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범은 A형인 듯했다. 아니, 그간의 경험들로 A형임을 확신했다. 소심하지만 소심하다는 그 말을 싫어한다기에 커다랗게 당구장 표시를 했다. 직설 화법보다는 카톡 프로필 또는 SNS 상태 메시지에 의미심장한 글을 남기며 연막을 치는 족속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기에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의 속내를 파헤쳐볼까!!
ㄴㅃㄴㅈㅇㄹ.. 순간, 정은은 팔자에도 없는 영화 한 편을 찍게 되었다. <이미테이션 게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천재 수학자의 이야기.. 인범은 말속에 뜻을 숨겨 놓고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의 암호를 가로채야만 했다. 정은의 태도는 굳건했고 의지는 결연했다.
나쁜 놈 죽어라 - 사회생활이 녹록하지 않지. 암!!
나쁜 너 지우리 - 이별의 상처가 아직인가?
니뽄 놈 죽여라 - 독립운동가의 후손인가?
나쁜 놈 잡으리 -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가?
나쁜 너 자우림 - 안티인가? <매직 카펫 라이드> 노래 좋은데!!
네 뺨 내주어라 - 손버릇이 안 좋은데..
나쁜 남자 요리 - 요즘 뜨는 레시피인가?
난 빠네 좋아라 - 나도 빠네 좋아라!!
8분이 걸려야 가능한 십자 낱말풀이를 6분 안에 푸는 키이라 나이틀리도, 20대 초반에 천재 수학자로 불린 데이비드 컴버베치도 아닐뿐더러 암호 해독 기계 크리스토퍼도 없었기에.. 그의 속마음이 담긴 무작위 글자를 해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가끔 바보짓을 한다 하지만 가벼운 궁금함이 불러온 단순한 호기심일 뿐,, 서둘러 생각을 정리하고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별다방 매장 앞이었다. 번화가와 두어 블록쯤 떨어져 있음에도 드라이브스루 화살표를 따라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빽다방의 미국 버전이라던 손님의 농담 섞인 위로가 생각나 피식- 정은이 웃었다. 사람도 모자라 이젠 자동차도 열광하는구나. 쓴웃음을 짓고 출입문의 은색 손잡이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터덜터덜 올라간 2층 창가 쪽 좌석에 성은과 인범이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커피숍 죽순이를 쉬는 날까지. 센스 하고는.”
성은의 손가락은 비어 있는 인범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낮술은 부모님도 몰라본다고 해서.”
“모르는 소리. 넙죽 잘도 받아먹던 걸. 뭐.”
‘나는 너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듯 정은은 인범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고파하는 그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 난.”
“누가 또 와요?”
정은의 두 눈은 비어 있는 성은의 옆자리로 향했다.
“오랜만이에요.”
“윤쌤, 이게 얼마만이예요!!”
뒤에 선 치열도, 고개를 휙- 돌린 정은도 반갑기는 매한가지였고 성은의 옆자리에 앉으며 치열은 정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잘 지냈어요? 그래 보여요.”
“무소식 그거 할 만한데. 눈이 부시네. 이직의 효과인가?”
정은의 두 손이 '반짝반짝 작은 별'을 노래하자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치열은 웃었다.
“구관이 명관인가. 명불허전이라 해야 하나? 구 남친 옆에 자리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여기는 현 남친, 그새 취향이 좀 바뀌었네요. 피차 껄끄러우니 교통정리는 제가. 물은 마시는 거지 뿌리는 거 아니고."
테이블에 놓인 물이 담긴 종이컵의 사용 설명서를 정은이 차근차근 나열했다.
“여전하네요.”
“사람이 변하면 가는 곳은 딱 두 곳. 난 아직 살고 싶어요.”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
치열은 나란히 앉은 인범과 정은을 차례로 가리켰다.
“오다가다요. 담당 병원 1층의 커피숍.”
인범은 말했다.
“.. 아.”
“그럼, 두 사람은요?”
궁금한 듯 정은은 물었고.
“마지막 수업, 마지막 제자.”
치열은 답했다.
"남자 수강생도? 설마 이직의 실질적인 동기 부여?”
테이블을 살짝 내리치며 정은이 탄식조로 말하자 처져 있던 치열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캡틴!! 오 마이 캡틴.”
인범이 놀리듯 말하자 정은은 대놓고 눈을 흘겼다.
“마지막 수업 날,,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윤쌤이 두 사람 추천한 거였어. 몰랐지들.."
치열은 슬며시 웃었고 ‘말을 해줬어야 알지.’ 하듯 두 사람은 어깨를 쓰윽 올렸다.
