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60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애진작에 동은 텄지만 아직은 새벽, 까를교에 들어서서 첫 번째로 성 요한 네모무크 성상대고 소원을 빌어. 종일 관광객들로 인해 몸살을 앓는 성인상이나, 이때는 영업 전이라 줄을 서지 않아도 되니. 새벽 기도는 뭐다? 신의 응답이다!! 자 그럼 작정하고 소원을 비는 거지. 새벽녘에 영이 충만한 성인도, 첫 축복의 순간을 기다리는 신 역시도 그대의 절실함에 응답하실 테니. 그런 다음 스무 걸음 앞서나간 후 프라하 성을 등지고 서는 거야. 강 아래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 물안개로 인해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 그런데 말이지 희뿌연 안개를 헤집는 생경스런 힘의 파장이 느껴질 거야. 이윽고 목 없는 마부가 모는 마차가 당신을 향해 달려올 듯한 진풍경을 맞닥뜨리게 되지. 마치 <슬리피 할로우>의 한 장면처럼 말이야. 그러나 그것이 무섭고 괴기하다기보다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이 먼저일 테니. 색다른 까를교 체험을 원한다면 단언컨대,, 상상 그 이상일 거야.'


으레 놀리는 것이리라. 거짓말이려니 여겼으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가 사실이었다. 블타바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로 인해 까를교의 상당 부분이 잠식되어 있었다. 흡사 누군가가 일부러 연출한 무대 장치와도 같았다. 짧은 거시거리 확보조차 어려웠다. 올드타운 브릿지 타워를 등지고 섰을 때, 서른 개의 성상 부조 중 성 요한 네모무크는 우측 열의 여덟 번째였고, 그곳에서 정확히 스무 걸음을 걷자 이어진 대열의 열한 번째, 1708년에 제작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후원자인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성상 부조에 다다랐다. Statue of Augustine of Hippo의 오른손은 불타오르는 심장을, 왼손은 지팡이를 쥐고 있었으며, 작은 천사가 왼쪽 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프라하 성을 등지고 섰다. 프라하의 수호성인이자 까를교로 향하는 이정표와도 같은 성 요한 네모무크 성상 부조가 아른거렸다. 같은 열의 여섯 번째인 세례자 요한의 성상 부조는 지독한 안개 속에 묻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저만치 떨어진 곳까지의 시야 확보는 가당치도 않았고, 자욱한 안개는 괴기하다기보다 되레 신비롭기까지 했다. 마치 솜사탕을 뚝- 떼어 덕지덕지 발라 놓은 듯한 그 광경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생경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마저도 사실이라면? 그러나 진호는 알고 있었다. 목 없는 마부가 모는 마차는 물론 아라 역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걷힐 생각 따위는 없는 듯한 희뿌연 안개를 망연한 듯 바라보며 급기야 진호는 울컥- 하고야 말았다.


Metro Abbesses역 외부로 향하는 돌계단은 Rue de la Vieuville와 Pl. des Abbesses와도 맞물려 있었다. 아베스 광장을 따라 걸으니 몇 그루의 나무가 전부인, 공원이라 부르기도 뭣한 쉼터에 가까운 공간에 닿았다. 이곳에 우뚝 선 Basilique du Sacre Coeur 성당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등지고 몇 걸음을 옮기면 HOTEL REGYN'S MONTMARTRE를 만난다. 이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몸을 꺾어 이어진 길을 걸으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일명 '사랑해 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직진을 하다 보면 빨간 뿔테안경 돌출 간판을 내걸은 안경점이, 그리고 익숙한 녹색 십자가를 내세운 약국이 연이어 있다. 이어 가게 두 곳을 지나치면 빨간 어닝의 LE VILLAGE이다. 인도에 버젓이 몸을 걸치고 있는 어닝과 테이블에 정신을 빼앗기면 낭패, 목적지는 바로 옆이니 말이다. 22 Rue des Abbesses, 75018 Paris 'Le Grenier à pain',, 길 찾기 난이도는 '상중하' 중 '하'에 속했다. 그마저도 이점으로 작용했는지 매장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월요일의 러시아워를 연상케 했다.


