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64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혼자 갈 수 있다는 아라의 뜻을 꺾고 진호는 부득불 서울역까지 동행을 했다. 부산행 6시 10분 KTX는 11번 플랫폼에서 출발한다고 전광판은 불을 쏘며 알리고 있었다. 아라는 손목에 찬 시계를 다시금 흘깃거렸다. 그것은 시간이 궁금해서라기보다 진호를 보내기 위한 극적 장치였다.
"이제 그만 가."
"기차 타는 거 보고."
출발까지 고작 십여 분 남은 상황, 이에 아라는 수긍했다.
"그래. 그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착한 11번 플랫폼은 대전, 동대구, 부산, 포항, 진주, 마산, 방면으로 향하는 곳이었다. 고속 열차는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고, 승무원은 열차에 오르는 승객들을 맞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 반가웠어. 갈게."
아라는 손을 내밀었다.
"인사는 늘 내가 먼저 하네. 로마에서도 그랬지. 혹 번호 바뀌면 그때는 잊지 않고 꼭 알릴게."
그제야 진호는 아라의 손을 잡았지만 이렇다 할 말은 없었다.
"혹 집 가는 길에 빵 생각나면 잠깐 들러. 울산에서도 많이 오더라."
실없는 아라의 농담에도 진호는 웃지 않았다. 머쓱한지 아라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잡은 손을 놓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곧장 열차에 올랐다. 아라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진호 역시 등을 돌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중간쯤 올랐을까. 몸을 틀어 바라본 기차의 출입구는 닫혀 있었지만 아직 출발 전이었다. 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서도, 그것이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수녀님께 도움을 청했던 것은,, 공연 리뷰나 여행 후기를 듣고자 함은 아니었다. 정작 할 말은 한 음절도 꺼내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창문에 머리 몇 번 박으면 될 일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꺼져가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에 부응하여 내동 잠잠하던 다리가 움직였고, 탄력을 받은 몸이 사람들 틈을 헤집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 끝까지 단숨에 오른 진호는 서둘러 반대편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틈이 난 자리를 파고들던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돌연 멈춰 섰다.
"김진호."
아라였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분명 그녀였다.
"내가 갈게. 기다려."
이 한마디를 마친 아라는 있는 힘을 다해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올랐다. 반대편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기까지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다급한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은 길을 터주었다. 마지막 계단을 벗어나자 한껏 속도를 내, 기다리고 있던 진호의 품으로 돌진했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이 조금 뒤로 밀렸고, 두 손은 반사적으로 아라의 등을 감쌌다. 의도치 않은 힘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진호가 손을 풀려는 바로 그때였다.
"보고 싶었어."
아라는 힘을 주어 진호를 와락- 안았다.
"다 거짓말이었어. 버스 정류장에 갔지만, 도저히 버스를 탈 수가 없어서 되짚어 문 앞까지 갔는데, 벨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어. 혹 마주치면 펑펑 울까 봐 서점도 빵집도 가지 못했어."
"기껏 뺨 한대가 다겠지. 성당 앞에서 달려가 안고 싶었어. 근데 아무 일 없다는 듯 웃는 네 모습에, 싹둑 자른 머리에, 손목에 고무줄도, 묵주 반지도 없는,, 더 이상 고아라가 아닌 듯했어."
별안간 아라는 그에게서 몸을 떼고 모직 코트 안, 터틀넥 니트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내 뺐다. 꼭 쥔 손을 펼치니 금속 물질이 반짝였다. 묵주반지였다.
"받은 경로 실토는 물론,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 또한 자신이 없어서. 수녀님만 아니었으면 분명, 끼고 왔을 거야. 맹세하건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거든."
진호는 아라의 목에 걸린 묵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나에게로 오는 길을 잃지 말라는 당부였어."
"곱씹어 볼수록 재수 없던데.. 밉지 않았어?"
아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 없다는 듯.
"미웠지. 재수 없었지. 욕도 한바탕 했지. 그럼에도 보고 싶었어."
바라다보는 진호의 온도는 따뜻했다.
