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과 정애가 화장실을 가고, 아라와 민혜는 남았다. 끊이지 않던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였고, 그 잠깐의 침묵은 서둘러 입술을 뗀 아라에 의해 깨졌다. 이는 어색함을 떨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전할 말이 있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전에 콧방귀 뀌었던 거 사과할게. 네 말이 다 맞았어."
"네?"
"애인 생겨 제일 좋은 점이 뭐냐는 내 물음에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국수 먹고 손잡고 집 앞까지 가는 거라고.. 우리랑은 외모, 성격, 인기도 영 딴판이라, 빤한 답 말고 다른 걸 기대했었나 봐. 해서 내가 엄청 비아냥댔었잖아."
"이미 좋은 사람인데, 무얼 해서가 아닌 그저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다는,, 그것 만큼 설레는 건 없잖아요."
민혜의 말이 맞았다. 중요한 것은 무얼 해서가 아닌 그저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다는 그것이었다. 머릿속에 새기듯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님 말도 하나 틀린 것이 없던걸요."
"무슨?"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는, 끄덕이는 척했지만 부러워서 하는 소리려니 했어요. 달라진 거라곤 한 이불 덮는다는 것뿐인데, 이렇게 다르다고?? 참을성 부자라는 걸 결혼하고 알았어요. 물론 좋은 점도 많고 오빠라고 왜 불만이 없겠냐만은.. 그렇지만 결혼은 정말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해요.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그냥 따라만 부를 노래 가사가 아니라니까요."
"인간관계 폭도 좁은데, 그 와중에 결혼 생활에 후달리는 사람뿐이라서..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
"둘이어도 더러 외롭다 느낀데요. 그럴 때는 추억 곱씹으며 의리 붙잡고 사는 거래요. 정 버려야 할 놈만 아니라면 다들 그러고 산다고. 사랑은 잠깐이지만 의리는 평생 간다고."
"애 낳으면 어른 된다더니."
"티 안 내서 그렇지. 철은 애진작에 들었다니까. 부자든 가난하든 세끼 먹듯,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엄마가 그러셨어요."
'사랑은 짧고 의리는 한평생이다'라고 결혼 선배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죽네 사네 하면서도 쉬 등을 돌리지 못하는 까닭은 이 때문은 아닐는지.. 음지를 박차고 나온 '비혼주의'도, '연애는 필수 그러나 결혼은 선택'이라는 유행가 가사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면 이왕지사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어른들의 경험담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말씀까지도,, 구구절절 옳았다. 인생이란 결국 질문의 연속이며 과정의 반복이다. 물음 하나를, 선택지 하나를 툭- 던져 놓고 한 발 물러서서 구경꾼인 양 지켜볼 뿐이다. 참 얄궂게도 말이다. 선택은 물론 시시비비 역시 오롯한 제 몫이었다. 즉,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한낱 인간은 늘 선택해야 했고, 선택당해야 했다. 그것이 인간관계든, 일이든, 사랑이든 말이다.
