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63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생선 뒤집지 마라. 배 뒤집힐라."

진호는 가시를 바른 생선 조각을 정현의 밥 위에 놓았다.

"뭐야. 다정하게. 혼자 먹기 싫어 온 거야. 고기 먹자니까."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으나 정현은 연신 입을 오물거렸다.

"번거롭잖아. 손질도 손질이지만 냉동은 뭔가 아쉽고, 아무튼."

"바닷가 출신 티 내기는. 뭐 맛은 있다 해도 배가 안 불러서."

진호는 다시금 가시를 바른 생선 조각을 정현의 밥 위에 놓았다.

"좋아하는 사람 많이 드세요."

생선구이집 간판을 등지고 선 정현은 시선을 바삐 돌렸다. 빵- 클락션 소리에 이어 익숙한 진호의 자동차가 보이자 서둘러 앞좌석에 올라탔다.

"레몬이야?"

정현의 시선은 차량 내 룸미러에 매단 장식 소품에 머물렀다.

"응."

"십자가, 묵주, 염주, 보통은 그러잖아. 좀 생경스럽다."

대답 대신 진호는 웃음을 흘렸다.

"왜?"

"우리 처음에 갈등이 좀 있었잖아. 넌 내 사투리에, 난 네 서울말에."

"그랬었지. 근데?"

"생경스럽다.. 진짜 서울말이더라. 본인 본적이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어디라며 곧 죽어도 서울 사람이라며 '생경스럽다' 어지간히 들먹이더라."

"진호야. 라면 먹고 가라."


액자형의 커다란 창문에는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은 아니었으나 붉은 해의 꼬리가 남아 있었다. 정현은 일조량을 1순위에 두었다. 비록 그가 원한 정남향은 아니었으나, 지는 해가 오후부터 들어와 늦게까지 머무는 남서향이었다. 아침형 인간인 자신과 오후형 집은 찰떡궁합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서일까? 사람의 온기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들어온 해의 기운은 종일 빈 집임을 잊게 할 만큼 포근했다. 33층이었다. 고층 건물이란 입지는, 늘 올려다 보기 바빴던 일상에 굽어보는 미학을 안겨 묘한 쾌감을 불러왔으며, 촘촘한 송곳들을 단번에 제압해 탁 트인 전망까지 안겼다. 공기의 질만 좋다면 한참 떨어진 한강까지의 조망도 가능했다.

"종합해 보면, 본적은 서울이나 현거주지는 대전이고, 수녀님 아닌 보통 여자라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무사고를 위해 손수 건넨 부적이라며. 룸미러에서 대롱대는 그 레몬이. 자고로 마음 없는 곳에 물질도 없는 법, 왜 망설이는데?"

무사고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혹여 교통 체증으로 인한 짜증이 밀려올 때 아말피 해안 도로라는 생각의 전환을 해보라며, 묵주 반지에 대한 보답이라며 아라는 부득불 레몬 모양의 장식을 건넸었다. 품고 있는 의미 때문일까? 진호에게 있어 그것은 십자가였고, 묵주였으며, 염주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말도 없이 테이블에 애먼 동그라미만 그려대는 진호가 보기 싫었는지, 정현은 그의 핸드폰을 건드렸다. 지금 당장 걸어 보라는 듯.

"번호가 바뀌었더라."

"맙소사."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꼴이라니."

진호가 내쉰 숨이 깊었다. 답답하기는 정현도 매한가지였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거냐고?"

"피렌체, 로마, 아시시, 포지타노까지,, 늘 사건이 있었고, 난감한 상황들도 제법 있었는데 어찌어찌 해결하게 되더라. 그냥 종 자체가 달랐어. 때론 무모할 만큼 용감했지. 강한 척했지만 한없이 여리고, 그런 와중에 열정은 넘쳐 또 대충은 없지. 상처받기 싫어 제자리걸음하는 비겁한 반면 지극히 현실적이지. 절로 마음이 기울고 손도 가는 그런.."