"애당초 친구도 아니면서, 그마저도 어그러지면 어쩌나 지레 겁먹었어. 그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고 그러고 나니 방법이 없더라. 그럼에도 도망갈 구실을 찾겠지. 비겁하게도.."
아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고, 종내 끝없이 추락한 자신을 보는 것이 두려워, 이별을 부러 상상하며 망설이는 반면 일단 시작을 하면 상대를 그리고 자신을 위해 깜냥 노력하겠지. 사랑이 노력에 비례한다면 좋겠지만, 적어도 깨닫게 되겠지."
"지치겠지. 밑바닥도 보겠지. 진저리를 치겠지. 오만정이 떨어지기도 할 테고."
"사람은 누구나 그래. 불안정하고 서툴지.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하나의 합의점을 찾으려는 과정이 어찌 순탄하기만 할까? 그럼에도 숱한 진흙탕을 견딜 수 있는 건, 반드시 끝은 있다는 그 믿음과 신뢰 때문이야. 정복해야 할 목표인가? 풀어야 할 숙제인가? 정작 방점은 고아라 아닌 나였던 거야. 도망갈 구실을 만들지 못하게 노력할 거야.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하다 못해 안 되면 섬투어도 있고, 임신을 장려하고 낙태를 반대하는 게다가 이혼을 금하는 천주교 신자가 되는 방법도 있고.."
마음과는 달리 아라는 미간을 좁혔다.
"세상 흔한, 사랑한다는 말은 필요 없어. 그렇지만 세상 슬픈, 헤어지자는 그 말 역시 금지야."
아라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조금 흔들렸다. 진호가 아라의 양볼을 조심스레 감싸자, 시선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che Dio ti favorsca'.. 모른 척하며 동행을 원한 그때였던 것 같아. 그리고 또 알았지. 소렌토 바닷가에서 너여야만 하는 이유를, 그리고 맞았어. 세상에 그냥은 없는 거야. 고아라를 보내시어 수녀님을 통해 깨닫게 하셨지만, 이에 순응치 않은 나를 벌하신 거야. 다시 만나기까지."
진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진호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이에 참고 참아 한가득 고였던 눈물이 아라의 볼을 타고 주룩 흘렀다. 그 눈물을 조심스레 닦고 진호는 아라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아라의 옆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 대었다. 한번 흐른 눈물은 쉬이 멈출 줄을 몰랐고, 어깨까지 들썩이게 했다. 커다란 그의 손이 아라의 등을 가만가만 쓸었다. 그러기를 얼마, 그의 가슴팍에 안긴 듯 얼굴을 묻은 아라에게 생경스런 소리가 전해졌다. 꼬르륵-
"안 넘어가서 점심을 걸렀더니."
시선이 엉킨 채로 그들은 한참을 웃었다.
골목길 끝자락에 붙은 음식점, 높은 빌딩숲을 뒤로하면 만날 수 있는, 아는 이나 올 법한 외진 곳이었다. 물을 먹은 듯 한껏 몸집을 부풀린 목재 입간판에 멋대로 휘갈긴 글씨, 틀에 맞춘 듯 정형화된 여타의 간판들에 질려 있던 참이라 그런지 허술한 그 모양새가 나름 정감 있었다. 허름하다는 인상뿐이었다. 유리창은 희뿌연 아크릴지로 도배되어 있어 안의 풍경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궁금증을 자아내지도 않았다.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 반해 남는 건 시간뿐인 인근 노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려니 했다. 요전날 방문한 아라의 눈에 비친 광경은 그러했다. 지금은 귀해진 미닫이 문의 손잡이를 잡아 힘껏 밀었다. 이가 안 맞는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덜그럭거렸다. 30평 남짓 되어 보이는 공간에는 예상대로 노인들이 더러 있었고 뜻밖에 젊은 무리들도 여럿 되었다. 마주 앉은 것이 일행처럼 보였으나 핸드폰에 시선을 꽂은 채 연방 숟가락질을 하는 것이, 각자 와서 한 테이블에 앉은 듯한 모양새였다. 다소 한산했던 저번과는 달리 북적이는 광경에 아라는 어리둥절했다. 소문난 맛집이라더니.. 멈춰있던 아라를 깨운 건, 카랑한 목소리였다.