마치 암행어사인 양, 회사의 부조리를 조목조목 들추어 지적하던 은성이 사부작거리며 일어 설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유인즉슨, 벌건 토끼눈을 하고 신입사원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정애가 내동 가방에 박아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들고 부러 시간 체크를 했다. 그 뜬금없는 행동은 곧 좌불안석으로 이어졌다. 남편의 늦은 저녁을 챙기기에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이유였다.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내다 버리고 싶다던 그 남편을 위해서? 그녀의 이중성에 정신이 혼미한 그때,, 민혜의 공격이 이어졌다. 간만에 자유부인 되었으니 새벽이슬 맞고 귀가하리라 호언장담했던 그녀는 퇴근 후 남편이 보낸 딸의 재롱 영상에 함박웃음을 짓더니 아이의 잠투정을 핑계로 총총 사라졌다. 님보다는 남이길 자처하는 남편, 토끼 같은 자식은 없다 해도 복직할 직장은 물론 돌아갈 집도 있었으나 바삐 걸음을 뗄 이유도, 서둘러 돌아갈 목적도 없는 아라는 저만 홀로 도태를 직면한 듯했고, 그 사실은 그녀를 압박하여 주눅 들게끔 했다. 순간, 길 한복판에서 기도해 대던 정애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행동했던 그 무모함이 그리웠다. 그 막연한 상념은 결국,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적당한 감투 하나 쓰고, 저들과 같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답도 없는 질문을 던지게끔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을 지우려 아라는 크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기를 얼마 다다른 곳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 정보 시스템에서는 운행 종료된 버스들 사이 더러 '막차'를 알리고 있었고, 도로 위 띄엄띄엄한 차들은 경쟁하듯 밤의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나마 있던 '막차'도 운행을 종료하였다. 그렇게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바삐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라는 외로움을 증폭시켰다. 오지 않을 버스였기에 조그만 부스를 벗어나 목적도 방향도 없이 걸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 세상을 향한 누군가의 하소연마저 쓸쓸함을 한껏 고취시켰다. 저만 홀로 그런가 싶어 내리깔았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느라 바쁜 연인의 모습을 지켜보기 싫증이 났는지 택시 기사는 클락션을 길게 눌러 길을 재촉했다. 짧은 가시거리 확보조차 어려운지 나이 지긋한 노부부는 팔을 걸고 서로 의지하며 발을 맞추고 있었다. 인도 한복판을 점령한 어린 연인들은 손을 맞잡고 시선을 마주한 채로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짝을 이뤄 마주하였고, 걸었으며, 아쉬움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오직 저만 혼자였다. 하늘에 박힌 둥근달이 혼자라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다. 유난히 크고 둥근달이었다. 얄밉게도 말이다. 머리 위로 팔을 들어 올려 손으로 가리자 달의 모습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외로움은 쉬 사그라들지 않고 되레 그를 밀어낸 자신을 향한 원망이 솟구쳐, 이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누구 하나 관심 갖지 않는, 철저히 혼자라는 현실 앞에서, 그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고, 알고 있었으나 내내 부정했던 진심을 고해성사하듯 읊조렸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언덕, 로마의 핀초 언덕, 아시시의 로카 마조레, 나폴리의 산타루치아항, 아말피의 이름 모를 골목, 라벨로의 빌라 침브로네, 포지타노 알프레도의 집에서였는지도.. 아니 어쩌면 특정한 공간, 닥친 상황이 아닌,, 그와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이었는지도.. 지난여름,, 이탈리아는 사랑이었다.'
"열네 번째야."
진호의 등을 툭-치며 정현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열네 번째 난쟁이라고. 순번에서도 밀릴뿐더러 키스해 준 왕자님도 이미 있다."
좀 전 진호의 시선과 지금 정현의 시선은 정확히 일치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건 쌍수 들어 환영한다만, 안타깝게도 현택이 형 옆자리라서. 피아노라면 쳐다도 안 보던 네가 시선을 둘 정도면,, 이쁘긴 한가보다."
지구를 잠식했던 급성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은 급격한 삶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격리'였다. 자의로 때론 타의에 의해 많은 이들이 격리되었다. 회식 문화가 축소화되었고, 예배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컴퓨터 앞으로 옮겨 놓았으며, 시끌벅적했던 명절을 간소화시켰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던 끈끈함은 점점 옅어졌고, 홀로족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휴대폰만 있으면 방구석은 지상 최대의 놀이터로 변신했다. 원하는 시간에 보고픈 방송을 송출하는 다양한 플랫폼 VOD서비스는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찾아가는 수고'에서 '찾아오는 편리함'으로 바뀌었고,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그것들은 곧 사회 전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요식업계를 휘청이게 했고, 출판, 공연에 걸친 문화계 전반을 줄줄이 도산케 했다. 장기화된 세균전은 사람의 목숨뿐 아니라 관객과 한호 역시 앗아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세균전 종식의 선포는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닌 새 시대의 서막이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또 그렇게 적응이란 것을 해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찾는 이 없는 공연 문화를 아니 클래식의 불을 지피고자 모교 선후배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했다. 귀국 후 부랴부랴 신변 정리를 마무리 짓고 진호 역시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던 그녀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란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를 본 것이었다. 그러나 정현의 오해와는 달랐다. 꽁꽁 감춰두었던 사금파리 한 조각이 어지럽게 솟구쳤다.
'고아라.'
"정말이야?"
