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짙은 녹음으로 물들었던 나뭇잎들은 묵은 옷을 벗어던지고 노랗고 붉은 새 옷을 입느라 여념이 없었다. 성질이 급해 더러 낙하한 바싹 마른 잎들은 이리저리 뒹굴었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바스락대며 화음을 넣었다. 거리는 트렌치코트의 물결로 일렁이고 있었고 가을은 어김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바람, 하늘, 나무, 공기까지,, 모두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아라만이 이에 동참하지 못했으니, 이유라면 이러했다. 그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집과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수목원이었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술의 전당에서 사고는 발생했다. '10월의 어느 멋진 밤에'라는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이었다. 연미복을 장착한 낯선 이들 사이 낯익은 진호도 있었지만 깊이 각인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진호와는 분명 달랐다. 나부끼는 현수막은 복장의 차이뿐 아니라 현 위치마저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물론 바람의 장난이 아니었어도 곧 알게 될 사실이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맞은 매는 꽤나 매웠다. 훼방꾼을 자처한 심술궂은 바람이 미웠다. 수목원 한편 구석, 늘어진 해송 아래 놓인 벤치에 앉은 아라는 가시지 않은 떨떠름함으로 인해 발아래에 밟히는 흙을 앞뒤로 쓸며 괜한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싸부."
"왔어?"
"바람이 이리 산뜻한데, 햇살이 이리 눈부신데, 공기가 이리 뽀송한데, 왜 울상이래?"
민석의 일침은 아라의 표정을 더욱 구겨놓았다.
"모두가 좋아서 나라도 안 좋으려고. 그래야 균형이 맞지. 세상 이치가 그렇단다. 수목원은 뭐고, 왜 보자 한 건데?"
애먼 민석을 상대로 괜한 짜증을 부렸지만 이렇다 할 대꾸 없이 그는 책을 건넸다. 빤히 바라보던 아라는 어금니를 앙- 물고 낮게 으르렁댔다.
"대여 아닌 기부야."
"내 것이 아니던데요."
아라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이없다는 듯.
"하다 보니 공항 서점에서 샀다 왜!! 독점 계약이라는 게 뭐냐 하면, 찍어내는 곳은 한 곳이요. 파는 곳은 여러 곳이라는 얘기야. 공항 서점이면 어떻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면 또 어때. 어찌 됐든 프랑스 땅이잖아."
만년 아르바이트생일 것 같던 아라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오피스촌을 낀 중저가 프랜차이즈 매장이었다. 면접 날 사장은 말했다. 자신은 본업이 있어, 매장 관리를 전담해 줄 유경험자를 원한다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이가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했으나, 고개를 갸웃하던 사장은 얼마 가지 않아 끄덕였다. 전 직장에서의 근무 기간에 찌를 문 것이다. 이내 요즘 젊은이들의 잦은 이직을 비판하던 사장이었다. 감투라는 것은 실로 많은 것을 요하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꽃길만 걸으리라는 오만함은 마감 근무자였던 영은과의 마찰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프랜차이즈는 여러모로 편했다. 제조부터 계산, 청소까지,, 죄다 매뉴얼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러나 영은은 인식판이 고장 난 로봇처럼 굴었다. 아라의 오픈 준비는 전날 마감의 뒷수습으로 시작했다. 한두 번이면 넘어갔으리라. 영은은 손이 많이 가는 직원을 넘어 대책이 없는 직원이기도 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한참 차이가 나는 아라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손님과의 마찰이 있었다. 근처 영어 학원의 선생이었다. 단골손님인 그녀는 평소 즐겨 마시던 카페라테를 주문하며 우유를 따듯하게 데워 달라 했고 말끝에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 있게 영은이 음료를 건넸건만, 손님의 컴플레인이 이어졌다. 영은은 본사의 매뉴얼을 내세웠고, 손님은 주문 사항을 재차 요구했다. 영은과 손님 간의 극명한 온도차는 매장 안을 들썩이게 했고, 결국 본업에 충실코자 아라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영은이 성난 파도처럼 일렁였다. 스팀 피처 안의 정적 온도(55-65℃)가 적힌 본사 매뉴얼과 온도계를 들이밀며 시종일관 당당했다. 