"두 분이시면 이쪽으로 오세요."
목소리에 끌려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치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머물렀던 듯, 약하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쪽나무를 이어 붙인 나무 탁자의 이음새 부분에 균열은, 잇새가 버그러진 노인의 입속을 연상케 했다.
"곰탕 두 개, 만두 한 접시 주세요."
인기척을 느낀 아라가 건넨 말이었다.
"최 작가, 동생.. 맞죠?"
"안녕하세요. 기억하세요?"
아라의 목소리에 온기가 묻어 있었다. 흰머리가 듬성한 여인의 눈매는 단호했고, 애써 웃는 입매를 한 채로, 시선은 진호를 향하고 있었다.
"애인이면 놓치지 말고, 친구라면 올해 넘기지 말고 애인 만들어요."
낯선 네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는데도 전혀 동요치 않고, 그녀는 테이블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할 말이 있다는 동작만 같아 그들 역시 여인 쪽으로 슬쩍 몸을 내밀었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외국물 먹었다 해서 혀 꼬부라진 건 영 꼴불견이라. 한국말이 서툴지가 않길래, 낯선 음식이었을 텐데 국물 하나 남기지 않은 게 예뻐서,, 장사하는 입장에서 그보다 좋은 건 없거든. 깍두기가 기가 막혀요. 내 얼른 가져올게."
평소였다면,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며 어른입네 하는 멋대로인 당당함이, 차고 넘치는 쓸데없는 오지랖이 거슬렸을 텐데, 그냥 헛웃음만 났다. 이상하리만치 푸근한 느낌이었다. 아라에게는 생경스런 느낌이었다.
"타고난 거짓말쟁이였어."
"응?"
"서울에서 가 본 곳이 대체 몇 군데야?"
"한여름에 웬 감기나며 사촌 언니 손에 끌려 왔거든. 언니가 여기 단골이라 기억하시는 거고."
아라가 작은 숨을 토해냈다.
"들켰네. 오히려 속은 시원하다."
"뭐가?"
"언니한테 들킨 것도 모자라 김진호에게 들켰지. 결국 사장님까지 아셨으니. 평소 멀건 탕국은 즐겨하지 않아서. 곰탕을 빤히 보고 있던 나를 대신한 언니의 변명이었어. 감기에 걸린 사촌동생 역할로,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먹는 방법을 몰라 망설이고 있는 설정으로,, 작가인 사촌 있다 했잖아. 감기 아닌 이별 후유증이란 걸 들킨 셈. 좀 전 사장님 말씀에 의하면."
"속은 척하신 건 아닐까?"
"그럴지도. 아프리카에 산다 한들, 뼛속까지 한국인이라 한 술 넘기는 게 어렵지. 그다음은 술술 넘어갈 거라고. 친히 먹는 방법도 설명해 주셨거든."
아라는 억지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새기던 진호는 이내 정색을 했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와서 사촌만 보고 쌩- 갔다는 거네."
마주한 시선을 애써 돌리며 진호는 억지 서운한 척을 했다.
"그게.. 김진호가 너무 보고 싶어 무작정 왔는데, 미아 되는 바람에. 번호 바꾼 것도, 지운 것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그럴수록 든든해야 한다며 언니 손에 이끌려 온 곳이었어."
배시시- 진호가 웃었다.
"웃자고 한 얘기 아니거든."
아라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피렌체 두오모 쿠폴라 벽에 낙서 안 한 이유 물었지? 소원을 이뤄주는 어쩌고 저쩌고, 그런 거 믿지 않으니까. <전설의 고향>에서 보면, 임신하지 못한 여인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올린 후 아이가 생겨. 사람들은 말하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러나 실은 스님의 아이거든. 생각해 봐. 몇 년을 수태하지 못했는데 기도 한 번에 절로 아이가 들어선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냐고??"
아라는 입을 쩍- 벌리고, 절로 커진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이 무슨 어불성설이냐는 듯.
"까를교 성 네모무크 상에 소원을 빌었어 아니 협박이었다는 게 맞겠지. 어느 날 고아라가 날 찾아오게 해 달라고."
"에이, 거짓말.. 정말?"