"이뢰 배도 해병대 1179기 특등 사수였습니다. 분명해요. 이 자식이 글쎄 예비 형수님을 뚫어져라 봤다니까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화를 내야 하는 건가?"
정현의 깊은 속내를 아는 현택은 맞장구로 분위기를 이어갔다. 사회 친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현은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동갑내기 친구였고, 네 살 많은 현택은 까마득한 선배이자 닮고 싶은 성악가였다. 졸업과 동시에 서둘러 유학을 떠난 현택은 긴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다.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었지만,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얼굴 보기 여간 힘들던 터에, 공연 연습을 핑계로 간만에 뭉친 자리였다. 조그만 양철 테이블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삼겹살과 함께이다 보니, 수식어로 자리 잡은 '한국을 대표하는 스핀토 테너 김현택'이 아닌 연습실 죽돌이였던 그의 모습이 먼저라,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반가움이 앞섰다.
"형은 못하는 게 뭐예요?"
"그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란다. 넌 좀 배워야 해. 것도 많이."
진호의 물음에 정현이 가볍게 지청구를 날렸다.
"그러고 보니 괘씸하네."
뜬금없는 현택의 말에 진호와 정현은 어리둥절했다.
"남의 졸업 무대를 왜 지 데뷔 무대로 만드냐고."
머리를 갸우뚱하던 정현은 이내 생각났다는 듯 들떠 말했다.
"형, 난 이 교수님 기립한 거 입학 이후 졸업 때까지를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영상 여전히 레전드로 돌아다니는 거 알죠?"
Gaetano, Donizetti의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중 <una furtiva lagrima>이었다. 싸구려 포도주를 사랑의 묘약으로 오인한 어리숙한 네모리노가 제 모습 같아서인지, 사랑임을 알게 된 아디나의 눈에 눈물이 고인 그 광경을 네모리노가 본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지, 종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인지, 아니면 아리아의 제목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바순'의 서글픈 선율에 끌린 것인지,, 그 의도는 물론, 감정 역시 흐릿했지만 스스로가 토해냈던 담담한 선율은 한껏 고조되었던 공연의 분위기를 삽시간에 가라앉혔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다소 미안함으로 자리 잡은 그때의 기억만은 진호에게 있어 여전히 또렷했다.
"한이 그렇게 무서운 거다. 서편제도 그렇고 베토벤도 그렇고. 누가 그러더라."
"뭐래. 자식이."
정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현택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정작 진호는 말없이 빈 술잔을 만지작 거렸다.
정현을 태운 택시의 꽁무니가 멀어졌다. 집 방향이 같은 진호와 현택은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한 잔 걸쳐서일까? 차 안에 머문 공기는 짐짓 무거웠다. 창문을 열어 공기의 순환을 시도했다. 미세먼지 농도니 오존주의보 따위 개념치 않았다. 매캐하지도 텁텁하지도 않을뿐더러 한결 편안해졌다. 밤이 주는 편안함에 흠뻑 젖어 있는 진호를 현택은 다급히 깨웠다.
"졸업 공연에 왜 올렸게?"
선배의 졸업 공연은 후배에게는 영광된 자리였고, 욕심나는 무대였다. 개교 이래 이어져 온 관행이며 그저 품앗이일 뿐이라고 혹자는 말한다손 치더라도 진호에겐 분명 그러했다. 현택이 거머쥔 선택지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자신이 러브콜을 받았었다. 경쟁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얼떨떨함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물어봤던가??? 기억에 없었다.
"너 그때 로마 쫓아가네. 죽네 사네 할 때였잖아. 실은 나도 경험자거든. 들어봤을 텐데. "
현택 역시 지독한 사랑 후유증을 앓았던 당사자였고, 그를 도마 위에 올린 것도, 난도질했던 것 역시 진호가 속한 세상이었다.
"본수형이 그랬었거든. 죽을 듯이 미워했던 마음을 돌려 죽기 살기로 연습했어. 남의 공연 망칠 수도 없거니와 연습실에 박혀 있다 보니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더라. 형이 날 살리고, 무대가 날 붙잡았어."
그런 이유였으리라고 진호는 상상조차도 못했다.