'1988년 오픈한 곳으로 파리 및 해외에 약 30개의 매장을 가진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임은 물론, 'Baguette de Tradition Française'에서 2010년과 2015년 두 번에 걸쳐 '최고의 바게트'상을 거머쥔 그야말로 권위 있는 빵집이다. 그 최고의 영예는 단순히 상금과 트로피로 끝이 아니라,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으로 매일 아침 약 50개, 총 1년 치의 납품권까지 거머쥐게 된다. 프랑스의 바게트 제조 기술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재 유산으로 등재된 것만 보더라도, 자국민이 매년 100억 개를 소비한다는 바게트는 이제 프랑스의 상징을 넘어선 것으로 일축할 수 있다. 좋은 바게트라 하면, 바삭거리는 겉과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속에 은은한 맛과 견과류의 향,, 이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제22대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바게트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으로 그가 파리 시장을 역임하던 1994년부터 '바게트 그랑프리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밀가루, 소금, 효모, 물, 오직 이 네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전통 바게트 중 요리법, 맛, 향, 모양 등의 측면에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승자를 가린다고 한다. 즉 상금 이전에 파티셰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대회이며 우승은 곧 최고의 명예와 직결되는 것이다. 파리는 스무 개의 지구로 나뉘어 있어, 각 '지구'의 경쟁 역시 큰 관심사이다. 2020년까지 몽마르트르가 속한 18지구에서는 무려 여섯 명의 우승자를 배출했다. 개인은 물론 지구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까닭으로 파티셰들의 경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치열해진다.'


마치 견학 온 학생을 대하듯, 차근차근 이어진 아라의 설명이었다. 매장 안, 이 모두를 알고 있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허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진호는 출입문을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수십 가지의 빵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네모반듯한 쟁반에 크로와상, 빵오쇼콜라, 피스타치오 에클레어, 그리고 바게트까지 야무지게 담았다. 계산을 마치고 매장 안을 휘 둘러보던 그때, 때마침 일어서는 누군가로 인해 빈 좌석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 엉덩이를 붙였다. 크로와상, 빵오쇼콜라, 피스타치오 에클레어,, 추천은 물론 먹는 순서까지 정해준 아라에게 순응하여 그녀가 읊은 순서 그대로를 쟁반에 담은 것이었다. 두 번에 걸쳐 '최고의 바게트' 상을 수상한 만큼, 이것만은 순번을 정해주지 않고 자유의지에 맡겼다. 가장자리에 놓인 길고 곧게 뻗은 그 위풍당당함을 덥석 베어 물었다.


'무얼 그리 자세히 알아? 그냥 먹으면 되지.'

'알고 맞는 매는 더 아프지만, 알고 먹는 음식은 꿀맛이거든.'


진호의 비아냥에 되레 핀잔으로 받아쳤던 아라였다. 이쯤 되니 비록 들어 익힌 지식이나 아라 못지않다고 진호는 자부했다. 크게 베어 문 바게트에선 바삭- 소리가 났고, 씹을수록 쫄깃거리긴 했어도, 손짓발짓을 해가며 아라가 강조했던 은은한 맛과 견과류의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돌아가고 싶은 그런 거 없어. 벗어 준 점퍼를 건네려 갔던 그 겨울밤의 생일자리로도, 기다린다는 메일을 받은 비엔나 민박집으로도, 여행 후 다시 만났던 그날로도.. '만약 그랬었더라면'하는 가정법에 대입해 보며 곱씹긴 했어도 결국 난 그러지 못했고 설령 다시 돌아갔다 한들, 여전히 똑같을 걸 아니까. 어렸고 철없던 20대에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상처받기 싫어 도망가기 바빴었는데 다시라 한들,, 그러기에 난 이미 세상에 그리고 나 자신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 걸..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나중에 어떻게 될까 걱정까지 해가면서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럴 만큼 순수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사람이라서. 지나온 과거, 현재도 그러했으니 아마 저만치의 미래에도 여전히 그러겠지. 그냥 난 지금이, 이대로의 내가 좋아.'