"지척에 친구가 사니 편히 쉬라며 고아라를 집으로 데려 오지. 근데 친구네 갔더니 마침 여자 친구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함께 밤을 보내. 드라마의 단골 장면. 클리셰는 늘 진리야."
"김진호!!"
"전에 말했을 텐데. 매너 좋은 신사는 아니라고. 친구의 여자 친구를 대신 보내는 그런 뻘짓은 안 한다고. 실망했어?"
"설마 밤새 쎄쎄쎄나 하자고? 행정 구역을 벗어났다는 건, 마음의 빗장을 스스로 열었다는 거야."
껄껄- 진호의 목울대가 시원하게 울어댔다. 김이 올라오는 검은 뚝배기와 큼지막한 만두 그리고 윤기 자르르한 수육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수육은 주문 안 했는데요."
"이건 서비스. 최 작가 동생이면 단골이지."
낮게 속삭이며 슬쩍 윙크를 날린 여사장은 총총 사라졌다. 얄팍하게 저민 섞박지와 네모 반듯한 크기의 깍두기가 조그만 항아리에 가득 담겨 있었다.
"따로도 좋고, 말아도 좋아. 그렇지만 깍두기는 꼭 얹어야 해. 사장님이 전해주신 팁인데, 기가 막히지. 취향은 물론, 입맛도 없던 터라 막막했는데, 데려 온, 알려 준 성의를 생각해서 수저질을 했는데, 웬걸,, 술술 들어가는 거야. 말술 먹고 해장할 때처럼 말이지. 속이 뜨끈해지고 개운한 뒷맛으로 인해 절로 기운이 났어. 따듯할 때 먹어."
진호의 숟가락질이 시작되었다. 기분 좋게 펴지는 얼굴 근육을 보며 아라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 집은 빤한 것 투성이야. 곰탕, 수육, 만두, 추워지면 만둣국이 추가된다고. 엄마가 딸에게 딸이 또 딸에게로, 그렇게 3대를 이어 온 집이야. 전쟁 통에 피난은 왔다만, 뱃속에 막둥이는 들었지,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한 그릇 두 그릇 팔았던 게 지금의 뿌리였데.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이 공존하는 가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과, 푸근한 인심에 길들여진 각기 다른 손님들로 북적였지. 고향땅을 밟고픈 당연한 욕심에 할머니는 아흔을 훌쩍 넘기고 가셨어. 그런데 문제가 생겨."
"실향민들의 발걸음이 뚝- 끊긴 거구나."
아라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경쟁 업체에 치였구나. 길가에 곰탕집 제법 크던데."
"아니. 사장님이 편찮으셨데. 꾸역꾸역 유지하자니 몸이 힘들고, 그만두자니 막막했는데 글쎄, 따님이 주방으로 들어오더래. 해서 반색은커녕 등을 떠미셨다고. 어머니와 당신이 살던 세상도 아니거니와, 작은 공간에서 간신히 몸만 옴짝달싹하는 부엌데기 신세를 자처하겠다는 따님의 말에 억울하고 원통하셨데. 한평생 바지런히 움직였던 공도 없이, 고생길 대물림하는 것만 같아 당신 가슴을 움켜쥐고, 애먼 딸에게 분풀이를 늘어놓았는데,
'살아서도 못 밟은 고향땅인데, 돌아가신 후에 오실 곳마저 없다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
따님의 이 한마디에 그냥 무너지셨데. 그런데 집안 단속이 끝나자마자 또 시끄러워졌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걸 본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는 길가에 버젓이 곰탕집을 열어. 예우도 없이 말이지. '상도'는 드라마 제목일 뿐이었어. 넓은 실내, 깔끔한 인테리어,, 그들과 경쟁하려면 변화가 시급했기에 따님은 대대적인 공사를 계획했는데,
'제삿밥 먹으러 왔다가 들릴 테니 그대로 두소. 자식들로 하여금 나를 기억하게 하고 싶으니 바꾸지 마소.'
길가에 곰탕집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도, 좁다란 골목길을 한참을 걸어와 곰탕 한 그릇 비우고 가는 손님들의 입장을 곱씹어 보니, 진정 그들이 원한 것은 멋이 아닌 맛이고 추억이더래. 손님들의 추억을, 할머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로 하고 결국, 공사 계획은 엎었다 했어."