"그 후로 사랑을 아니 사람을 믿지 않았는데 시간이란 녀석은 아픔을 다독이고 이제 괜찮다 싶으니 다른 사랑을 보내더라. 내 설움에 복받쳐 성난 사자처럼 울부짖었는데, 솔직히 넌 달랐잖아. 그랬던 나도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너라면 분명 더 멋진 이를 만나겠지. 세상 이치가 그래. 진호야."
인원수가 많다 보니 가서 먹고 오는 불편함보다는 배달 도시락이 용이했다. 잠시 무대를 벗어난 그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도시락을 즐겼다. 족히 삼십 명이 넘는 그들 중 이제 막 도시락 뚜껑을 여는 그녀가 진호의 눈에 포착되었다. 수저 가득 밥을 떠 입 속으로 가져가자, 들린 그녀의 오른손 검지에 자리한 금속 물질이 조명 아래서 번쩍- 떨었다. 이에 진호의 두 눈이 고정되었다. 속히 도시락을 해치운 진호는 화장실로 향했고, 손잡이를 잡고 막 당기려 하는 그때, 나란히 붙어 있는 여자 화장실 문이 열렸다. 좀 전의 그녀였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성당 다니시죠. 일부러는 아니고 식전 기도하는 거 봤어요."
그녀의 묵주 반지를 가리키며 진호는 다급히 말을 건넸다.
"아.. 네."
별안간 자신의 앞을 막아선 태도도 태도거니와 꺼낸 말 역시 뜬금없는 터라 여자의 말투는 얼떨떨했다.
"혹시 7대 죄악에 대해 알아요?"
진호의 질문에 여자의 얼굴빛은 한층 더 어수선해졌다.
"이를 테면,, 탐식이라던가."
여자는 말이 없었다.
"그럼 뇨끼는 알아요?"
"음식이 맞다면.. 알아요."
어리둥절한 여자의 표정 따위 아랑곳없다는 듯 진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목요일의 뇨끼는요? 바티칸과 뇨끼의 연결 고리도 아나요?"
여자는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이내 총총 사라졌다. 그러나 그곳에 멈춰 선 진호는 계속 무어라 구시렁거리는 것도 모자라 고개까지 저어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현이 진호의 등짝을 맵게 때렸다.
"내가 다 봤어. 너 진짜 이상해. 연습 끝나고 얘기 좀 하자."
정현은 남자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닫지 않은 것은 들어오라는 의미겠지. 이에 순응하여 진호는 따라 들어갔다.
정현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으레 찾던 홍대 곱창 골목이었다. 골목의 터줏대감으로 그 유명세 덕에 최근 2호점을 오픈했으나 지척임에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원조집으로 향했다. 넓어진 실내, 현대화된 장비 대신 좁고 손때 묻은 것들이 편했다. 화려한 날갯짓 전인 자신과 같아서일까? 진호는 이곳에 올 때마다 그렇게 묻고 답했다. 진호와는 다르게 정현에게 이곳은 특별한 장소였다. 비록 단발에 끝난 첫사랑이긴 했어도, 잠시나마 마음을 내주었던 그녀와의 아지트였다. 고등학교 동창의 혈육인 두 살 터울의 누나였다. 미대생이라는 신분은 그녀를 작업실에 묶어 두었고, 정현을 핑계로 외출을 한 곳이 이곳이었다. 경험상 예체능끼리 엮이면 안 된다고 훈수를 둔 것도 모자라, 정작 진호의 사랑이 불발되었을 때, 그것 보라며 목소리에 꽤나 힘을 주었던 정현이었다. 그러나 한 번 길들여진 입맛은 좀처럼 떨치기 힘든가 보다. 그녀와의 이별이 까마득하건만, 여전히 발걸음하는 걸 보면 말이다. 건장한 사내들이기에 특모둠으로 포문을 열었다. 소곱창, 대창, 막창, 벌양, 염통이 네모난 철판 위에서 기름지게 익어가고 있었다. 치킨은 튀겨야 맛이요 곱창은 구워야 제맛이다. 대창이 제 몸을 부풀리더니 이내 희고 뽀얀 곱을 빼꼼히 인사시켰다. 분명 눈으로 먹고 있는데 꼴깍- 삼킨 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애피타이저 격인 미역국이 담긴 양은 냄비에 수저를 찔러 넣었다. 기름길을 터주기 위한 것인 동시에 혹여 장기들이 놀랄까 하는 염려를 담아 꿀꺽- 삼킨 그때였다.
