야 말겠다는 아라의 강한 의지는 이어진 진호의 말에 의해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냥.. 버려."

아쉬움의 포옹은 없었다. 그 흔한 악수조차 하지 않았다. 매 순간은 아니었지만 이별의 장면을 상상하곤 했었다. 맞잡은 손을 놓기 싫어, 눈가에 그렁한 아쉬움을 보이기 싫어, 어색한 이별의 순간을 티 내기 싫어,, 괜한 말을 던지고, 과한 몸짓을 하며, 돌아가서 보자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긴 채 그렇게 멀어지겠지. 그제야 깨닫게 된 혼자라는 외로움은 곧추서 저만치 걸어가다 괜히 뒤를 돌아보게 하고, 이쯤이면 안 보이겠다 싶어 아예 몸을 돌리게 하여 보이지도 않는 그를 좇겠지. 쉬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달래어 터덜터덜 기차에 올라 종내, 복받치는 설움에 흐느낄 테지. '슬퍼서 아름다운 건지, 아름답기에 슬픈 건지'를 두고 하릴없이 재고 또 따지겠지. '아프겠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우리라.' 불 꺼진 연극 무대의 어느 여배우의 쓸쓸한 독백처럼 반추할 테지. 상상과 상념의 어디쯤인가를 정처 없이 방황하던 그녀에게 '현실'은 불청객이 되어 나타났다. 저만치의 상상과 닥친 현실 사이의 괴리감 앞에서 아라는 힘없이 무너졌다. 바짝 말라버린 마음이 툭- 터져 나왔다.

'너무.. 아름다운 꿈을 꾸었나 보다.'


마치 숨바꼭질 놀이라도 하듯, 집 안 어딘가에 꽁꽁- 몸을 숨긴 진호에게 하는 마지막 항의라도 되는 듯,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라의 기억은 거기서 멈추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숙소 근처의 SITA 버스 정류장인 Chiesa nouva였다. 의식은 '왜였을까?'라는 의문조차 되새김하기를 거부했고, 휑한 눈동자는 기세등등한 푸른 바닷물을, 티끌 하나 없는 청명한 하늘을, 웃음기 만연한 사람들 하나하나를,, 쓸어 담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다. 때마침 소렌토행 버스가 들어왔고 그로 인해 종종걸음을 걷는 여타의 무리와는 달리, 아라는 먼 산만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제 차례가 머지않았음에도, 도통 움직이지 않기에, 이를 보다 못한 뒤에 선 이들이 그녀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에 아랑곳 않음은 물론, 서둘러 떠나는 버스의 꽁무니만 바라볼 뿐, 흡사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망부석이 된 설화 속의 아내처럼 옴짝달짝도 않았다. 정작 가야 할 곳도, 그 목적마저도 잊었다는 듯 말이다. 그 순간, 경고의 일침을 날리듯 저만치에 떨어진 해가 찌릿- 빛을 쏘아댔고, 이에 왼손 약지의 묵주반지가 감전된 듯 찌르르- 떨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온기라고는 하나 없던 그녀에게서 대번 생기가 돌았다. 이내 그것이 혈관을 타고 순한이 되었는지, 신경을 건드려 기폭제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로써 아라가 반응했고, 왔던 길 되짚기에 열을 올렸다. 가파른 계단 따위가, 폭이 좁다란 미로 같이 이어진 골목길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거침없이 내딛는 발걸음에 방해꾼이 되기 싫은지, 일정한 힘의 세기로 탄력을 받은 두 팔은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며 연거푸 흔들렸다. 마치 만개한 돛이 순풍을 만나 미끄러지듯,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러기를 얼마, 익숙한 대문 앞이었다. 크게 보폭을 떼었지만 곧바로 반 자를 물렸다. 손잡이에 성큼 손을 얹었으나, 그것을 잡아 돌리지는 못했다. 목청껏 그의 이름을 외치려 하였으나 정작 모기 날갯짓 하는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몸의 기운을 짜내고,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었건만 결국,,,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나를 위한 너의 자리가 거기고, 너를 위한 나의 자리가 여기인 거야.'


쓸데없었던 자존심의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쉬이익- 쉬이익- 소리가 몇 차례 반복되고, 무딘 칼날은 숫돌 위에서 날카로운 비수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곧장 날아올라 아라의 가슴 한복판에 정확히 박혔고, 제풀에 꺾인 아라는 주저앉는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칼날은 매섭게 파고들었다. 찌를 듯한 통증은 배가 되었고, 선혈은 낭자했다. 솟구치는 눈물은 짧은 가시거리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그나마 멀쩡한 머리카락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자비심이라고는 하나 없는 비수는 인정사정없이 비집고 들어와, 고통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지만, 그럴수록 몸을 죄고 또 옥죄었다. 이는 엉망진창인 제 모습에 오만정이 떨어진 나머지, 스스로에게 가하는 가혹한 형별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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