먹물을 쏟아부은 듯 바닷물은 어두웠고, 칠흑 같은 밤하늘에 박힌 별도 졸렸던지 거푸 끔뻑대는 바람에 흐릿하게 빛이 났다. 사람 기척 하나가 없어서 그런지 그 흔한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알프레도의 집 옥상에서 보게 된 지척의 풍경이었다. 저 위의 하늘도, 저 아래의 바다도,, 온통 컴컴하게 맞물려 있었고, 각양각색의 톤을 뽐내던 집들 역시 어둠 앞에서 납작 엎드려 있었다. 테이블 위 놓은 여려 개의 술병들, 씨만 남은 납작 복숭아의 흔적과, 내용물이 사라진 과자 봉지까지,, 까무룩 잠이 들어도 전혀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늦은 밤인 동시에 이른 새벽이기도 한 그런 시점이었다. 살아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다들 어둠에 그리고 잠에 취해 있었다. '후회하지 않냐는, 만약이 있다면'했던 진호의 질문에 되돌아온 확고한 아라의 입장표명이었다. 모두가 느슨해져 있음에도 그런 것 따위 아랑곳 않고 저 홀로 꼿꼿한 척하던 그 밤의 그녀를, 그 말들을 곱씹느라 바게트를 잠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길쭉했던 바게트는 어느새 반토막이 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은은한 맛도 견과류의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애달픈 마음이 속절없이 튀어나왔다.

'거짓말쟁이.'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이란 말은 다 옛말이었다. 뚜렷한 여름과 겨울에 비해 봄과 가을은 '스치듯 안녕'하는 것이 현 상황이었다. 막바지 휴가가 한창인, 막판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흡사 지옥불과도 같은 화력을 자랑하는,, 저만치서 말복이 기다리는 7월의 끝자락 것도 한낮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화두가 되는 시점이긴 하나, 그럼에도 서유럽의 날씨는 아직은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심 속 카페의 야외 테이블은 내리꽂는 태양을 이고 지며 홀로 사투 중이었고, 막힌 실내의 밀집한 사람들은 에어컨의 차가운 숨결에 환호를 하며, 약속이라도 한 듯, 차가운 음료를 빨아대고 있었다. 잠시나마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세상과는 다른 그 생경스러움에 현혹되지 않으려 아라는 익숙한 그녀들에게 시선을 꽂았다.

"아라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테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바쁜 시간 낸 보람은 있어야 할 텐데."

"난 언니 취향을 믿어. 자신에게는 박해도 남에게는 후하니까."

"민혜는 왜 꿀 먹은 벙어리야?"

"주임님도, 외출도 오랜만이라서요."

"회사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주임이야."

M사 매니저를 그만두고 약 3년 간 일했었던 대형 서점, 전 직장 동료들과의 자리였다. 속초 밤바다의 추억을 나눈 사수였던 정애와 은성 그리고 민혜가 늦은 귀국 환영회 겸 한참 이른 연말 모임이라는 명목하에 안 오고는 못 배기는 자리를 마련한 셈이었다. 정애와 은성은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고, 네 살 아래의 민혜는 가정이라는 평생직장과 독박육아로 인해 탈출구 없는 현실에서 바득바득 애를 쓰고 있었다. 세상은 바뀌었건만, 인식은 급물살을 타지 못해 직장 여성에게 있어 '결혼'은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해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한 정애와는 달리 대학을 졸업하고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이력서를 낸 민혜는 그야말로 생초보였다. 중이 제 발로 절을 떠난다면 막을 도리가 없지만, 싫어지게끔 방조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된다. 포근히 품어주는 것 따윈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불씨를 던져 놓고는 뒤에 숨어 방관하는 태도는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그녀들의 급습을 받은 그날은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긴 했으나 아직은 여름밤이었다. 상가 밀집 지역이었음에도 마감 시간이 코앞인지라 커피숍 안은 한산했다. 출입문 열리는 소리는 가득했던 정적을 산산조각 냈고, 반가운 손님이려니 내심 바랬던 일말의 기대마저 와장창- 깨트리고 말았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반가웠으련만,, 이미 한 잔 걸친 모양인지 불그스름한 색을 덕지덕지 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걸음걸이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매장 한편에 자리한 시계는 막 10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삼겹살에 소주 반 병은 너끈히 털어 넣었을 시간이었다. 그간 반복된 훈련의 결과였으며, 실로 대단한 학습의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셋 다 빼어난 미인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나이로나, 피부 상태로나, 몸매 면에서 볼 때,, 동성인 아라의 눈에도 민혜는 그럴싸해 보였는데, 그런 민혜가 오늘은 제일 상태가 안 좋았다. 여자의 촉은 정확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고 은성이 툭 뱉었다.

