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 좀 켜지 말입니다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이쪽은 이산. 직접 해요.”

정은을 향해 인범은 소리 없이 표정으로 말했다. '적당히 해.'

“이렇게 가까이서 알현하게 되어 소인 그저 감개무량하옵니다.”

‘내 입만 아팠구나.’ 하듯 인범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고개를 들어 보아라. 듣던 대로 보기 드물게 잘 생겼구나.”

근엄하면서도 느릿한 산의 말투가 그럴싸했다. 정은의 눈이 인범을 향해 항의하자 그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마주 앉은 지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훈은 연희의 어깨를 괜스레 쓰다듬었고 그녀는 반달눈을 한 채 배시시 웃기만 했다. '한통속이로구나. 이놈들..'

“따끈한 청첩장을 받으시오.”

지훈이 건넨 청첩장을 살피던 정은의 눈썹이 꿈틀 했다. ‘나 여기서 질문.’ 하듯..

“캐리커처라고 하는 건가 이거? 눈, 코, 입은 사람, 긴 머리는 여자, 설마 연희 씨?”

연희를 향한 정은의 두 눈은 궁금했다.

“그렇게 만났지. 두 사람.”

인범이 대신 답을 건넸다.

“어깨를 들썩이며 환하게 웃는 연희에게 마음을 빼앗겼죠. 흐드러진 벚꽃 아래서 그대를 그리기에 더없이 좋은 날인 듯한데 함께 가지 않겠소!! 어깨에 멘 화통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먼지 쌓인 지훈의 보물상자 뚜껑이 열리자 산이 입을 열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미친놈.

“기껏 따귀 한 대겠지. 반대쪽 뺨 또한 기꺼이 내어주리라.”

지훈은 장난스레 진심을 툭- 털어놓았다.

“와.”

두 손을 꼭 잡은 정은의 표정이 사춘기 소녀 같자 ‘타이밍 안 좋은데.’ 하듯 인범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수업도 친구도 내팽개치고 오빠를 따라갔어요.”

곱씹어도 옳았다는 듯 연희는 예쁘게 웃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고.”

인범이라면 눈이라도 흘겼을 텐데, 묵직한 산의 음성에 정은은 끙- 앓았다.

“솔직히 저 자식 소띠잖아. 학번이 쥐띠인 거지.”

“이야기의 전개상 소띠 쥐띠의 진실 규명이 아닐 텐데.”

애먼 소리를 늘어놓는 인범에게 참았던 한소리를 하자 정은은 앓던 이가 빠진 듯했다.

“방랑 이지훈 화백의 <벚꽃 아래서의 연모>가 탄생된 배경, 청첩장 구상하면서 생각이 나길래. 작은 종이 안에 연희를 다 담을 수 없기에, 아직도 미완성이지만.."

“그건 살면서. 차근히 함께 그려가자.”

지훈과 연희의 눈이 서로를 향해 말했다. '사랑해!!'

칠 년이라는 연애 기간,, 듣는 사람이나 감탄할 뿐 정작 당사자들은 눈물, 콧물은 물론 심하면 염라대왕님 알현할 뻔했다는 것쯤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깎고 보태고 하는 인고의 세월이 어른들의 사랑이라는 걸 알기에,, 두 사람의 칠 년 역시 이런 사연들이겠지. 그럼에도 궁금했다. ‘이젠 안녕.’할 기회가 무수히 많았을 텐데 ‘너와 함께.’인 이유가,, 정은은 뻔하게 물었다. 그게 정공법이니까.

“1년은 365이고 7을 곱하면 대체.”

“2555일.. 그쯤일 테고 이별했던, 외면했던 시간들이 있었으니.. 2447일 딱 거기까지만 기억해요. 대판 싸우고 헤어지려고도 했어요. 결말을 미리 알았더라면 싸우지도 부러 힘 빼지도 않았을 텐데,, 칠 년 하고 조금 더 만났어요."

연희 역시 정공법으로 답하고는 지훈의 팔을 쿡 찔렀다.

“너 닮은 딸 꼭 낳고. 연희가 부처지.”

산이 두 손을 모은 채 ‘나무 관세음보살.’ 하자 연희를 바라보는 지훈이 눈치 못 채게 정은이 서둘러 동의의 고갯짓을 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 잘 살아라.”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써먹어요. 못됐어. 아주.”

정은이 인범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가 슥슥- 문지르며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럴 자격 있어 나는, 납치 빼고 수많은 공작을 수행했으니까. 군대는 괜히 일찍 다녀와서. 병원 귀신하는 산이는 번번이 열외였으니 홀로 고군분투했다는."