"누구야? 그 여자."
정현이 특등 사수였는지는 확인 안 된 사실이지만, 촉 좋은 것은 분명했다. 오죽하면 그를 신가물이라 불렀을까? 쉬쉬하며 감췄던 비밀 연애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도, 심지어 대상마저도,, 콕 짚은 그가 아니었던가!!
"차라리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였다 해. 노란 고무줄을 한 수녀님 말고."
예비 형수를 탐내는 막돼먹은 놈 타이틀을 벗어야 했기에, 여행 중 만났던 노란 고무줄을 한 사람이 생각났다 대충 얼버무렸다. 부자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 말이 사라진 것처럼 그의 총기 역시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정현의 헛다리에 진호는 미역국을 한 수저 더 떠먹었다.
"익었다. 먹자."
"아니 그렇잖아. 여자라면 거들떠도 안 보던 네가 오자마자 왜 여자만 보는 건데."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진호는 곱이 잔뜩 빠져나온 곱창 하나를 집어 들고 후후- 불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만하라는 압력이었다. 그러나 정현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털어놓기 전에는 집에 갈 생각 마."
말을 마친 정현 역시 곱창 하나를 집어 부추 무침과 곁들여 입에 넣었다. 뜨거워서인지, 오물거리느라 바빠서인지는 몰라도 소주를 시키는 그의 말투는 확연히 어눌했다. 그 많던 대창, 곱창, 염통은 누가 다 먹은 걸까? 빈틈을 찾을 수 없던 네모난 철판이 훤히 민낯을 드러냈고 소의 부산물들이 흘리고 간 흔적은 종이컵에 가득했다. 한 병이던 소주병은 어느새 세 병으로 늘어나 있었고, 사그라든 불판의 열기에 반해 술기운은 한층 달아올라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얼큰히 취해있었다.
"컴컴한 밤하늘 아래 한 소녀가 있었어. 어둠도 혼자라는 것도 심지어 어딘지도 모르는 소녀는 겁에 질려 울고 있었지. 그런 소녀가 마냥 안쓰러운 달님은 소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고, 그런 달님 덕에 소녀는 울음을 멈추었지. 문득 달님은 소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어. 소녀 역시 밝고 따스한 달님이 궁금했지. 달님은 소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고, 소녀는 달님을 향해 손을 뻗었어. 그러나 그 열기에 소녀의 손가락은 상처를 입었고 놀란 달님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어. 다친 소녀가 걱정된 달님이 한 걸음 다가갔으나 소녀도 그만큼 뒤로 물러났어."
"하고픈 얘기가 뭔데?"
"살다가 어느 날, 불쑥 생각나고 문득 그리워진다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어.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라고."
"사람 구실하며 이만큼 사는 게 다 하나님 덕이라며, 교회 나가자는 엄마 잔소리 싫어 독립한 건데, 그런 내가 난생처음 그 기도라는 걸 해봤다. 까마득한 옛일이고, 너는 잊었다 했지만, 내가 또 본 게 있어서, 갑자기 배낭여행 간다고 해서 부러움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비엔나 간다길래 혹 전 여친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어쩌다 한 번씩 똥고집 부리는 거 알고 또 보았잖아."
정현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더니 진호 앞으로 쓱- 밀었다. 'che Dio ti favorsca' 당신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여행의 방점은 이탈리아라며, 'che Dio ti favorsca' 입만 열면 부르짖었잖아. 니 이름이라 저장해 놓고 버튼만 누르지 않았다뿐, 수시로 들여다보며 무사귀환을 바랐던 부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게 뭐냐고."
그랬다. 이미 알고 있었고 지겹도록 외우고 있었던 생존어였다. 그러나 정작 모른 척했었다. 당시에는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안다. 너무나 분명히도..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순간,, 진호는 아라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정현아. 너 교회 다녀라."
물을 흠뻑 먹은 종이처럼 진호의 음성은 젖어 있었다. 뜬금없는 진호의 말로 인해 정현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