"보고 싶지?"

"어."

"기다렸다는 듯 답을 하면 어떡해? 물은 사람 미안하게."

"너무 치졸하게 행동했어."

"유치하고 또 졸렬하고. 사랑은 원래 그런 거야."

평소와는 다르게 그날은,, 선을 긋는 아라의 태도에 괜히 화가 났다.

"지나가는 말에 꼭 그렇게까지 정색을 해야 해? 정말 그런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객쩍은 말을 왜 해?"

"옆에서 바라보는, 기다리고 있는 나는 안 보여? 보란 듯이, 긋고 또 그어야 해?"

"바라보라고,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 시간이 지났음에도, 너를 향한 나의 자리가, 나를 향한 너의 자리가 딱 이만큼인 건, 그건,, 변하지 않는 거야."

앙상한 가지에 몇 개 달리지도 않은 그 나뭇잎을 흔들어대고도 성에 안 찼는지 모진 겨울바람은 틈이 벌어진 방문 사이를 파고들어 꼬리를 길게 들어 올린 등잔불의 작은 불씨마저 툭- 꺼트렸다. 그 모진 바람이 아라의 목소리 같았고, 꺼져버린 불씨는 차갑고 시린 자신의 눈동자만 같았다.

"그만하자."

쩍- 금이 간 얼음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먼 메이리처럼 퍼졌다. 앙칼지지도 그렇다고 다급하지도 않은 그 냉기를 삼킬 수가 없는지, 한동안 공기 중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그날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반비례하여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애써 용기를 내려는 그를 주저하게끔 했고, 나아가려는 그를 붙들었다.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수시로 찾아와 단단히 옥죄었다.

"진호야!!"

정현의 인기척이 아니었으면, 진호는 깊은 나락 속에서 허우적거렸으리라. 그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자 보기 안쓰럽다는 듯 정현은 말했다.

"그럼에도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보자."

정현은 몸을 숙여 진호에게 기울였다. 힘을 합쳐보자는 듯.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뭔데?"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진호의 얼굴에 생기가 돌자, 정현의 두 눈도 덩달아 커졌다.


강원도 어딘가에 첫서리가 내렸다 했으나 첫눈 소식은 아직이었다. 12월을 목전에 두었을 뿐, 달력은 11월에 멈춰 있었다. 그럼에도 명동 성당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홀로 분주했다. 때 이른 광경을 보고자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해 평일 오후임에도 성당 앞은 북적였다. 군집한 무리 중, 비눗방울 장난을 치는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만큼 신난 건 아니었지만, 아이를 보느라 바쁜 아라는 시종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때만큼 그녀의 웃는 얼굴이 반갑지 않았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의 첫 만남을 복기했다. 또 다른 시작일까? 아니면 마지막일까? 한껏 부풀어 있던 그의 마음이 조금 주춤했다. 얼른얼른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진호는 빠르게 걸었다.

"고아라."

"김진호!!"

애써 침착한 척을 진호와는 달리 아라의 목소리는 껑충 뛰어올랐다.

"수녀님,, 찬스를 썼어. 불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 어.."

아라를 앞세운 진호는 성당 근처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의 2층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고, 머그잔에 담긴 따듯한 아메리카노는 정작 뒷전이었다.

"나랑은 다르게 수녀님이라면 한달음에 올 거라 생각했지."

"마지막 한국행일 거라고. 얼굴 보자 하시는데 어떻게 안 와. 실은 너무 감사했어."

"서울 지리 익숙지 않은 고아라기에 명동 성당으로 잡았어. 화 난 거 아니지?"

"수녀님을 등장시키기에 성당만 한 곳은 없지. 머리 많이 썼네. 노력한 보람도 없게 화를 내면 쓰나. 각본이 제법 그럴듯했나 봐. 수녀님이 손잡아 주신 걸 보면."

"크리스마스는 그런 거잖아. 믿지 않은 사람도 사탕을 얻고, 간절한 기도도 이뤄지고. 크리스마스는 아직이다만, 그럼에도.."

