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겨라 마음 자락 보일라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 했던가. 고작 여덟 번의 외출이었음에도 일요일의 시계 초침이 더디게 가는 걸 보면 말이다. 평소 부족했던 잠이나 자볼까 하는 마음에 억지로 눈을 감아 보지만 한낮의 햇살이 그마저도 훼방을 놓았다. 책보다야 음악이지..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드는데 지잉-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후배님..

“별일 없으면 닭갈비집으로 와요.”

뚝 끊긴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이불을 박차고 나와 행거에 걸어두었던 청바지에 몸을 욱여넣고 캡모자를 눌러쓰고는 욕실 거울 앞에 섰다.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한참 이르지만 저녁도 먹어야 하고 자고로 외식이란 쉬이 요리할 수 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기에, 불러낸 사람이 계산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일 테니, 꿩 먹고 알 먹고 더해서 깃털로 펜대까지 만드는 격이 아닌가? 노느니 염불한다고 심심하던 참에 잘됐다며 현관문을 나서는 정은의 발걸음은 광수체였다. 지나치게 발랄했다.


흰 와이셔츠에 레드와 네이비 배색의 레지멘탈 스트라이프 타이, 위아래 감청색 슈트로 한껏 차려입은, 마주한 인범을 보며 정은은 캡모자의 멀쩡한 챙을 고쳐 썼다.

“소개팅 꽝이었구나. 음식 나오기 전에 술부터 한 잔 할까요?”

"집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럼 저녁 약속인가?”

“그럴 수도. 밥 먹고 2차 가면.”

“스무고개 해요?”

어금니를 악물고 정은이 사납게 으르렁댔다.

“평상시 모습이 궁금해서.”

“새집진 머리하고 무릎 나온 추리닝 입은 채 뒹굴거리다 아점 먹고 졸리면 한숨 자고. 쉬는 날 풍경이 그렇지 뭐. 머리는 아직이지만 양치는 했어요."

“굿잡. 모자 잘 어울려요.”

“빙 두르지 말고 하고픈 말 해요. 거, 아니면 드레스코드에 대해 설명을 하던가. 앞치마 필요하면 말하고."

“신경 쓰이는구나.”

“그럼 아닐까요?”

“성공했네. 그러라고 입고 온 거니까.”

인범의 속내가 여간 궁금한 정은은 보란 듯이 테이블에 놓인 젓가락을 건드렸다.

“낮술은 위험한데.. 안 마시고는 못 배기겠다.”

답답했던 모양인지 이내 인범은 넥타이를 매만져 느슨하게 했다. 컵에 담긴 물을 마시는 척을 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정은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나 이 상황 알 것도 같은데.”

귀를 쫑긋 세운 채 인범은 정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예전 직장 동료가 첫 만남에 소개팅녀를 순대국밥집에 데려갔데요.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다만 마음의 눈엔 반할지에 대한,, 일명 탐색전."

“어떻게 됐어요. 두 사람은?”

“결혼해서 햄도 볶고 깨도 볶고 죽을 만큼 미워도 하고, 이번 생에 자식은 하나다 하더니만 터울 지는 딸내미 재롱에 칼퇴근한다나 뭐라나."

“그렇다면 다행이네.”

“뭐가요?”

“육하원칙 필요 없을 거 같아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말없이 잠시 얽혔다.

“말하지만, 반할지에 대한 탐색전은 아니에요.”

하아.. 들릴 듯 말 듯 정은이 마음의 소리를 뱉어냈다.

“궁금해졌거든. 당신이란 사람이. 아무한테나 이런 제안하는 얼빠진 놈은 아니니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안..이라고 힘준 인범의 말을 정은은 곱씹었다.

“그렇다고 단박에 거절하지도 않았으면 해요, 틈틈이 생각했었고 기다리는 내내 고민했으니까.”

“술주정도 취중 진담도 아닌 듯한데,, 말은 짧아졌네요.”

인범은 이마를 쓱쓱- 문질러댔다.