‘니들이 알기나 해.’ 하듯 인범의 눈은 정은을 중심으로 산, 지훈, 연희를 훑었다.

"내 사랑이 더 순탄치 않으니. 내 님은 태평양 건너 캥거루와 함께 있어요."

산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그녀가 인범의 동생임을 알고 있다는 뜻을 담아 정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직서고 눈 좀 붙이려나 했는데 병원 앞이라고, 전화기를 타고 오는 목소리도 침울한데 안 봐도 비디오다 네놈 모습.. 지훈이는 연희 생각에 밤새 당직을 섰더라고. 퉁퉁 부은 눈이 안쓰러워 편의점에서 산 바나나 우유를 건넸더니 노란색 빨대 꽂아 바나나 우유 먹는 연희가 병아리같이 이쁘다고 엉엉 우는 거야. 병아리처럼 귀여운 사람을 못 본 거지."

“누구야? 인해 바나나 우유 안 좋아하는 거 나도 알고 너도 아는데.”

인범이 낱낱이 따져 물었다.

“다섯 살 지은이. 병아리가 좋데.”

“많이 아파?”

“응. 소아외과는 환자가 아파서 그래서 의사는 더 아파.”

'딱해라.' 인범이 얼굴로 말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산이 부러 밝은 톤을 선택했다.

“아직이다만, 그런 의미에서 예명은 튼튼이.. 어때!!”

산이 지훈과 연희를 바라보자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긍정의 끄덕임으로 답을 했다.

사랑 ➊의 ➊번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국어사전은 말하고 있었다. 정은이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었다. '지훈이랑 연희가 그렇더래요.'


“나한테만 야박하지.”

인범이 때아닌 볼멘소리를 했다.

“사돈에 팔촌까지 세워 봐도 집안에 의사가 하나 없어. 약사는 둘씩이나 있는데. 맘이 맞는 인테리어 업체 만나기도 어렵고."

“그럼 연희는?”

“이쁘니까.”

인범의 얼굴은 뾰로통했다.

“좋은 친구들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지훈과 연희의 오늘이 있기까지 본인의 공이 8할이라 호언장담하는 인범을 향해 친구라면 당연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레 그의 기세를 꺾은 정은이었지만 산과 인범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두 사람을 이어 주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정은은 연희가 부러웠다. 그리고 인범의 친구들이 자신에게도 그래 준다면,, 하고 내심 바랬다.


손에 든 A4 용지를 넘기다 말고 정은의 눈은 인범을 향했다.

“대출 거래 약정서도 아니고 참 빼곡하기도 하다.”

“응급실은 사양한다던 전에 그 말이 걸려서.”

“아..”

'24시간 대기조는 안 하겠다던 혹, 전에 그 말인가?' 정은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당신 입장을 최대한 고려한 나의 계획서이니 꼼꼼히 검토해요. 참고로 동호회도 달에 두 번은 정기 모임 한다는데 친목 도모가 목적이니 기존 루틴대로 일요일 네 번.. 삼 개월."

잠시 망설이던 인범은 마지막 세 글 자 '삼 개월'에는 무게를 실었다.

“말도 안 돼.”

“말이 될 텐데.”

호치키스가 박힌 A4 용지의 마지막 장을 정은의 눈앞에 최대한 가까이 들이밀었다.

“정말?”

한 뼘은 커진 정은의 두 눈은 인범을 향했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해.’ 하듯 인범의 고갯짓엔 힘이 실렸다.

“달에 삼십만 원. 삼 개월이면 괜찮은 제안이긴 한데. 별다방도 아니고 개인 커피숍 몰아주기 하다가 총무과 감사 대상 되는 건 아닌지.."

“백수 되면 공짜 커피는 줄 테지."

인범이 웃음을 쏘아 올렸다.

“농담 참 진지하게도 한다.”

“삼십만 원이면 쿠폰이 몇 개야? 3을 곱하면 몇 잔이야 대체!!”

껄껄- 인범이 시원하게도 웃었다.

“기존 방식대로 근거리는 잔 커피로 원거리는 더치 보틀이나 수제청으로, 선주문하면 공급에 차질 없을 테고, 타 제약회사 직원들도 그런다면서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영업 사원의 기본 덕목이지요.”

훗- 웃는 인범과는 달리 정은은 시무룩했다.

“왜요.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 된 것 같아 쓰려요?”

"그건, 명분이라도 있지. 어째 글자 수가 촘촘하더라니. 그런 마음이라 타이핑하는 모든 순간이 좋았더라 했겠네. 아주."

정은의 목소리가 꽈배기 모양이었다.

“비약하기는.”

“자주 오겠네요.”