"어쨌거나 얼굴 보니 좋다고. 그러니 그만하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진호는 DEL GIGLIO의 수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안부 인사나 건네자며, 간간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자며 주고받은 이메일 주소였건만, 제 욕심 채울 수단으로 이용됨에 진호는 마뜩잖았으나 이것저것 가릴 형편 아닌 그였기에 어렵사리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렸다.

'고아라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세요. 수녀님.'

'걱정 말아요. 형제님.'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아니면 진호의 마음 한 자락을 이미 보아서일까? 이에 수녀는 흔쾌히 조력자가 되기를 자청했고, 제 역할에 충실했다. 초로의 수녀는 자신의 신분과 입장을 십분 활용해 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아라를 옭아맸다. 진호가 툭- 던진 텅 빈 도화지에 수녀는 성당이라는 밑그림을 그리고 온갖 색을 칠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냈다. 아라가 말한 제법 그럴듯한 각본을 넘어 더없이 완벽한 각본이었다. 진호는 이역만리의 조력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를 잡아. 건투를 빈다. 김진호!!'

"끝자락이라서일까? 그때 일이 내내 걸리더라.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늦었지만 바로잡고 싶었어. 옹졸하게 굴어 미안했어."

"시작은 나였는걸 뭐."

고개를 숙이며 아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진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깨를 살짝 덮는 짧아진 기장, 노란 고무줄은 없었다. 늘 보았던, 눈에 익은, 기억 속의 아라가 아니었다.

"전화번호 바꾼 건 그렇다 했어. 수녀님도 알고 계시는 바뀐 번호를 나만 모르다니. 실수 아닌 계획에 의한 차단이 맞구나 했지."

슬쩍 찔러보기는 했으나 분명, 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번호를 바꾸고, 알리지 않은 이유가 결국 차단을 위한 밑작업이었는지,, 묻고 듣고 싶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막연한 불길함이 사실일까 봐, 해서 한 가닥 남은 불씨마저도 꺼질까 봐..

"그게."

갑자기 들어온 진호의 말에 아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크리스마스 카드 보낸다는 뻔한 거짓말로 집주소라도 받아둘 걸,, 하는 그런 늦은 생각도 했어. 핑계 김에 찾아갈 수도 있을 테니. 안일한 생각이 결국 발목을 잡은 셈."

시선을 돌리려 고개를 숙이자 앞머리가 눈을 건드렸는지 진호는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 잘 어울린다."

"공연 핑계로 길렀는데, 괜찮다고들 해서 좀 더 기를까 봐."

"그러게. 공연 때보다 좀 더 기른 듯."

"설마,, 왔어?"

"응."

"로얄석이 아니어도 보이던데."

"말을 하지."

"공짜 커피 맛이 없듯, 공짜 티켓 역시 별로야.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으니."

"해서 어땠는데?"

"클래식과 크로스오버의 적절한 조합이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고 좋았어. 그중 누구랑 가장 친해?"

"노정현.. 알아?"

"un amore cosi grande!!"

배우에게 인생 캐릭터가 있듯, 정현에게는 un amore cosi grande가 있었다. 보는 눈이 같듯 듣는 귀 또한 그러했다.

"웬만한 버전 다 들어봤어. 파바로티, 보첼리, 김현택 등등.. 그래도 내 귀에는 노정현. 만약 테이프였다면 끊어질 때까지 들었을 거야. 세상 그 어떤 테너라도, 심지어 스핀토 테너라 하여도. 그 곡은 노정현 거야."

"그럼 나는?"

"말했을 텐데. 'Love will never end'라고."

"이번에도?"

"내로라하는 테너 네 명이 뿜어내는 선율에, 엔딩요정은 여전히 김진호가 맞건만, 오디션 무대가 더 좋더라. 피 말리는 긴장감이 없어서일까? 콜로세움에서 내가 엄청 비아냥댔잖아. 도망친 노비의 자손 운운하면서. 아마 그 시대에 살았으면 1열 관람객이었을 거야. 내가 또 그렇게 잔인하다는."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던진 농이었건만, 진호는 말려들지 않았다.