"고아라, 민혜 오늘 사표 냈다."

대학 후배이며 회사 선배이기도 한, 한 살 어린 은성의 술버릇이었다. 회사에서는 지나치게 깍듯하기에, 또 사회에서 위아래 두 살까지는 친구를 먹는다 하니 아라는 이에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기점'이 문제였을 뿐, 민혜의 퇴사는 기정사실이었다. 결혼을 목전에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민혜에게 정애는 '임신'이라는 카드를 던졌다. 결혼과 육아의 원대한 사명이 아니라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라는 타이틀보다는 오롯한 자신으로 20대를 끝맺음했으면 하는,, 결혼 선배이며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이었다. 이에 저울추가 표나게 기울었다 들었는데, 더군다나 결혼 전이 아닌가!! 뜬금없는 그 소식은 그들 만큼이나 아라에게도 충격이었다.

"사직서를 내자마자 처리해 주겠다고, 그래도 청첩장은 보내라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에이, 치사한 놈들, 내가 그런 회사를 다닌다. 그런 회사의 주임이고 여기는 과장이시란다."

손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마치 제 앞에서 짝을 잃은 맹수처럼 은성은 울분을 토해냈다. 애먼 정애까지 들먹이면서 말이다. 우는 아이 달랠 때는 사탕만 한 것이 없듯, 술 취한 손님에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답이었다. 이는 그간의 밤 근무로 터득한 커피숍 종사자의 짬이었다.

"일단 먹고 있어. 빛의 속도로 정리할 테니."

서둘러 자리를 옮긴 곳은 평소 민혜의 달골 포장마차인 '이모네'였다. 회사 근거리에 있어 든든히 배를 채운 후 휑한 마음을 달래려 그녀들이 종종 찾던 곳이었고, 민혜의 예비 신랑이 합격 통지서를 받은 장소이기도 했다. 저 아닌 제삼자의 관점이 필요하다며 민혜는 도움을 청했었다. 혹여 그녀들이 불통을 외친다 한들 헤어질 결심 따윈 없었겠지만.. 민혜의 간곡한 청에 얼굴이나 보자고 나간 자리였는데 웬걸, 반듯한 인상에 우직해 보이기까지 했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 거나하게 취한 손님의 고성, 미닫이 문이 열리고 닫히는 등의 잡다한 소음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제 앞의 민혜에게 시선을 두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의자의 끝부분에 살짝 엉덩이를 걸친 것이, 몸의 중심마저 민혜를 향하고 있었다. 혹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입김 한 번이면 필시 그녀에게로 닿을 듯한 위태로운 그 몸짓은 아라의 머리를 크게 때렸다. '사랑을 하면 저런 모습이리라'

은성이 놓은 술잔이 테이블과 부딪혀 탁한 마찰음을 냈고, 그 바람에 아라의 상념도 끝이 났다.

"얍삽이 김계장이 하는 일이라곤, 윗사람 비위 맞추는 것 밖에 더 있어? 그러면서도 또 진급은 따박따박하지."