제 앞에서 버젓이 새 음료를 건네는 것은 무슨 경우나며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이에 따른 것은 옳으나 손님의 요구 사항을 묵살한 것에 대해 짚었으나 영은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돈은 본사 아닌 손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며,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으니 수용했어야 한다는 아라의 지적에 급기야 팽- 토라졌다. 그런 거라면 본사는 허수아비며 매뉴얼은 휴지조각이라는 영은의 항변에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라에게 영은은 벽창호였으며, 영은에게 아라는 제 말만 하는 꼰대였으리라. '신경 쓰자'는 가시 박힌 말로 일갈하려는 그때, 혼잣말이었어야 하는 영은의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도, 이상한 사람도 처음이라며 정신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업어 키운 외갓집 막내 동생뻘이었다. 기껏해야 얼마나 살았다고, 순간 아라는 사장과 직원 사이의 중재자인 매니저라는 감투를 벗어던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냅다 쏘아댔다. 어린 나이를 내세워 일할 곳은 많다며 유유히 사라진 영은의 빈자리는 오롯이 아라의 몫이었다. 하루 이틀은 견딜만했다. 그나마 일주일까지도 버틸만했다. 온갖 좋은 말로 도배한 구인 광고에 속는 이 하나가 없었다. 낮이 밤인지, 밤이 낮인지도 모르고 점점 지쳐만 갔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매장 유리창에 붙인 붙인 광고지는 스티커의 흔적이 자리하기도 전 급히 사라졌다. 취준생 아닌 공시생이라는 그의 위치가 좋았다. 갓 대학을 졸업한 상황과, 시험까지 채 오 개월도 남지 않은 임박한 시점은 물론, 깊게 배어 있는 다급함까지도,, 그런 그에게 끌렸다. 공시생이란 말은 다 옛말이었다. 대중은 그들을 고시생으로 칭했고, 사회는 그들을 갖은 술수로 괴롭혀댔다. 9급 공무원증을 목에 건다는 것은 거나한 잔치상을 받아도 손색없다는 의미였다. '못해도 일 년은 붙박이 신세로구나'하며 쾌재를 부른 아라의 오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뜨겁던 그해 여름 그는 퇴사 의사를 밝혔다. 단 네 명을 뽑는 세무직 9급 공무원에 합격을 한 것이다. 실로 낙타가 바늘을 뚫은 격이었다. 그러나 축하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속은 걸까? 속인 걸까?'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아라를 찾아왔다. 종일 숫자와 씨름하는 현재보다 커피 팔던 과거가 좋았다며 배부른 투정을 할 때에도 야박하게 내치지 못했던 것은, 힘써보겠다는 소개팅 때문이었다. 나라 녹을 먹는, 게다가 노후가 보장된 배우자를 누가 마다하랴. 그러나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그 어떤 변변한 소개팅은 없었다. 놓겠다 하여 놓아지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질기고 또 질긴 것이 인연이란 놈이었다.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으레 내복을 선물하듯, 민석은 굳이 밥을 사겠다고 했다. 동행한 식당이 마침 서점 근처여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은성의 얼굴이나 본다고 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사고는 늘 익숙한 공간, 예상치 못한 순간, 본인도 모르게 발생한다.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그는 제 속의 것들을 담담히 쏟아냈다. 은성을 본 그 순간 심장이 마구 뛰었고, 그리하여 훗날 저 홀로 서점에 가서 은성을 만났다고 아니 바라보았다고 한다.
'2008년도에 출판된 책으로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여전히 스테디셀러예요. 작품 중 제일 좋아요. 제가 증인 설게요. 선물하세요.'
자신은 그저 은성을 본 것인데, 은성은 단지 본업에 충실해 책만 권유했다 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의 마음 따윈 알 턱이 없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였다. 민석은 학창 시절에도 하지 않은 책 표지를 비닐로 싸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바라만 보았다 했다. 마치 은성이기라도 하듯.. 그의 갖은 노력 끝에 통성명은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네 살이나 어린 그를, 공무원인 그를,, 은성은 탐내지 않았다. 그럴 만큼 은성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가끔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는, 그저 벗인,, 이득 없는 그 만남도 소중히 여기는 민석이 그저 짠하기만 한 아라였다. 사랑에 아파 본 사람만이 느끼는 동질감이었고, 제 책임을 운운하는 괜한 자격지심이기도 했다. 그 미안함과 위로를 담은 선물이었다.