“2차는 내가. 일어나죠. 형광등 불빛은 영 적응이 안 돼서.”


해는 아직 한창이었지만 커피숍 내부는 적당히 환했다. 등받이가 푹신한 페브릭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정은이 말문을 열었다.

“환경은 인간을 지배하는 법, 촘촘히 박힌 5w 전구색 LED 스폿 조명이 뿜어내는 인체 공학적인 채도."

“2차는 없을 줄 알았는데.”

“고백 아닌 제안인데 뭐. 이미 얼굴 익힌 사이 조금 더 알아간다고 해서.. 물론 남녀 사이 끝은 알 수 없지만.."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정은은 훗, 웃었다.

“근데요. 구태여 이런 자리 만들지 않아도 오며 가며 계속 볼 텐데. 나만 그런가? 수업 끝났다고 어서 오세요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칼 갈고 온 보람은 있어야죠. 안 그래요?"

"응?"

"심장의 검. 그렇게 부르던데. 넥타이."

"난 또."

피식- 흘린 웃음 때문일까? 잔뜩 긴장한 인범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교육장에서 봤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더 컸어요. 동선이 겹치는 건 우연 아닌 인연이니까. 과정 없는 결과는 없기에,, 해서 어렵게 운을 뗀 거고.."

"실은 나도요. '어쩌면 일연일지도' 하며 알쏭달쏭했는데, 스치는 것도 인연이 맞다면.."

"혹 잃어버린 명함 때문이라면, 그게.."

"애당초 그 명함에 발이 달렸었나 보다. 물음표였던 내 마음이 명함 얘기에 마침표를 찍었어요. 반할지에 대한 탐색전 아닌 궁금한 마음에 꺼내 놓은 제안이라고 선을 딱 긋는데 뭐. 그럼 나는 이 관계의 끝을 알고 싶은 걸로 하고 내민 그 손 잡겠다는.."

“나 화장실 좀. 물 뿌릴까 싶어 생수 원샷하는 바람에.”

테이블 위 빈 생수병을 흘긋거린 정은은 뭐 마려운 듯한 인범의 모습에 어깨를 들썩여가며 킬킬거렸다.

“그건 선 봉투 후 물세례지. 드라마 안 보나 봐요.”


커피숍을 나오니 어둑어둑했다. 도로 위 지열과 사람들의 온기까지 더해져 공기는 탁했고 얼굴에 닿는 바람은 후텁했다.

“안쓰럽다.”

손부채질을 하며 정은이 놀리듯 말했다.

“가야 내가 가지.”

“내 청춘을 바친 동네입니다. 먼저 가요.”

손부채질은 멈추었지만 놀리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

“이럼 내가 모자 탈의할 수도 있어요.”

인범이 정은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오자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가요. 얼른.”

인범이 멀어지는 만큼 정은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제안..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던 그의 마음이 아릿하게 박혔다. 이에 시린 듯 그녀가 양팔을 꼭 감싸 쥐었다.


잠깐 보자는 인범의 문자에 응한 정은은 퇴근 후 집 근처의 삼겹살집 안이었다. 한밤중 문자 ‘자니?’는 함축적인 의미지만 ‘잠깐 보자.’는 글자 그대로였다.

“날 잡아 놓은 예비부부. 이쪽이 내 친구, 오해하지 마요.”

선남선녀라는 말의 정석을 보여 주듯 정은의 눈에 비친 지훈과 연희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실은 제가 졸랐어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근사한 곳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오빠 일하는 현장이 근처라 두 남자 저녁 약속에 제가 낀 거고, 마침 언니 집도 근처라 하고. 평소 퇴근 시간이 또 마침이라 들어서.."