은성은 대학 입학식 사진뿐, 학사모를 쓴 졸업식 사진은 없었다. 졸업을 한 해 앞두고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형편은 장녀의 책임감을 곧추서게 하였고,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을 곱씹으며 허울 좋은 4년제 사립대학의 감투를 스스로 벗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경력 없는 사회 초년생이 가진 선택지는 얄팍했고, 여기저기 발 담그고 살던 중, 지역에서 인지도 있던 대형 서점이 낸 '신학기 단기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에 지원한 것을 계기로, 퇴사하는 직원의 빈자리를 꿰찬 것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스물여섯 아라의 입사 당시, 은성은 버젓한 선배였다. 비록 졸업장은 없었지만, 대학 동문이라는 인연의 끈은 실로 튼튼했다. '학연'과 '지연'은 괜한 말이 아니었고, 암묵적 합의하에 사회 요소요소에서 끊이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졸업장에 대한 아쉬움은 없냐는 아라의 물음에, 본디 꿈은 영화감독이었으나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유로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인데, 알다시피 지방대 경영학과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며, 더군다나 물려받을 사업장 역시 사라졌으니, 맘 놓고 자신의 길 가라는 하늘의 뜻인 듯하다며 되레 덤덤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비록 서점 월급이 박봉이라 경제적으로 후달리기는 해도, 그에 반해 시간이 널널한 편이라 시나리오 작업하기 딱일 뿐만 아니라 공짜 책 읽으며 사람 연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며 호탕하게 말하던 그녀였다. 영화도 책도 결국 사람 사는 얘기 아니겠냐며 그간 자신의 경험에 연륜을 보태면 그것이 곧 작품 아니냐며,, 다부지게 뱉던 은성의 당당함 앞에서 되레 아라는 부끄럽기만 했었다.

김계장이라면 아라 역시 아는 인물이었다. 그를 가리켜 아라는 '간신'이라, 은성은 '얍삽이'라 칭했다. 늦깎이로 입사한 탓에 감투 모양은 고만고만했어도 까마득한 윗사람이었다. 그 김계장이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을 했단다. 그리고 은성 역시 계장을 달았다 했다. '주임'에서 '계장'으로의 점프가 어렵지 '과장'으로의 도약은 비교적 쉬운 편에 속했다. '계장'을 단다는 것은 회사에 쓸모 있는 놈 이전에 회사에 남을 놈이라는 본인의 의지와 회사의 믿음까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입사 5년 차로 접어든 시점, 은성의 진급은 빠른 케이스에 속했다. 남자 아닌 여자라는 입장에서 볼 때, 정말 그랬다. 그러나 자신이 이룬 보다는 성과 보다 김계장의 진급을, 그 보다 민혜의 퇴사를 앞에 둔 은성이었다. 꼭 쥔 은성의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활화산처럼 치솟는 성질과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차마 뱉지 못한 속마음 한 자락을 허락도 없이 엿본 것만 같아, 아라 역시 동화되어 울컥- 화가 치밀고야 말았다.

"민혜 이번 진급에서 물 먹었다."

이어진 은성의 하소연에 이번에는 아라가 주먹을 불끈- 쥐고야 말았다.

"주임님!!"

내내 잠잠했던 민혜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사표는 냈지만, 인수인계 아직이니 남은 기간 동안은 제발 벙어리 삼룡이 하세요. 다들 있는 자리에서 약속하세요."

차근차근했으나 강단 있는 말투였다.

"실은,, 민혜 물 먹이고 유재수가 주임 달았거든. 고아라한테 허구한 날 지청구 먹던 그 유재수."

"인재가 그렇게 없나? 하아.."

말끄트머리에 아라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긴 탄식을 내뱉고야 말았다.

"고 주임님 계실 때랑은 사람이 달라졌어요. 나사 좀 풀린 게 흠이었지. 구김살 없고, 인성 좋고, 성실한 거는 사실이잖아요."

민혜의 말이었다.

"계속 아라 손에 두었어야 했는데."

내동 듣고만 있던 정애가 한마디를 보탰다.

"고아라가 깎고 보태고 한 것을 날름 주워다가 김계장이 리셋했다고. 지도 나름 라인을 구축하고 싶었던게지.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고. 여하튼 하는 짓거리마다 왜 다 그 모양인지."

유재수는 손이 많이 가긴 했어도 적어도 나쁜 놈은 아니었다. 아라의 퇴사를 빌미 삼아 조촐하게 마련된 술자리가 있던 그날도 먼저 다가와 잔을 건넸던 그였다.

'이제 유재수 세상이네. 버틴 보람이 있다.'