“아무래도.”

후- 정은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근데 왜 삼 개월이에요?”

“삼 개월이면 구초쯤 되겠지. 더워지면 머리도 묶고, 뻔할 테지만 반바지 입은 모습도 보겠지. 그건 기억에 없어서. 인절미 빙수도 먹겠지, 내가 좋아해요. 무엇보다도 구월 말에 인사고과 있거든. 난 연봉 올리고 당신은 매출 올리고. 우리 함께 파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인범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장난스럽게 에둘러대는 인범을 향한 정은의 눈매는 서글퍼졌다. 가을이 오면 어떤 모습일까?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상상은 현실과 반대일 때가 더 많은 법이기에..


빠앙- 자동차 클락션 소리가 밤의 한적한 도로 위를 점령했다. 이에 정은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차량과의 거리를 대강 헤아리고서 차도와 보도블록 경계선의 끄트머리로 최대한 두 발을 붙인 후 앞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빠아앙- 연이어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안되겠던지 건물과 건물 사이 일방통행만을 허용하는 도로 위에 불법 주차 중인 차량 뒤의 빈 공간으로 일단 피했다.

'차도에서는 네놈이 왕이지. 지나가거라.'

멈춘 정은의 동작에 맞춰 자동차 역시 움직임이 없었다. 빠아앙 빠앙- 어둠 속에서 울리는 거세진 경적 소리만큼이나 발칵- 짜증이 차올랐다.

'대형 버스도 아니면서 왜 못 가냐고, 심봉사도 너끈히 지나가겠다. 음주 운전 아니야?'

속마음을 감춘 채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정은이 보낸 수신호에 자동차의 바퀴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얼마 가지 않아 돌연 멈춰 섰다. 이로써 거리를 둔 채로 자동차와 정은은 마주 선 형국이었다. 이내 자동차 앞 좌석 창문이 쓱- 내려갔다. '뭐지? 설마 고맙다는 말??!!'

“집 가는 길이면 타요.”

자세히 보니 반쯤 내려간 앞 좌석 창문에 딱 목만 걸친 인범이 아닌가? 확실한 한 방이면 모가지 댕강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감춘 속내가 연방 부채질을 해대는 탓에 정은은 두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뒤차 뭐라 하잖아요. 얼른 타요.”

인범의 차량 뒤에서 꼬리를 물고 있는 차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부러 시끄러운 상황 만들까 싶어 마지못해 앞 좌석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디서부터였어요?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

“가게 앞에서부터, 클락션 한 번 더 눌렀으면 죽이겠던데.”

정면을 응시한 채, 정은의 시선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열린 입으로 인범은 멋대로 지껄여댔다.

“영원한 것은 없다죠.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요. 주 5일 근무도, 6시 칼퇴도, 아님 작정하고 소개팅을 하던가. 애먼 사람 찾아와서 왜 진상짓인지.."

날이라도 잡은 듯 정은 역시 꺾이지 않았다.

“기껏 생각해서 왔더니만, 종일 빗방울 떨어지길래 비 맞는 커다란 생쥐 구하러 온 사람한테 뭐??"

“가랑비에 옷 안 젖고요. 보다시피 소강상태..”

“군산은 아직이라.”

“군산은 왜요?”

안전벨트를 풀고 인범은 뒷좌석에 놓인 종이백으로 향했다. 몸의 중심을 정은에게 반쯤 걸친 채로 말이다. 그의 목울대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심장 멈추기 전에 숨 쉬지.’.. 깜박깜박- 눈은 제 기능을 했지만 호흡은 진즉에 고장 난 모양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노란색 종이백을 툭- 건네고서 인범은 재빠르게 안전벨트를 채웠다.

“일로 군산 갔다가 유명하다길래 비 오는 날엔 기름진 거 당기니까. 야채빵 맛나더라."

종이백을 가슴팍에 단단히 감싸쥐며 불편한 상황임을 정은이 몸소 표현했지만 인범의 눈길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도블록 놔두고 굳이 위험한 차도로 가는 건지. 클락션 누르면 올라가겠지 했더니만, 웬걸 세 번이나 눌렀는데도 똑같던데.. 평상시에도 그러나?"

“보도블록 교체 작업하는지 죄다 파헤쳐 놓아 온통 모래투성이라. 일찌감치 그쳤다만 오후 내내 쏟아진 비에 흠뻑 젖은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면 빠지지도 않고 축축하기도 하고."

말끝에 정은은 오픈토 샌들로 대충 가린 두 발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댔다.

“오길 잘했네. 여러모로.”

보조개가 드러나게 배시시 웃는 인범을, 정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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