“어머님들이 의욕만큼 뒷말도 많으셔서. 알려드리면 지적한다 뭐라 하시고, 한발 물러나면 늙은이 취급이 웬 말이냐며 성화여서 난감했었는데 정은 씨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기술 좋고, 게다가 현역이니 적임자다 한 거지."
“그랬지. 그 기수에 유독 기가 센 어머님들이 있었어. 그러고 보면 어른들한테 잘한다니까. 나만 빼고."
성은이 테이블에 놓인 정은의 손을 때리려 하자 그녀가 빠른 동작으로 무릎 위로 손을 가져갔다.
“공감대가 같으면 어른 아닌 친구죠.”
“여하튼 말은.”
고갯짓으로 인범을 가리키며 정은은 물었다.
“그럼 이 사람은요?”
“잘생겼으니까.”
하하- 치열이 소리 내어 웃자 머쓱한 듯 인범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몰랐네요. 애들만큼이나 우리들의 만남도.. 말입니다.”
인범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떨어뜨린 밀씨가 바늘에.. 도저히 외워지지가 않는구먼. <번지점프를 하다> 틀린 얘기 아니라고.”
답답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성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정은의 시선 위로 치열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선 긋는 것도.. 여전하고.”
“언제요?”
“방금도. 전에 순애 씨가 여행 기념품 받았다길래 손 내밀었더니 선물 주고받을 사이 아니라며 정색했으면서.."
“설마. 내가 그랬다고요?”
“원래 억울한 사람이 기억하는 법입니다.”
‘그때 내 기분을 알기나 해.’ 하듯 치열의 목소리에 묵은 섭섭함이 가득했다.
"전공이면서.”
인범이 목소리를 보탰다. 정은이 눈을 흘기자 인범의 눈에도 힘이 들어갔다.
“네모난 세상 내가 너의 동그라미가 되어줄게.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옳거니.”
담담히 말하는 치열을 향해 성은은 목소리로 응원을 보탰다.
“안 생길 거 같죠. 생겨요 어느 날. 그러니 일부러 막지는 말라고요.”
치열이 잔잔한 눈으로 찬찬히 말을 이었다.
“이럴 거였음 똑. 똑. 똑- 이 먼저였어야지. 좋은 말씀 전하러 온 거니까.”
정은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참, 수업은 즐거웠어요?”
환하게 웃으며 치열이 화제를 돌렸고 정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음.. 네. 정작 내 마음의 키가 한 뼘은 자란 셈이니까요.”
“에두르지 말고 정확히 어디. 왼쪽 마음?”
인범은 괜스레 시비를 걸었고 그의 예상대로 정은은 발끈했다. 익숙한 장면이라는 듯 성은은 시큰둥했고, 치열의 두 눈은 찰칵- 사진을 찍었다. 놓치기 싫은 듯 말이다.
“생겨요. 어느 날.”
“좋아했나 보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남자들이란.”
“맞네. 주어가 빠졌는데도 단박에 알아듣는 거 보면.”
“목적어겠지. '너는'이 주어고.”
“내가 원한 대답은..”
“좋아할 이유 충분하잖아. 능력도 있는데 사람도 괜찮아. 온통 여인천하인 주변 환경이 좀 신경 쓰인다는 거, 빼고는 뭐.. 어~ 나 이 상황 알 거 같아. 멜로 눈깔 위험한데.."
혀를 쏙- 내밀며 정은은 장난스레 말했다.
“it's your turn.. 놓쳐서, 못 잡아서, 후회막심한 그 사람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안 묻길래.”
“술자리 안주거리 하는 건 전 사랑에 대한 예우 아니고 솔직히 기회가 없었으니까. 흐름상, 정황상 오늘인 듯하네요. 내 패만 까는 건 억울해서요."
“그럼 제대로 까던가. 그리고 왜 후회막심할 거라 생각해요?”
“음.. 나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성질은 빨간색,, 불같아요. 상상력은 하얀색,,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요. 체력은 보라색,, 무지개 색깔 중 맨 꼴찌, 즉 바닥인 거고, 식욕은 노란색,, 노란색은 맛있어, 통닭도 바나나도 심지어 단무지도 맛있어. 인간성은 초록색,, 파릇파릇해요. 해서 아직 멀은 거고. 적성은 남색,, 남자 같아 서비스업에 최적화되지 못했다는 아~.. 연애관은 회색,, 아무리 밝은 색을 덧칠해도 칙칙하니까.. 근데 후배님은 검은색 같아서, 하얀색 물감을 섞는다 한들 회색일 테고 검은색 연탄은 타고나면 재가 되어 결국 부서지니까. 나.. 너무 갔나요?"
인범을 향한 정은의 시선은 조심스러웠다.
“그동안 말하지 않은 내 속마음이었는데 오늘이 가기 전에 말해주고 싶었어요. 생긴데요. 어느 날."