'그만 둘 마음도, 다녀야 하는 의지도 다 주임님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간은 다녀야 한다는 의지가 앞섰다면, 이젠 누르기 한판과의 힘겨운 사투가 아닐는지요."

비쭉한 자신의 비아냥에 돌아온 그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음날 유재수가 만든 상황 역시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빈속이죠? 저로 인해 술 한 잔이 늘었으니 속 달래요.'

200ML 흰 우유를 건네고는 멋쩍은 듯 이내 코끝을 쓸던 그 모습이 아라가 기억하는 유재수의 마지막이었다. 그런 그가 김계장과 한편을 먹었다? 납득이 되기는커녕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종' 자체가 다른 부류였다. 혹 김계장도 원래 호인이었으나 짊어진 삶의 무게에 눌려,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온갖 구린내가 묻어 그리 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러기엔 그에게선 선한 모습을 한 그 '찰나'의 순간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애당초 그가 악인이라는 명백한 증거였으리라. 아라가 '주임'이란 왕관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을 무렵, 회사에는 한바탕 칼바람이 불었다. 뜬금없는 인사 발령의 당사자는 외부인이었다. 심드렁한 평사원들에 반해 크고 작은 감투를 쓴 관리자들은 별안간 닥친 한풍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거래처 총판의 직원이었던 터라 서로 얼굴은 튼 사이였으나, 갑작스레 거행된 회사 방침에 반가움보다는 미묘한 신경전이 먼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임'은 고사하고 '계장보' 아닌 '계장'이란 감투를 단박에 썼으니 말이다. 서른셋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그간 총판에서의 경력을 고려한 처사라는 회사의 입장을 밝히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부장의 꽁무니에 대고 직원들 역시 수군거림으로 입장을 밝혔다. 아무리 그가 전 직장에서 기깔나게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렇다 해도 파격적인 대우임에는 분명했다. 차라리 그간의 업적을 낱낱이 공개했더라면 이리 억울하지는 않았을 테지. 그 막연한 기대치만으로 내린 황망한 처사에 '감 놔라 배 놔라'도 못하게 입을 막는 부당함에 몸 바쳐 일한 박힌 돌들은 부아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중 유독 정애가 그러했다. 과장 승진을 목전에 둔 시점, 경쟁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간 보기'를 하겠다는 선전포고이니 만큼, 힘으로도 일로도 지지 않으려 동동거리는 정애의 노력을, '여자' '엄마' '가정주부'라는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책 잡히지 않으려는 비장한 각오를,, 지켜본 아라는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 그를 택한 회사보다 덥석 미끼를 물은 김계장이 훨씬 미웠다. 다행히 회사는 눈 뜬 장님도, 해태 눈깔도 아니었다. 모두의 바람대로 정애는 과장을 달았다. 만약 반대의 결과가 나왔더라면 아라의 퇴사는,, 앞당겨졌으리라. 아라가 저만의 깊은 상념에 빠져 있을 무렵, 은성 역시 죄책감에서 홀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때 내가 말려들지만 않았어도.."

말끝을 잇지 못하고 은성은 스스로 잔을 채워 단번에 털어 넣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요전날 민혜의 휴무날이었더랬다. 민혜의 부재를 핑계 삼아 김계장이 결혼에 대해 캐묻기에 자신은 들은 바 없을뿐더러, 당사자에게 물으라며 데면스레 대했더란다. 그 시답지 않은 대화가 민혜의 진급에 영향력을 행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했다. 입사뿐 아니라 성과면에서도 월등히 앞선, 누가 봐도 진급 대상인 민혜를 제치고 후보 축에나 간신히 이름을 올린 유재수가 감투를 썼다?? 여기에는 분명, 김계장의 모략과 자신의 인일함이 밑바탕이 되었다 철석같이 믿는 은성은 술의 힘을 빌려 미안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억울함마저 호소하는 것이었다. 김계장의 모략질이라면 아라도 익히 알고 있었고, 그가 꾸민 간계에 어이없이 당한 피해자 중 하나였다. '간신'이라는 별칭은 이에 의한 것이었다. 잊고 있었던 그때의 억울함은 불쑥- 튀어 올랐고 입 밖으로 여과 없이 쏟아졌다.