'L' Arbre des Possibles et Autres Histoires', '가능성의 나무와 다른 이야기들', 직역하면 그랬다. '열린 책들'이란 출판사가 독점 계약을 맺고 있다 알았을 뿐이지. 열여덟 개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란 것은 민석에 의해 알게 되었다. 들춰는 봤어도 읽고자 하는 책은 아니었다. 결국, 영화가 망친 셈이었다. 아니 관객들의 잘못이었다. 파리 내 서점이 'Shakespeare And Company'만이 아님에도 하나같이 이곳만을 선호하는 것이 문제였다. 대문인 헤밍웨이를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어찌어찌하여 헤어졌던 연인과 운명인 듯 재회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서점의 기운을 얻어 작가, 문인 대열에 합류하는 것 또한 현실상 어려운데도,, 각자 저마다의 이유를 내세워 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흉도 못 볼 것이, 진호와의 파리 일정이 엇비슷하였기에 혹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덕에 울며 겨자 먹기로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라 역시 서점을 방문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민석의 몫은 챙겨야 했기에 부득불 공항 내 서점을 이용했다. '독점 계약'이 무엇인가!! 공항 내 서점과 Shakespeare And Company가 또 뭐가 다른가!! 정녕 그가 찾아냈단 말인가?
"거기 갈 시간 없었어."
"시청사가, 퐁뇌프 다리가, 노트르담 대성당이, 시떼섬이, 생트 샤펠 성당이 서점과 지척인데, 그건 파리에는 갔지만 숙소에만 있었다는 건데. 차라리 심청이의 효심을 시험코자 심봉사 스스로가 장님인 척을 했다는 게 더 믿을 만하겠네."
"알고 있었구나."
"주 타깃은 관광객들인, 중고 영어책을 사고파는 헌책방."
"허탕 칠 것 뻔히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난 숫자랑 씨름하는데 싸부는 파리라니. 소심한 복수라 해두죠."
"오냐오냐 했더니 아주 개똥으로 알지. 부러우면 공무원증 나 주던가."
"싸부답지 않은 허술함에 솔직히 놀랬어요."
"중국집 애들이 자장면 안 먹는 거랑 같은 이치야. 내 발로 나온 곳인데 가야 할까? 영화 아니었으면 어림 턱도 없었지. 책보다는 포터필터가 손에 착 감기더라. 내 팔자에 물장사가 답인가 봐."
입가에 슬쩍 미소를 새긴 민석은 들고 있던 책을 펼쳐 아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게 왜?"
누런 페이퍼백 안, 하얀 종이가 책갈피처럼 꽂혀 있었다. 아라의 눈동자는 방향을 잃고 멋대로 움직여댔다.
"내 사랑이 행복하지 못해 남도 그러길 바라는,, 졸지에 그런 옹졸한 사람이 되었네요. 미안해요. 싸부."
톤 하나를 낮추어 민석은 말을 이었다.
"화가가 미남이었나? 아님 바가지였나?"
"부러 핑계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나쁘지 않았거든."
추억에 잠긴 듯 아라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가고자 했던 빌라 침브로네 대신 아말피에서 하루를 통으로 날린 그날.. 신발끈을 고쳐 주던, 좁다란 골목 계단에서의 압박 같던 포옹,, 예고 없이 두 걸음을 내리 디딘 진호로 인해 잠까지 설친 탓에 뜀박질을 했던 다음 날 역시, 친히 새우 껍질을 까주며 혼란만 가중시켰더랬지. 물은 적도 없는데 그림 꽤나 그린다며 너스레를 떨며 종업원에게 굳이 펜과 종이까지 얻어 화가인 척했더랬지. 찾고 또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던 그 조그만 종이가 왜 책 속에 있었을까!! 순간,, 잃어버렸다는 사실만을 곱씹으며 지레 겁을 먹고, 부정했던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진짜였네. 은성 누나가 싸부 이상하다고."
"해서, 그거 확인코자, 어!!"
"그럴 리가요."
"은성 누나가 한걱정하길래. 가뜩이나 존재감 없는 나인데, 싸부까지 보태지 마요."
"아이고.. 녀석아.."
"누구예요. 그 사람?"
"말하면,, 쪼르르 가서 고하게?"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서라. 니 어깨에 부러 짐 보태고 싶지 않아. 싸부의 은밀한 사생활에 관심 끄시게."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민석은 대답을 대신했다. 더해봤자 속만 긁을 뿐, 달라질 건 없었다. 분위기 전환이 시급했다.
"솔직히 나 은성이한테 밀린 거 아직도 분해."
"난 박카스 없으면 못 사는데 싸부는 박카스 쳐다도 안 보잖아요. 속궁합보다 음식 궁합이 먼저라."
사람 기분 상하지 않게 교묘히 빠져나가는 것이, 민석은 천상 장사꾼이었다.
"너 조기 은퇴하고 두둑이 챙긴 퇴직금으로 장사해. 성공할 거야. 분명."
"장사하기 싫어서 공부한 거 잊었어요?"