마지막 말줄임표는 작전일까? 목소리도 예쁜 연희는 낯을 가리는 듯 보였지만 하고픈 말을 조근조근 뱉었고, 인범을 가리키며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했다. 작전이 분명했다. 명색이 소개팅도 아닌데 삼겹살집이면 어떠하리? 닭갈비 집에서 할 말 안 할 말 뱉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리!! 벌어진 상황, 옷에 냄새라도 덜 배게 불판에서 최대한 몸을 멀리 둔 정은의 두 눈은 인범을 잡아먹을 듯했다.

“반갑습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냥 오다가다 아는 사이예요.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기싸움의 기본 원칙에 따라 속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주특기로 선공을 펼치는 정은이었다.

“이지훈입니다. 인범이랑 사춘기부터 쭈욱 친구고, 그런 놈 하나 더 있는데, 그놈은 다음에.. 인테리어 하고 있습니다. 3년 차면 손볼 곳 여기저기일 테니, 겸사겸사,, 시공업체랑 바이 바이 하셨다길래.."

기다렸다는 듯 지훈은 단박에 명함을 건넸다.

“.. 아. 천장 LED 전구 열 개 교체하는데 십만 원이나 부르잖아요. 전구도 내가 사고. 회사 스케줄 공란일 때 기다리느라 정작 가게는 캄캄이 했던 게 몇 날 며칠이었는데. 감춘 속내는 그만하자인 거 아니까. 그렇게 이별했어요. 하아~"

정은이 가슴팍을 부여잡고 억지 아픈 척을 했다.

“같은 말도 언니 입에서 나오면 전혀 다른 말이 된다고.”

풋- 연희는 웃음소리마저 이뻤다. 그녀의 손끝이 인범을 향하자 괜스레 술잔을 만지작거릴 뿐, 그는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우리 오빠가 그랬어요. 여자는 이쁘거나 웃기거나. 아..”

정은이 다시 가슴팍을 부여잡자 웃음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세 사람이 부단히도 노력했다. 핸드폰을 바라보던 지훈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목소리는 다급했다.

“현장에 문제가 있다네. 먼저 일어나야겠다. 연희야, 전화할게. 이따가 보자.”

“시간도 늦었고 얼추 먹은 거 같은데 같이 일어나죠.”


삼겹살집 간판을 등지고 선 정은의 두 눈은 흰색 아우디 A6 차량에 꽂혀 있었다.

“투기 지역도 모자라 이젠 우범 지대가 되겠구나. 저 아우디 A6 차주 열에 아홉이 양아치인 거 알아요? 근데 흰색은 빼박. 내가 또 여럿 봤지."

정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흰색 아우디 A6 차량의 도어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전조등의 전구가 깜빡였다.

“차주가 근처에 있나 봐. 내 말 다 들은 거 아냐?”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정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봐. 나만 그런 생각한 거 아니잖아.”

“다음에 봬요. 좋은 곳에서 더 여유롭게. 차는 곧 바꿀 거예요. 연희도, 어른들도 귀에 딱지 앉겠어서, 미안해하지 마세요. 먼저 갑니다."

익숙한 동작으로 흰색 아우디 A6 차량에 안착한 지훈과 연희는 이내 사라졌다. 사과도 변명도 하지 못한 정은은 두 팔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힘차게 휘저어댔다. ‘내 몸이 대신 보내는 사과야.’ 하듯..

“그만해도 된다고.”

“좋은 차는 룸미러, 백미러 사양이 좋다면서요. 물 건너온 명차인데 어련할까. 저 모퉁이 돌 때까지만."

“똑똑한 척하는 바보였네. 그걸 또 믿나.”

“안 믿었지. 근데 지금은 믿고 싶어. 그렇다고 말해줘요. 실은 내가 저 차랑 얽힌 사연이 좀 있어요. 나랑 등진 인테리어 사장 붕붕이더라고,, 아~ 그는 검은색인데 색 구별 없이 그냥 저 차가 싫은 거고, 지훈 씨 기분 상하지 않게 설명 좀 해줘요."

말을 마친 정은이 공손한 태도와 눈빛으로 인범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먼 산 보듯 했다.

이전 06화아이엠 그라운드 자기 소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