"그런 중요한 문제는 당사자와 상의해야 하는 거잖아. 회의 시간은 그런 거 하라고 있는 거 아냐? 점심 뭐 먹을지 그런 흰소리나 지껄이는 게 아니고. 안 그래요? 과장님!!"

아라가 쏘아 올린 화살은 엉뚱하게 정애에게로 향했다. 정애라고 왜 할 말이 없겠냐만은 그럴수록 그녀는 입을 앙다물었다.

"결혼과 그 후의 계획에 대해 부장님이 물어보셨어요. 예상했던 대답뿐이라, 최측근을 통한 얘기가 궁금했나 보죠. 주임님 아니 계장님 잘못 아니라고요."

은성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 하나를 민혜는 거둬들였다.

"김계장이 뭐라 했는지는 뻔하지 뭐. 똑같이 당해봐야 지도 아픔을 알 테지. 아니 변두리 코딱지 만한 곳에서도 암투가 끊이질 않는데, 중앙에 사는 것들은 죄다 독한 것들이란 건가?"

은성의 말투는 노골적인 것도 모자라 힐난조였다.

"상황이 이렇다 한들, 말은 똑바로 하자. 광역시에 지점 다섯 개 가진 회사를 코딱지 취급하는 건 옳지 않지. 경영 방식에 모순이 있다 해서, 회사 방침이 성에 안 찬다는 이유로 덮어두고 흉부터 보는 게, 니 얼굴에 침 뱉는 거랑 뭐가 달라."

정애의 따끔한 일침이 이어졌다. 비록 은성에게는 코딱지 같은 회사라 해도, 늦깎이 비정규직을 자처할 만큼 시답지 않다 해도, 장기전을 벌일 만큼의 가치가 없다 해도,, 자신의 첫 직장이었고, 20대를 몽땅 바친 곳인 동시에, 결혼과 출산이 공존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주임, 계장보, 계장을 거쳐 과장을 달았다. 그리고 머지않은 어느 날, 지점을 관리 감독하는 총책임자의 자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 정애의 입장은 이들과는 달랐다. 비록 박봉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는 자신의 성장을, 걸어온 발자취를 뿌듯하게 여겼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몸담고 싶은 평생직장이라 마음먹고 있었다. 물론, 정애라고 아라의 입장을, 민혜의 심경을, 은성의 울분을 왜 모르겠는가!! 서른 중반에 접어든 정애의 곁을 그간 수많은 이들이 스쳐갔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지론을 붙잡고 사는 정애이기에 마음에 맞는 직원의 입사가 반가운 반면 돌연 행해질 퇴사가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그런 속을 알 턱이 없는 아라의 퇴사 의사에 전례 없던 고속 승진이라는 무리수까지 두었으나, 결국 아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훗날 자신이 총책임자가 되었을 때, 역량 있는 직원들과 함께 매출 1위의 지점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기에 정애에게 있어 아라의 퇴사는 아렸고, 시렸고, 괘씸했다. 그리고 민혜의 퇴사가 기정사실화된 지금, 정애는 또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채 억누르지 못한 탓에 혹여 속절없이 모진 말이 터져 나올까 싶어, 속마음이 폭포수처럼 쏟아질까 싶어,, 그로 인해 그녀들이 불편할 것이 염려되어 할 말은 많으나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은성의 객쩍은 소리에 자신의 청춘 한 자락이 사라진 듯해, 백여 명이 넘는 직원의 수고가 헛된 듯해, 이건 아니지 싶어 그만 바른 소리를 한 것이었다.

"전 계장님처럼 비혼주의도 아니고, 과장님처럼 일에 대한 열정도 뚝심도 부족한 걸요. 어차피 방점은 시기였고, 내 욕심 채우자고 다른 이의 기회를 뺏지 않아도 되니,, 힘 안 들이고 코도 풀고 좋은 이미지로 남으니 실보다야 득이 많은 셈이죠."

"아이고~ 아부지."

민혜의 입장 표명에 은성은 저만의 스타일로 추임새를 넣었다.