알지. 알다마다. 민석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돼지갈비집 아들이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근교이나 지리적으로 보면 하나의 도시라 해도 무방했다. 시내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건만 배나무밭을 낀 입지는 한층 시골스러웠고, 이는 도시인의 감성을 충족시켰다. 숯불향이 진하게 밴, 완벌구이라 잘라먹는 수고만 하면 되는, 지역 사람뿐 아니라 인근 충남, 충북까지 입소문을 타 주말에는 으레 줄을 서는 수고를 해야 했고, 특히 배꽃이 피거나 배 수확철이 되면 일요일 백화점 앞 도로를 방불케 했다. 미식가와는 거리가 먼 아라 역시 서너 번 방문했으니 맛집임에는 분명했다.
"다 내 거라는 귀에 앉은 그 말도 싫었지만, 손님 없으면 없으면 없는 대로, 또 많으면 많은 대로 그만큼의 걱정을 이고 사는 부모님 보기도 싫었고. 장사라는 게 돈 벌자고 하는 건데 매일이 오름길은 아니잖아요. 우리도 처음엔 그랬어요. 삼시세끼 돼지갈비만 먹었어요. 반문할 테죠. 그게 왜? 부모님의 푹 숙인 고개를 보면 갈비를 씹는 건지, 고무를 씹는 건지.. 아무튼, 전 큰돈 안 바래요."
"부모님 은퇴하시면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데. 아깝지 않아?"
"누나랑 매형이 서비스 마인드가 좋아요. 것도 아니면 전문 경영인한테 맡겨야죠. 그게 경제를 살리는 거고. 내 손에 들어오면 십상 말아먹어요. 내가 얘기 안 했던가요?"
들었지. 들었고 말고. '다 네 거 된다'는 부모님의 압박에 아들 된 도리로 성인이 되어서도 주말이면 으레 가게 일을 도우러 나갔다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고, 간만의 조우에 반가움 아닌 분노를 느꼈다고 민석은 말했다. 학창 시절 그는 친구들을 괴롭혔던 나쁜 놈이었고, 그런 녀석에서 공손히 콜라를 안기고, 못생긴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녀석을 바라만 보았다고 했다. 분했다고 했다.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간도 쓸개도 내어 놓아야 하며, 때론 개만도 못한 놈들을 정승처럼 대우해줘야 한다는 그 부조리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했다. 해서 장사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일찍이 단념했다 그는 말했었다.
"말 돌리지 말고, 재지 말고 그냥 잡아요."
"이런 식으로 벗어던지면 곤란해. 소개팅만 아니었으면 너와의 연은 애진작에 끝이었다."
"관심 없던데."
"응?"
"삼세 번이라는 싸부 말처럼 딱 세 번 커피숍에 데려갔어요. 관심 1도 없던데."
"야.. 소개를 시켰어야지."
아라의 목소리가 튕기듯 올랐다.
"인사뿐 아니라 통성명도 했지."
"근데?"
"근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두 번째였어요. 웬일로 먼저 인사를 하더니 '처음 뵙겠습니다' 하던데. 그럼에도 한 번 더 데려갔지. 그랬더니.."
"그랬더니?"
"우리 민석이 잘 부탁한다고, 엄마처럼 말하던걸 뭐.. 선배 보기 미안해서 한동안 나 머슴 자처했다니까요."
"그랬구나. 너도 알다시피 사람 얼굴 기억 못 하는 거 한두 번이니?"
줄곧 팽팽했던 아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민석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고는 괜히 머리끝을 매만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본 아라는 급히 선수를 쳤다.
"알았다고. 장사란 본디 사람이 주체이니, 눈썰미가 젬병인 만큼 숙고하고 고려해 볼게. 반갑게 만날 자신 없으면 세무서부터 안 갈게."
"민원실 근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나 당분간은 아니 한동안은 다람쥐 해야 해. 그니까 걱정 말라고."
"그림 그려준 그 남자 잡아요."
"본 적도 없으면서."
"선머슴 싸부를 캔디 만들어 놨잖아. 사랑의 힘이 아니면 어림도 없어요."
손바닥만 한 종이 위로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지나치게 큰 눈은 외계인을 연상케 했다. 줄곧 이어진 타박에 진호는 말했다. '본디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크고 맑은 눈을 좋아한다고, 마침 그런 눈을 만난 반가움에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며 그는 말로 아라의 입을 막았다. 오롯이 서로를 향했던, 달콤하기만 했던, 그날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라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 문득이고 불쑥일 거라 여겼던 오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때때로 아니 매 순간 진호가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