장난스레 시작한 대화의 끝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속마음 2스푼, 용기 2스푼, 장난 1스푼을 넣어 휘저었는데 아린 맛이었다. 실패한 레시피였다. 속마음 1스푼을 빼고 대신 웃음 1스푼을 넣었더라면? 뒤늦은 후회를 해보았다. 마음 한 자락을 펼쳐 보인 것만 같아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괜한 얘기는 해서,, 치열을 떠올리며 정은은 괜스레 짜증을 냈다. 안 생기기만 해 봐 어디~.
매장 상태 클리어, 주인장 상태도 클리어, 시모넬리 아피아의 그룹 헤드도 적정량의 물을 분사하고 있었다. 윙- 반복적인 소리를 내며 제빙기 역시 투명한 얼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그런데 정작 참새가 오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는 옆 건물의 백 선생이 운영하는 커피숍을 대놓고 염탐하던 그때, 4구짜리 캐리어를 양손에 든 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남자가 정은의 눈에 띄었다. 캐리어 정중앙에 자리한 백 선생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일침을 놓았다. '그러게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녀!',, 골목상권을 살리자면서요. 다 거짓말!! 인간 풍선이라도 해볼 양으로 문을 열고 데크로 나가서는 멀쩡한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며 일하는 척도 모자라 어닝 아래 달린 외부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 눈에는 음향 체크하는 몸사위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좋아요. 낮보다는 밤이 훨씬. 해서 노래로도 나왔겠지만.”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정은은 인범을 알아봤다.
“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나머지는 들어가서 들읍시다.”
성은, 치열과의 4자 회동 이후 목소리도 얼굴도 처음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그를 보자 정은의 마음도 노선을 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럼 '인범 따라 하기.' 스타트!!
“핫초코 주세요. 따듯한 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원한 거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다면서요?"
인범이 킥킥거렸다.
“원장님 오시려면 30분도 넘게 남았어요. 밥 먹고 오지.”
“그다지 생각도 없고, 근데 오늘 이상하다. 한가한데. 것도 너무.”
“오죽하면 내가 데크에 나가 있었을까. '여기 영업 중이에요.' 하고서.”
“햇살이 저리도 좋은데 <여수 밤바다>가 웬 말인지. 모퉁이 빵집 스피커에서는 <꽃송이가> 나오던데. 점심인데 엉덩이 들썩이게 쫌,, 물론 플레이 리스트는 랜덤일 테지. <여수 밤바다>가 나올 때 마침 내가 온 걸 테고, 한참을 들썩거렸으면 쉬어 가는 게 몸의 밸런스를 위해서도 좋고, 무엇보다 내 최애 곡."
줄줄이 비엔나처럼 읊어대더니 이내 정은의 눈치를 살폈다.
“핫초코 주세요.”
10oz 종이컵에 담긴 핫초코를 테이블에 놓은 후 정은은 말없이 인범을 바라보았다.
“휴게 음식점 발전 운운할 테니 앉으라고는 못하겠고 할 말 있으면 해요. 키라도 작던가. 장승처럼 우뚝해서는."
“빵 있어요. 먹을래요?”
“아니. 원장님 만나고서 밥 먹을 거예요. 걱정해 주는 건가?"
눈을 맞추려는지 인범은 고개를 한껏 들어 올렸다.
“목 아프겠다. 핫초코는 따듯할 때가 제맛이지. 먹어요.”
정은이 바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휴대폰을 보며 인범은 핫초코를 마셨다. 뭐 재미난 게 있는지 씩 웃기도 했다가 눈썹을 추켜올리기도 하면서 휴대폰에서 눈을 뗄 줄 몰랐고, 정은은 그런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선 인범은 빈 종이컵을 건넸다.
“잔에 달라고 할걸.”
받아 든 종이컵을 개수대 안에 대충 던져 놓는 정은이었다.
“저번에 했던 말..”
몸을 돌린 정은은 인범을 바라보았다.
“'나 너무 간 건가요.' 했던,, 생각해 봤어요. 부러는 아니었고 불쑥하길래. 검은색도 맞고 다 타고 재만 남은 것도 맞다는, 괜히 걸려할 거 같아서 신경 쓰지 말라고,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손님 많으면 어쩌나 했는데 당신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속에 말 해서 난 좋았네요. 그리고 속는 셈 치고 믿어보려고, 생긴데요. 어느 날.. 아니기만 해 봐. 책임 물을 거니까. 아~ 그리고 하나 겹치더라. 식욕은 노란색. 단무지도 맛있어,, 웃음 참느라고 애썼다는 건 안 비밀, 심각하게 했다가 사람 웃겼다가 여튼 잘해."
인범이 나간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정은이 읊조렸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