"저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잠깐 봐주셨어요. 매끼마다 따듯한 밥에 맛난 반찬만 주셨는데, 그 정성 제쳐두고 있지도 않은 눈칫밥은 어디서 찾아 먹었는지. 계절 하나 지났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엄마가 엉엉 우셨어요. 애가 애답지 않다 하시며 당신 잘못이라며 목놓아 우시더라고요. 진급 물 먹은 거 나가라는 경고잖아요. 저도 저지만 엄마가 속상해하세요. 유재수라면 저도 만족해요."

민혜가 입을 닫자 오가던 대화 역시 뚝- 끊겼다. 그 침울한 정적 사이로 급히 술 넘기는 소리만이 있었다.


꽤 오래전이었음에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고, 문득 떠오른 그날 밤을 아라는 복기하였다. 그것을 알 턱이 없는 성질 급한 은성이 아라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사람 앞에 두고 딴생각하는 그거 못 버리면 장담하건대 소박맞는다."

"민혜 사직서 던진 날, 그 밤이 생각이 나서."

"고아라도 시작인가? 내가 요새 회사 일보다는 과장님 비서 일로 더 바빠. 더 웃긴 건 무보수라는 거지. 서른은 넘었으나 아직 초반이야. 앞만 보고 가기도 바쁜데 왜 자꾸 뒤를 돌아봐. 앞만 보고 가라. 좀. 지난 일이라는 게 좋은 일보다는 반대인 경우가 많을 테고. 억울한 일 되새김하는 게 치매로 가는 지름길이래. 새겨들어 고아라."

톤 하나를 낮추어 은성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생각나서 박카스, 박카스 젤리, 우루사마저도 멀리 하는, 과거형 인간 고아라인 거, 알지. 잘 아는데. 잊을 건 잊고 살아. 잊으려 노력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래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잊었다 최면이라도 걸고.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효과는 있더라."

"응?"

"그렇잖아. 그 분위기였으면 다음 날 회사 가서 불은 못 질렀어도 최소한 김계장 목은 땄어야지 안 그래? 아무 일 없다는 듯, 인사도 받고,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주는 밥 꾸역꾸역 처먹고 내일 보자는 인사도 건넸다. 철없던 20대의 자화상 중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었다고."

"그랬더라면 제가 뒤통수를 후려 쳤겠죠."

내내 듣고만 있던 민혜가 목소리를 보탰다. 은성의 시선이 민혜를 향했고, 잠시나마 다정한 눈짓이 이어졌다. 곧 시선을 물린 은성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동작을 멈췄다.

"고아라 무서워서 회사 욕도 못하겠네. 아이고 내 팔자야."

아라를 흘끔 살피며 은성은 간을 보았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그런 날이 오더라도 참아. 혹여 출근했는데 니 책상이 사라졌다 해도 당황하지 마. 대형 폐기물은 지정된 날에만 수거하기에, 냅다 주워 와서 스티커 떼고 엉덩이 붙여. 사표 던지는 즉시 경력 단절녀 되는 거라고."

"난 고 주임님 이래서 좋더라. 멀쩡하게 생겨서 이렇게 말하는 거."

민혜의 지원 사격이 이어지자 은성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스스로가 딱 부러지는 성격이라 할 테지만, 실은 화도 많고 더러 욱하잖아. 그런 너도 서비스직 종사자인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최은성."

좀처럼 없던 자신의 풀네임이 명명되자 은성은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그나마 난 변덕은 없지. 가끔이긴 하나 넌 미친년 널 뛰듯 하잖아. 그 회사가 별로여도 그거 하나 좋더라. 퇴사하고 나 많이 울었다. 업어 키운 외갓집 막내 동생 같은 애가 성격 이상하다고 정신병원 가보라더라. 회사 방침이 때론 엿같아도, 김계장이 허구한 날 개지랄을 떨어도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라 생각해. 과장님은 아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 넌 총알 장전할 때까지 무조건 버텨. 집 떠나 개고생 한 대가이니 새겨들어."

"아라를 회사 지박령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농담인 듯 진담인 듯한 정애의 말이 이어지자 그녀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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