"고아라는 그걸 어떻게 다 알아?"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처럼,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향하며 다짐했데. '이름 석자 알리기 전에는 한강 다리를 건너지 않으리라'.. 밤낮 없던 방송국 생활을 정리한 후 작은 출판사에 들어갔는데 회식이라고 데려온 곳이 여기였지. 보아서 알겠지만, 젊디젊은 사람 입장에서 그리 호감 가는 곳은 아니잖아. 언니랑 나랑 식성이 비슷해. 멀건 국은 그닥이라 대충 먹는 시늉만 하자 한 것이 결국 싹싹 먹어치웠더래. 그게 시작이었고, 이모랑 비슷한 연배의 사장님에게 엄마의 정을 느꼈던 거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며 오래 버텼지. 회식 장소가 변경되었다면 진즉에 그만두었을 거야. 먹고사는 것이 팍팍하다 보니 글자 하나 쓰기 어렵고, 한참 끝에 나온 글자는 독기만 가득하더래. 안 되겠다 싶어 돈을 벌자 마음먹고, 젊음 하나 믿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를 얼마, 몸이 축 난 상태로 이모의 불심검문에 걸려 그길로 대전 집에 끌려 내려왔어. 어린 내 기억에는 말이야. 까닥하다가는 줄초상 치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으니 말 다했지. 그런데 상한 몸을 추스리기도 전, 언니는 떠날 채비를 했고, 자신을 바라보던 이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데. 언니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해.
'본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있어, 한번 먹은 마음 끝을 보는 성격인지라, 부모 그늘 마다하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는구나. 보내기는 싫으나 그렇다고 잡을 수도 없고, 부디 고집과 집념이 선한 영향력이 되어 반드시 살아남기를..'
근데 정작 언니는 다른 마음이었다고. 집에 있는 동안 이 집 곰탕이, 만둣국이,, 그렇게 생각났데. 이모는 이 내막은 모르셔. 이제 세 명으로 늘었네."
진호는 시원스레 웃음을 쏘아 올렸다.
"여기 만둣국이 그렇게 맛있데. 추워지면 다시 오자."
"좋아. 만둣국도 좋고. 비밀도 좋고. 같이 오자는 고아라는 더 좋고."
아라는 슬그머니 볼을 밝혔다. 바라보는 진호의 미소가 부드러웠다.
"다시 기차역이네."
또다시 서울역이었다. 열차의 발차를 알리는 전광판을 휙- 돌아보며 아라는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빼내려 했다. 그러나 놓기는커녕 진호는 되레 힘껏 잡아당겨 아라를 품에 안았다.
"아쉬움의 포옹 운운하며 노선 지키라는, 그만하자는 그런 객쩍은 말이나 뱉으며,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 아시시 프란체스코 성당에서의 그 밤에도, 소렌토 GRAND HOTEL EXCELSIOR VITTORIA에서, 아말피의 이름 모를 골목에서도,, 비겁했던 건 정작 나였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던 톱니바퀴에 어느 날 작은 돌이 날아와 툭- 박혀 그대로 멈췄어. 근데 정작 난 그 돌을 빼고 싶지 않았어.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이었어.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진호는 힘을 주어 아라를 옥죄었다. 놓지 않겠다는 듯. 싫지 않은지 아라 역시 미동도 않았다. 바삐 움직이던 전광판의 글자들이 느릿하게 바뀌었다. 썰매가 얼음을 지치듯, 캐리어는 쉭- 소리를 내며 달렸다. 또각또각- 긴 꼬챙이를 매단 구두 역시 깜냥껏 뛰고 있었다. 갈길 바쁜 누군가는 때아닌 접촉 사고로 인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동요치 않았다. 돌고 돌아온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서로에게 깊숙이 파고들어, 숨을 고르고, 체온을 느끼고, 마음을 새겼다. 너를 위한 나의 자리는 어디쯤이며, 나를 위한 너의 자리는 또 어디쯤인지를 되묻는 헛수고는,, 더는 필요 없게끔 말이다.
.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