"이제야 고아라 같네."

"응?"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진호는 말머리를 돌렸다.

"공연에 집중했다니 어쨌든 다행이네."

"발성법부터, 곡의 해석 등등,, 동행 내내 일타강사 해줘서일까? 알고 듣는 클래식은 좀 다르더라.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더라고. 실은 오해하고 있었어. '남몰래 흐르는 눈물' 말이야. 바순 위로 덧입혀진 슬픈 선율 때문

일까? 아디나를 짝사랑하는 네모리노의 심경을 대변한 곡인 줄 알았으니. 올린 이는 모르지만 한예종 레전드란 제목을 단 영상이라, 시기가 딱 피아노와의 이별 후인 듯해서 엄청 돌려봤지. 실은 이번 공연 예습하다 보니 그 넘버 부르길래, 비교하러 간 거였어. 이별 후,, 김진호의 시그널이야?"

'이별'이란 단어를 언급한 건 그의 마음 한 자락을 엿보고픈 의도가 반영된 것이리라. 호기롭게 뱉은 말과는 달리 아라의 시선은 슬쩍- 진호를 곁눈질했다.

"그래서 어느 버전이 더 좋았는데?"

"알지? 일단 꽂히면 엄청 집요한 거.. 전문가라도 되는 양 듣고 보고 철저하게 분석했지. 깎고 다듬어 기교는 물이 올랐을지언정 감정선은 옛 버전이 더 좋던데."

"그때와는 다른 감정선이니 당연한 거고."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말없이 잠시 엉켰다. 분위기 전환이 시급했다.

"김현택,,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는.. 한참 늦었지만 귀국 축하한다고 전해줘."

"이왕이면 결혼도."

"결혼?"

"누군지 안 물어봐?"

"내 선배도 아닌데."

"형은 고아라 알아. 그게.. 예비 형수님도 노란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있길래. 자연스레 시선이 갔고 결국 노란 고무줄을 한 고아라를 말할 수밖에."

멋쩍은 듯 진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했잖아. 고무줄은 소모품이라고. 축가는 누가 불러? 하긴 누가 불러도."

정작 하고자 한 얘기는 입도 뻥긋 못하고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한 번 방향을 잃은 대화는 계속 엇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화를 이어가야 했기에 진호는 결국 아라의 관심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바게트랑 크로와상은 정말 맛있더라."

"다행이다."

"매일 갔어. 고아라는?"

"숙소가 에펠탑 근처라, 인근에도 맛난 빵집이 많더라고."

"난 6월 20일에 들어갔어. 23일이었나?"

"응."

"파리 일정이 겹치길래, 상상했었어. 우연한 만남은 다소 어색했으나 크로와상 열 개를 안겨 곧 반가움으로 변하지. 혹 그럴까 싶어 매일 갔었는데.. 스페인이랑 포르투갈은 어땠어?"

"살이 타는 듯 더웠는데, 그래도 좋았어. 건축학도는 아니다만 가우디의 건축물도 좋았고, 춤과는 거리가 멀지만 세비아의 플라멩코 공연은 환상이었어. 악명 높은 리스본의 28번 트램도, 제로니모 수도원과 벨렘 에그타르트도, 포르투 상벤투역 내부의 아줄레주도, 렐루서점도, 동 루이스 다리의 일몰도, 포트 와인까지,, 기회가 되면 꼭 가 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거긴 못 가봤어. 줄이 너무 길더라. 고아라는?"

"당연 갔지."

"그랬구나. 거길 갈 걸 그랬구나."

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침울했다. 아라는 손목에 찬 시계를 흘깃거렸다.

"몇 시 기차야?"

"6시 10분"

휴대폰 바탕 화면에는 5시 12분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어나야겠네."

"응."

부스럭대며 그들이 일어섰다. 머그잔에는 마시지 않은 식은 커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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